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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삶의이야기

결혼

결혼의 첫걸음

박 자매와 나 사이에 쌓인 연분으로 이제 결혼을 해야겠는데 부친이 반대하고 있어서 마음이 편치를 못했다. 유평 그 집 사랑방에서 말씀을 전할 때마다 나의 설교를 들으시는 노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해 초겨울 미국에 들어가 계신 매카피 선교사로부터 경남 거창 장팔리 교회를 겨울 동안 돌보아달라는 부탁이 와서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 결혼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편히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유평에 심방 가서 부친을 만나 뵙고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랬더니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때 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면으로는 믿음뿐이었지 물질적으로는 결혼할 준비도, 살 준비도 안 되어있었으니, 그 어르신 말씀이 옳았다. 그런 대도 결혼은 해야 하는 나에게는 믿음, 좀 속된 말로 믿음과 배짱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부친께 우리는 법적으로는 부모 동의 없이도 결혼할 수 있는 나이들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동의를 받고 축복 가운데 결혼하고 싶다고 허락해 달라는 말씀드리면서,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장래가 구만리 같은 사람에게 재물이 있다. 없다 하지 마시라고 하면서 믿어 보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 경남 거창에 있는 장팔리 교회를 돌보기 위해서 가는데 아무쪼록 허락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물러났다.

 

결혼 준비

장팔리에 간지 거의 반년이 지나는 동안 박 자매 아버님께서 우리의 결혼도 허락하셨다는 소식이 왔다. 해가 바뀌어 1966년 4월 장팔리에서 올라온 나에게 결혼할 수 있는 특별한 결혼자금은 없었다. 내 집에다가는 결혼비용은 의논하고 싶지 않았고, 내 일은 나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매카피 선교사님은 한겨울 수고하고 돌아온 나를 격려해 주시었다. 나의 결혼을 위하여 새 양복 한 벌과 새 구두와 봉투 하나를 주셨다. 또 부평에 계시는 Mr. Harry Birdsall이 내 결혼을 위해서 선물 봉투 하나 주셨는데, 신혼여행을 갔다 오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주님은 이렇게 부족한 것을 두루 살펴 주시고 계셨다. 결혼은 내가 모아서 한 것은 한 푼도 없었다. 믿음으로 결혼한다고 주님께 고하고 대책 없이 살기는 해도 주님은 나의 필요를 이렇게 해결해 주시고 계셨다. 기적과 같은 주님의 축복으로 넉넉한 결혼을 준비할 수가 있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란 말씀같이, 나의 삶 속에서 그 믿음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은 마치 한 송이 꽃이 활짝 피기까지의 여정과 같았다.

 

결혼식 1966년 4월 23일 토

우리가 결혼하던 사후동 골짜기는 진달래며 개나리 등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나면서 봄의 향기가 짙어져 가고 있던 때였다. 매카피 선교사의 주례 그리고 강태훈 원장의 통역으로 우리가 개척한 사후동 교회당에서 봄의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멀리 부평에서 강태훈 형님 내외와 Mr Harry Birdsall과 그의 식구들, 그리고 선교학교 학생들과 교회 식구들이 축하해 주었다. 결혼식만 사후동 예배당에서 올리고 모든 분들을 모시고 유평으로 가서 떠들썩한 잔치를 벌였다. 처 갓 집에서 잔치는 도맡아 해 주셔서 고마웠다.

 

 

유평 주일 학교

마침 토요일이라 저녁에는 공회당에서 어린이 주일학교가 있는 날인데 아이들에게 설교할 사람이 없다고 내게 알려왔다. 내가 늘 하던 일이기도 해서, 나는 기꺼이 내가 하겠다고 나가는데, 장인 어르신이 오늘 같은 날에는 가만있지. 하시면서 말끝을 흐리셨다. 그러나 나는 항상 주님의 일이 먼저니까, 개의치 않았다.

