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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여행/전라남도

울돌목(명량, 鳴梁)

명량(鳴梁) 해전의 현장

조선이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는 KBS 대하드라마《불멸의 이순신》을 통해 우리에게 깊이 새겨 주었다. (2004.9.4~2005.8.28) 스물세 번 바다에서 왜군과 싸워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이순신 장군의 슬기로운 전략은 천추에 빛나고 있으며, 전 세계 해군사관학교에서 해전의 모델(교본)로 삼고 있다. 13척으로 133척의 왜군을 맞아 싸웠던 바로 그 격랑의 현장에서 회오리치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426년 전, 그날의 격렬했던 명량 해전을 잠시 그려 보는 감회에 잠겨 보았다(6.24 2023).

▶명량 해전(鳴梁海戰)-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10월 26일(음력 9.16) 이순신의 함선 13척이  일본 함선 133척을 격파한 해전.

 

 

울돌목(명량해협(鳴梁海峽)

울돌목은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의 화원반도와 건너편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이다. 길이는 약 1.5km이며, 제일 깊은 곳이 19m이며 제일 낮은 곳은 1.9M이다. 해협의 폭은 294m이며 양쪽 해안의 25m 이내는 깊이가 5m 정도이며 가파른 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밀물 때에는 남해의 바닷물이 명량해협을 지나 서해로 흐르고 반대로 썰물 때에는 서해에서 남해로 흐른다. 조류의 속도는 초속 4m로 흐르다가 울돌목에서는 초속 6.5m로 빨라진다. 울돌목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유속이 빠른 곳이다.

 

 

울돌목의 이름 유래

해협의 물 바닥에는 높고 낮은 바위들이 울퉁불퉁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빠른 물살이 지나가면서 바위에 부딪혀 회오리치며 요란한 물소리가 8km 밖에서 들려서 예부터 사람들이 물이 우는 소리를 낸다고 하여서 울돌목(명량 鳴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진도 큰 다리(大橋)

1984년 완공된 울동목(명량)을 가로지르는 길이 484m, 너비 11.7m의 진도 큰 다리가 건설되어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와 진도군 군외면이 연결되면서 진도와 내륙은 하루 생활권이 되었다. 또 2005년 12월 15일 제2진도대교가 개통되어 가고 옴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게 되었다. 1960년대 내가 처음 진도를 갈 때는 목포에서 태풍경보가 주의보로 바뀌었을 때 목선으로 배가 뒤집힐 것 같은 험난한 항해를 경험해 본 적이 있다. 그 뒤 진도 목포 간 쾌속정이 생겨 바닷길이 좀 편해지다가 진도 다리가 놓였다. 그때는 진도 큰 다리 하나만 있었다. 몇 번 광주에서 버스로 진도 큰 다리로 건너면서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여기서 왜군을 격파한 바다를 그려 보곤 했는데, 이제 가까이에서 그 물결 그 소리를 듣고 본다는 것이 감격하기만 하다.

 

 

해남과 진도를 잇는 삭도

해남과 진도를 잇는 케이블카는 타 볼만하다. 발아래 푸른 바다를 건너지른 진도대교의 늠름한 모습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의 13척의 함대로 133척의 왜군의 함대를 쳐부수고 나라를 구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수영 관광단지와 진도를 오가며 두루 돌아볼 수 있는 멋있는 곳이다. 진도 타워에서 물길과 산책로를 따라 명량의 유적지들이 이어져 있어서 산 역사 공부와 체험을 할 수 있다. 세차게 흘러가는 울돌목으로 흘러가는 바닷물과 함께 걷는 산책로는 휴식 공간으로도 안성맞춤이다.

