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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삶의이야기

한미 재단(Korean-American Foundation)

한미재단 4H 농촌 기술 훈련

여름방학이 가까울 무렵 교감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부른다. 교감은 그동안 나의 농장 생활을 잘 살펴보고 있었던 것 같다. 과거에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이 싫어서 농장에 내려가 있으려고 하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결과가 안 좋아서 그 뒤로는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학생은 배우려고 열심히 잘하고 있어서 좋다고 하시면서, 한미재단 농촌 기술훈련코스에 학교 대표로 추천했다고 갔다 오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경비는 한미재단에서 주니까 가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다. 보고서는 다음 학기에 내라고 하셨다. 그 여러 학생 가운데 나에게 이런 혜택을 주시니 고마웠다.

 

한미재단 (Korean-American Foundation) 

5.16 군사 혁명 정부가 일차 농업 5개년 계획을 시행하면서 산지와 개펄 개간과 그리고 농업 전반에 걸친 생산증대를 위한 기술 개량을 위해 낙후한 농축 기술 개발을 위해 미국의 후원으로 한미재단이 설립되었다. 미국의 4H의 전문지도자인 Mr. Anderson의 지도 밑에 한국의 4H 농촌지도자와 청소년들을 단기간 훈련하고자 세워진《4H 농촌 기술훈련학교》이다. 며칠 뒤 한미재단으로부터 소식이 왔다. 내가 올 때 철원 농업고등학교 대표로 오는 학생을 마장동 터미널에서 만나 데리고 와달라는 부탁이다. 마장동에서 철원에서 오는 학생을 만나 데리고 봉천동에 내렸다. 농장은 신림동 골짜기에 있어서 다니는 버스가 없어서 한 4Km 정도를 걸어야만 했다. 별들이 총총한 어두운 길을 걸으면서 나는 그와 주님께서 값없이 구원해 주신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걸었다. 그는 천주교 학생이었다. 나는 그에게 “구원을 받았느냐?”라고 물으니, 그는 나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이라고 대꾸하였다. 나도 천주교에서 교리 공부를 한 적이 있어서 그를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는 동안 저 앞에 4H 훈련학교의 불빛이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한미재단 4H 교육장     

이번 훈련생들은 20여 명으로 한미재단 훈련학교 15기생으로 주로 전라남도 지역에서 온 4H 지도들과 서울 경기도 그리고 강원도의 농업고등학교 대표로 온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임시로 신림동 골짜기에 산지 개간의 시범 농장을 만들어 놓고 개간지에 가축들을 기르면서 한국 농촌의 미래를 지고 갈 젊은 농촌지도자들인 4H 지도자들을 우선 불러서 교육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산지 개간을 하는 기본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듀록저지(Duroc Jersey)라는 미국 돼지를 처음 대하게 되었다. 이 돼지의 발음이 어려워서, 한국 사람들은‘주록 조오지’라 하다가 나중에는 쉽게 ‘붉은 돼지’라 불렀다. 한국에서 농가마다 키우는 검은 돼지는 종자도 문제이지만 뜬 물에 겨를 타서 먹여 키우기 때문에 영양부족으로 빨리 크지 않아서 경제성이 낮았다. 질병에 강하고 300Kg까지 크는 다식성의 이 돼지를 과학적으로 키워서 고기를 공급하기 위하여 가져온 종 돈들이었다. 수료한 훈련생들에게 우선 이 듀록죠지 종돈을 분양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앙골라 토끼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 앙골라 토끼 털은 대구에서 생산되는 제일모직 같은 수출용 고급 모직에 쓰이고 있어서 농가 부업으로 권장하고 있었다. 또 우유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젖소 홀스타인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아직 우유 생산을 못 하고 있던 그 시대에 젖소에 대해서 배우면서 앞으로 우리나라의 낙농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선생들은 대부분 한국의 농대와 축산대학 출신의 선생님들이었고, 두 분은  미국 선생님이었다. 거기서 공부하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견문과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번 훈련을 받으면서 서구의 농업이 왜 발전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고, 나는 현대 농업에 눈을 뜨게 되었다. 유축농업, 사료 학, 양돈 학, 과수 학, 등 여러 가지를 간단하게 배웠는데, 나의 공부에 큰 보탬이 되었다. 특별한 것은 산지 개간법인 계단식(Benching)과 등고선(Terracing) 개간 법을 배우면서, 우리 어른들이 산지를 밭으로 일구어 사용한 것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새로웠던 것은 흙벽돌 만드는 방법이었다. 우리 어른들도 흙벽돌을 만들어 쓰기는 했어도 과학적이지 못했고, 흙벽돌로 현대식 주택, 또는 이 층 건물을 지을 생각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알고 나면 별것도 아닌 것 같지만, 처음 그런 아이디어를 만들어 낸 그 머리들은 얼마나 훌륭한가! 여러 지역에서 온 친구들과 사귀며 농촌의 실정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몇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좋았다. 농촌에서 살아 본 적이 없고 앞으로 농촌에서 살고자 하는 이 과정은 나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 머무는 동안 음식도 좋았고, 떠날 때는 수료증과 함께 왕복 차비도 넉넉히 주어서 고마웠다. 부족한 나에게 이런 좋은 경험을 하도록 해 주신 학교와 한미재단 그리고 우리나라 정부에 고마운 마음이다.  