 

신혼여행 4월 24일

원래는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거창에서 늦게 올라와 바쁘게 준비하느라 제주도 날틀을 예약하지 못해서 갈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철 따라 일주일에 한두 번 다니는 때였고 봄인지라 빨리 예약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부산에서 여객선으로 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결혼식 다음 날 우리는 서울서 오신 처가 친척분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내일 부산 가는 표를 샀다. 을지로에 있는 삼화 호텔에서 하루를 쉬면서 우리의 신혼여행은 시작되었다. 4월 25일 우리는 재건 호로 경부선을 달리면서 생명이 피어나고 있는 봄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면서 부산에 내려갔다. 재건 호로 신혼여행을 가고 있는 나는 10대 후반에 숭의동에서 살면서 동인천이나 배다리 시장 쪽으로 갈 때면 늘 철길로 걸어가곤 했는데, 그때 나는 결혼하면 서울·부산 급행열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가리라고 마음먹었었는데, 오늘 그 마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부산에 내려 부두에 가서 제주도에 가는 배를 알아보니 마침 태풍 경보가 내려져 있어서 운항을 못 한다고 한다. 섭섭하지만 우리는 발걸음을 해운대로 돌렸다.

 

해운대

해운대 관광호텔에다 짐을 풀고, 해운대 바다에 나가 밀려오는 파도소리와 함께 거닐면서 신혼의 휴식을 즐겼다. 그때 아직 우리나라는  여름이면 바다로 몰려오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고 해운대가 해수욕장도 구체적으로 시설을 갖추지 않은 천연 그대로였다. 그래서 바닷가 포장집도 제멋대로 여기저기 드문드문 있었다.  4월이기도 하고 해수욕 철이 아니라 한산한 바다에는 갈매기들만이 우리를 반겨주는 듯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마침 파도가 철썩거리는 바닷가에 있는 포장집이 있어서 각종 해물을 보면서 안으로 들어가 아주머니에게 내일 아침 해물 탕을 주문하였다. 우리는 한 곳에 오래 있기보다는 여러 곳을 가보기로 하여 내일은 경주로 갈 계획을 하였다.

 

 

 

밝은 아침 해님을 맞으며 예약한 포장집으로 갔다. 먹음직한 해물탕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도 소리와 함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먹는 해물 탕의 즐거움은 또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경주

우리는 오전에 기차로 경주에 내려서 경주관광 호텔에 들었다. 경주를 돌아보면서 신라 천년고도의 찬란한 문화를 맛보았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살펴보면서 불교문화와 그 옛날 정교한 건축술의 깊음도 맛보았다. 

 

 

경주 박물관

경주 박물관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신라의 문화 예술을 맛보았다. 그 가운데서 에밀레종에 담긴 전설은, 전설이기는 하지만, 내 마음을 찡하게 만들었다.

 

 

포석정

포석정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유흥을 즐기던 신라 상류사회의 멋스러움을 느껴보았다. 

 

 

 

첨성대

그리고 첨성대에 이르니 국민학교 때 배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진에도 견디게 만든 건축술, 천문관측과 연구를 위한 신비로움들을 간직한 첨성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비밀을 간직한 채 말없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영덕 게

첨성대 주위에는 아주머니들이 동해 영덕의 싱싱한 게를 팔고 있어서 얼마큼 샀다. 우리는 나무 그늘 잔디밭에서 게의 맛을 즐기는데 나의 신부는 처음 먹어보는지 맛이 있다고 대단히 좋아했다. 2박 3일의 경주여행은 우리에게 천년고도 신라의 새로운 세계를 맛보는 즐거운 날들이었다.

 

 

 

 

대구

Mr. Harry Birdsall이 근무하고 있는 대구로 내려가서 이틀을 지냈다. 대구 여행사에 알아보니 서울 가는 날틀 표 자리가 마침 있어서 표를 살 수 있었다. 앞으로 살 생각을 하면 돈도 아껴 써야 하는데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때가 때인 만큼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 큰돈을 썼다. 우리의 신혼여행은 1주일간 관광하는 코스가 되어버렸다. 아직 카메라가 일반화되어 있지 못하던 그 시절에 Mr. Birdsall이 큰 쌍안경과 일반 카메라와 코닥 환등 필름을 5통이나 사주셔서 우리 생애에 길이 남을 귀한 기념물이 되었다. 즐거운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에게는 쉴 틈도 없이 율북리(지금 수부 교회) 개척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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