 

 

오늘 우리들을 인도하고 있는 장태영형제는 태백산 준령과 동해가 맞닿은 강릉시 사천진리에서 태어나 예수님을 믿고 전남 영암 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복음을 전하여 영암교회를 개척하여 은퇴한 지금까지도 섬기고 있는 훌륭한 목회자이다. 주님은 형제의 사역을 도울 간호사인 이송순 자매를 배필로 허락해 주셨다. 인구절벽 시대를 맞이하여 한민족의 장래가 불안정한 이때 일녀 삼남, 네 명의 자녀를 키워낸 자랑스럽고 모범적인 가정이다. 직장에 근무하는 동안도 성실했고 이제 은퇴하여서도 여전히 복음 사역을 위하여 삶을 드려 주님을 섬기고 있는 귀한 형제자매를 나는 존경하고 있다. 

 

 

울돌목의 소용돌이

진도 큰 다리에서 조금 내려오면 물이 가장 거세게 회오리치는 그 위로 타원형 스카이워크를 만들어 놓아 그 위로 걸으면서 거센 물결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전라 우수영 

해남 우수영을 갈 때 거북선 유람선을 타고 울돌목의 물결을 경험하기를 기대하였다. 막상 가 보니 거북선 유람선이 운항을 하지 않은지가 몇 년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좀 실망스럽기도 하고 화가 났다. 왜냐하면, 사이트에는 계속 운행하는 것으로 떠 있기 때문이다. 상 윤리상 영업을 안 하면 광고를 내리던지, 운행을 안 한다는 안내를 해야 할 것이 아닌지, 더욱이 나는 캐나다에서 기대하고 갔는데 황당하기만 했다.

 

 

거북선(turtle ship)

거북선(귀선 龜船)은 조선 시대의 군함이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갑판 위에 뚜껑을 씌운 배다. 왜군이 거북선 위로 오르지 못하도록 송곳을 꽂았다. 배머리인 용머리와 선미인 거북이 꼬리에도 포를 달아 쏘도록 했다. 또 배 양옆으로 포 6개씩 달아 쏠 수 있도록 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직전에 건조하여 사천 해전에 첫 출전한 이래 일본 수군과의 열여섯 번의 해전에서 열여섯 번 이기는데 크게 활약하여서 왜군에게 이 귀선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함선과 왜선과의 비교

판옥선 (板屋船) 은 조선 수군의 대표적인 주력 군함이며, 왜군의 주력함은 세키부네이다. 판옥선은 2층 구조로 만들어져서 밑에선 노꾼들이 노를 저었고, 위에서는 포를 설치하여 전투하는 병사들이 활동하는 곳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의 전투방법이 다르다. 왜군은 배를 붙이고 적선에 올라와서 싸우는 근접 전을 하므로 전투 요원이 많이 탄다. 조선군은 포와 화실로 원거리 전투방법을 취하였다. 판옥선은 노꾼이 110명에 포격수 36명 그리고 궁수 18명 정도이며, 왜선은 노꾼 90명에 전투원이 약 200명 정도 탄다.  

 

복원된 판옥선

복원된 판옥선에 올라보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남해 바다를 휘저으면서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함대의 위용을 실감하게 되었다.  

 

       《호남 땅은 나라의 울타리이다. 만약 호남이 없으면 곧바로 나라가 없어질 것이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지켜낸 조선민족의 끈기와 용맹함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다. 그 가운데 바다를 지켜 나라를 구한 애국열사들의 주축은 바로 호남 사람들이었다.

 

명 량 해 전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의 수군을 대파한 왜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동안 이순신 장군 때문에 막혔던 남해를 장악한 왜군은 울돌목을 거쳐 북으로 올라가 한강을 타고 한양을 점령하려고 했다. 1597년 10월 26일은 조류가 밀물 때여서 남해의 물이 빠르게 울돌목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 해남 어랑 포를 떠난 기세 등등 한 왜군의 330척 함대는 빠른 물길을 타고 명량해협 가까이에 이르렀다. 빠른 조류와 좁고 얕은 수심 때문에 큰 주력 선인 아다케부네(安宅船, 안택선) 함대는 해협 밖에 머무르게 하고, 13척 밖에 안 되는 조선 수군의  함대를 얕본 왜군은 133척의 중형 전함 세키부네(關船, 관선)를 먼저 보내 조선 수군을 처리하도록 했다.