KAF(한미재단, Korean-American Foundation) 설립 동기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2월 2일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는 3일간 한국 전선을 시찰한 뒤 미국 제8군 사령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을 계속해서 원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뒤 미국의 퇴역 장성과 뜻을 함께하는 유지들로 한국원조 민간단체를 조직하기로 하고, 그의 동생 밀톤 아이젠하워를 주축으로 해서 1953년 8월 미국의 법인단체로 AKF(한미재단)를 발족하여 1979년까지 약 26년간 한국의 4H를 지원했다. 1953년 8월 20일 한미재단은 한국에 사무소를 열고 영리, 종교를 초월한 순수 민간지원단체로서 전후 복구를 위해 여러 방면에서 활약했는데 농촌사회건설을 위한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농촌건설을 위한 장기적인 안목과 사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농촌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사업인 4-H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그 밖에도 고아원, 양로사업, 주택건설, 병원 의약품 공급, 장학금 지급, 해외 유학 안내 등 전란으로 파괴된 한국의 재건을 위해 지원했다. 1961년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경사지 6600㎡를 임대해 축산과 계단식 개간 및 단기 농촌훈련을 하다가 같은 해 11월부터 경기도 부천시 소사에 7만 1300㎡ 규모의 한미재단 훈련농장을 설치해 4-H 회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했다. 그리고 여자회원들에게는 식품관리, 재봉 등 생활개선, 등 교육을 했다. 한미재단 농장훈련은 1979년까지 3620명의 훈련생을 배출했다. 나는 이 훈련학교의 15기 수료생이다.

 

 

4H Club

"실천을 통하여 배운다"라는 취지로 20세기 초 미국의 농촌 젊은이들 사이에서 생겨나 1914년 관민의 단체로 태어났다. 4H Club은 청소년 단체로 10~21 세의 청소년들이 참여하며 약 80 개국에 퍼져 있다. 4H 클럽의 상징은 클로버 네 잎에 “H”자를 새긴 것이며, 색깔은 녹색과 흰색이다. 

[4 H] 의 뜻

Head(머리, 지(知 )-과학적인 머리(知育)

Heart(마음, 덕(德)-성실한 마음(德育)

Hand(손, 노(勞 )-일하는 손(枝育)

Health(건강, 체(體)-튼튼한 몸(體育)

 

 

◎ 4H Club의 맹세 

"나는 나의 클럽과 나의 공동체와 나의 나라를 위하여,

 나의 머리(Head)를 더 명철하게 생각하는 데,

 나의 가슴(Heart)을 더 위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데,

 나의 손(Hand)을 더 큰 봉사를 하는 데,

 나의 건강(Health)을 더 나은 삶을 위해 바치기로 맹세한다."

 

4H Club이 하는 활동은 50여 가지가 넘는다. 예를 들어 널리 행해지는 농촌활동 중에는 농작물 재배, 화원 가꾸기, 가축 키우기, 암퇘지와 새끼돼지의 구매, 사육, 관리, 젖소 키우기, 축사 짓기, 판매용 소(육우) 키우기, 트랙터와 다른 농기구의 가동, 유지, 보수 등, 농촌과 도시 젊은이들을 위해 개발된 전형적인 4H 클럽 활동에는 자동차 정비와 안전, 개 보호와 훈련, 전기, 전자 실습, 실내정원 가꾸기, 잔디 깎는 기계의 작동 및 안전교육 등이 있다. 가정경제에 관한 사업으로는 음식준비, 바느질, 세탁설비 마련과 같은 기초적인 활동이 있다. 미국의 주요 연중행사 가운데 하나로 미국 4H 클럽 대회가 있다.

 

◎ 한국 4H Club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부터 4H 클럽이 결성되었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1960년대 이후다. 특히 1960년의 4·19 혁명을 계기로 면면히 이어오던 대학생 중심의 농촌계몽 운동이 거의 모든 대학에 농촌 관계 대학생조직이 결성될 만큼 활기를 띠고 방학 때마다 많은 대학생이 농촌으로 향하게 되면서, 1930년대에 보였던 이상주의적 농촌 지역사회 계몽운동이 이 시기에 대학생 농촌운동으로 계승되었던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많은 농촌지도자가 이 4H Club 활동을 통해서 길러졌고, 1970년대 정부주도의 새마을운동의 주역을 담당한 농촌지도층은 대부분 4H 클럽 운동을 통해 길러진 사람들이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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