▶ 칠천량-지금 경남 거제도 인근 해협

 

 

이순신 장군의 함대 출전

왜군이 울돌목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한 이순신 장군은 전군을 모아 놓고,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외치면서 결의를 다짐한다. 그 뜻은,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한목숨 나라를 위하여 아낌없이 바치자는 각오로 싸우라는 격려였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는 이순신 장군의 좌우명이다. 이 명언은 이순신 장군이 처음 말한 것이 아니라, 중국 춘추시대에 오자(吳子) 병법서 제3편 치병(治兵) 편에 있는 말로, “필생 즉사 필사즉생 (必生則死 必死則生 )”이 원래 순서이다. [전쟁터에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요행히 살고자 하면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항상 필사적인 심정으로 싸움에 임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

 

 

왜군의 패전의 원인

그날 왜군의 함대가 울돌목에 들어설 때는 오전 10시 10분경으로 남해에서 서해로 빠르게 빠져나가던 밀물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하는 때였고, 우수영을 떠난 이순신의 함대가 울돌목에서 왜군의 함대를 맞을 때는 오전 11시경이었다. 왜군은 조류의 순방향을 타고 공격하고 있었고, 아군은 역류를 거스르면서 싸우는 불리한 입장에서 악전고투하는 와중에 시간이 12시 21분에 이르자 밀물의 흐름이 잠시 멈추었다. 이때를 정조(錠潮)라고 하는데, 밀물과 썰물이 바뀌려는 순간에는 물의 흐름이 30분-1시간 정도 잠시 멈춘다. 그리고 바다는 고요해진다. 이순신 장군이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다린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12시 21분경 이제 물의 흐름이 반대로 썰물이 되어서 서에서 남해로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자 왜군은 거센 물살의 역류를 맞아 혼란에 빠져 좌충우돌하고 있을 때, 조선 수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썰물을 타고 진격하면서 총공세를 펼쳐서 31척의 왜선을 침몰시키고 100여 척을 반파시켰다. 멀리서 관망하던 왜 수군 전단은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 왜군 전사자는 3000~40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조선 전함은 한 대도 파손되지 않았고 전사자는 10여 명과 몇 명의 부상자가 전부였다. 명량 해전의 승리로 왜군의 한양 진격을 좌절시켜 다시 한번 나라를 구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이순신 장군의 수군은 23전 23승으로 불패의 신화를 남겼다.

▶일본의 소요시토시 보고서에는 침몰한 왜선이 100여 척이라고 하는데, 아마 반파된 함선도 포함한 것으로 추정해 본다.

 

 

명량해전의 과학적 분석

명량 해전의 승리는 자연의 조화를 이용할 줄 아는 이순신 장군의 지략과 전술 때문이었다. 명량 해전은 1597년 10월 26일 하루, 그것도 몇 시간 만에 끝난 수수께끼 같은 해전이어서 해전의 전설이 되었다. 왜군은 힘에 의한 전술에만 의지하고 있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자연의 조화를 전술에 이용하였다. 이 신비한 자연의 조화를 왜군은 몰랐지만, 이순신 장군은 알고 있었다. 명량 해전의 승리는 밀물과 썰물의 신비한 조화로 만들어진 한 편의 드라마였다.

 

조선 수군의 승리의 비결

조선 수군이 10배나 많은 왜군을 이길 수 있었던 조류의 비결을 밝혀내려고 국토해양부의 해양조사원은 2009년 11월부터 6개월간 최신 과학장비를 동원하여 명량대첩이 있었던 그날의 조류 흐름의 현상을 시간대별로 과학적으로 밝혀냈다. 그 자료를 토대로 임진왜란 전쟁 전문가인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가 당시 교전 상황을 그날 조류의 흐름의 시 간대별로 전투상황을 대입하자 명량 해전은 한편의 드라마로 탄생했다.

 

 

해는 졌다가 뜨며 왜적을 삼킨 울돌목의 회오리치는 물결은 여전히 소리 내어 울고 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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