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시작
생명의 시작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내 나이 스물한 살에 깨닫게 되었다. 나의 삶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거듭남) 받은 날부터 새로 시작되었다.
목단강(牡丹江, Mǔ‧danjiāng)
내 삶이 시작하려던 그때 세상은 세계 제2차 대전의 마지막 소용돌이를 치고 있던 어지러울 때였다. 지구 저편에서는 나치 독일이 유럽 전역을 불태우고 있었고, 아시아에서는 살인마, 침략군국주의 왜군(일본)이 한국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에서 천인공노할 살인 만행을 저지르면서 그 마지막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내가 태어난 만주(滿洲)는 지 금의 중국 동북삼성으로 왜군의 무자비한 발굽에 짓밟히고 있었다. 정복에 미친 살인마 왜군의 무자비한 집단학살, 강간, 방화, 토벌 그리고 착취로 인하여 대륙이 깊이 신음하고 있을 때였다. 중국은 장개석이 영도하는 국민당과 모택동이 영도하는 공산당이 내전을 잠시 멈추고 국공(國公) 연합으로 침략자 왜군과 한창 싸우고 있을 때였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은 왜인의 압박을 벗어나려고 정든 땅, 고향산천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물설고 낯선 만주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 만주(滿洲(Mǎnzhōu) 영어:Manchuria)는 원래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말갈족⇒여진족)의 땅이다. 그리고 이 만주 땅은 세 개의 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 성으로 나누어졌다. 왜군이 만주지역을 총칼로 점령한 뒤 만주를 간도성(间岛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왜군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를 내세워 허수아비 만주국을 세웠다. 지금 나의 한국 호적에는‘만주국 간도성 연길현 연길 출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흑룡강성(黑龙江省, Hēilóngjiāng Shěng)을 북간도, 길림성(吉林省, Jílín Shěng)을 동간도, 요녕성(辽宁省, Liáoníng Shěng)을 서간도로 나누어 불렀다고 한다. ( 1932, 3.1-1945, 8.18). 지금 중국 사람들은 동북 삼성이라고 부르거나 그저 동북(東北) 지방이라 한다.
나는 살인마 왜군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던 1941년 2월 18일 중국 길림성 연길현 동물사 세린하(吉林省延吉县东佛寺細鱗河)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내가 한 살이 막 넘었을 때 우리 가족은 북쪽 흑룡강성 목단강으로 삶의 터를 옮기면서 나는 목단강 사람이 되었다. 그때 목단강은 흑룡강성의 중심지로 왜군의 관동군 병참기지 사령부가 있는 곳으로 비행장이 두 곳이나 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우리는 주로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목단강시 서 평안 가에 살면서 아버지는 치과 진료소를 열어서 우리는 잘 사는 편이었다. 전쟁 말기에 아버지는 목단강 건너편 해랑(海浪) 다리가 보이는 신룽전(兴隆镇) 중예허(中也下) 촌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시내를 오가며 살았다. 가까이에 비행장이 있었고, 저 앞에 보이는 산 위에는 왜군의 높은 감시탑이 있고 날마다 왜군의 펄럭이는 일장기와 나팔 소리를 들으면서 살았다. 조선 사람이 없는 그곳에서 나는 자연히 중국 아이들과 어울려 목단강에서 물장구치며, 타래붓꽃과 양귀비꽃이 만발하던 들을 달리던 모습들이 내 마음에 동심의 세계로 새겨지게 되었다.
어느 날 강 건너 시내에서 들려오는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에 형과 나는 목단강 기슭에 있는 방공호로 달려 내려갔다. 우리는 방공호 안에서 영화에서나 봄 직한 소련과 왜군의 날틀들이 하늘에서 싸우던 신기한 모습을 보던 목단강의 하늘, 연합국의 폭격에 이레나 불타던 왜군 군수품 창고들, 가깝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포 소리와 흉흉한 소식들로 모두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던 때였다. 내 나이 5살 반이 넘든 1945년 8월 15일 아시아에서는 침략자 왜국이 항복함으로 전쟁이 끝나자, 왜인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남겨진 왜인 가족, 특히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누구든지 먼저 데려가는 사람들이 임자였다. 시내 우리 뒷집에는 부유한 왜인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한참 동안 여자와 아이들의 비명이 들리더니, 사라진 그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내 일생 마음에 남아있다.
♣ 이로부터 44년 뒤 하나님은 나의 동심의 세계가 있는 목단강으로 다시 보내주셔서 18년 동안 선교사
해방된 목단강
※ 이 목단강 역 사진을 사이트에서 찾아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우리는 목단강 역 가까이에 살아서 형과 거의 매일 뛰어놀던 광장으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왜인의 지배력이 사라진 목단강은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 왜인들과 친일을 한 중국과 조선 사람들이 테러를 당하고 있던 살벌한 때였다. 장개석 정부는 치안 질서 유지를 위하여 왜놈의 개 노릇을 하든 친일파들을 그대로 세워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하니 그들의 악행으로 하늘을 찌르는 백성들의 원성은 자연히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 팔로군이 오기를 고대하게 되었다. 드디어 팔로군이 들어와서 친일 세력들을 완전히 처결하면서 목단강도 공산화되었다. 치안 질서가 안정되면서 공산당은 악질 친일파, 지주, 등 사상검열이 시작되었다. 이때 우리 아버지도 불려 가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아버지는 지주는 아니지만, 머슴을 두고 부렸다는 노동력 착취의 죄목이었다. 실제로는 품값(새경)을 주었음에도 그 당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갇혀 있는 동안 중국인과 조선족 아버지의 친구분들이 탄원서를 냈다. 조선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의 연명을 받은 탄원서의 내용은 치과 의술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준 좋은 사람이었고,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았다는 그런 내용이었다고 한다. 공산주의를 싫어하시는 아버지는 한 달여 만에 풀려나시자, 몇 날이 되지 않아서 목단강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시었다. 그때 우리 식구는 다섯 살이 위인 형과 나, 한국에서 다니러 오신 외할머니와 다섯 식구였다.
목단강에서 도문으로
아버지는 기차역에 가셔서 역원에게 돈을 주고 도문 가는 열차를 타도록 준비하였다. 나의 어렸을 때 기억은 갑자기 부모님이 가벼운 짐만 가지고 비가 오는 밤에 역마차를 타고 기차역에 가서 역원의 안내로 도문으로 가는 화물열차에 태워졌다. 화물칸에는 이미 많은 중국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룻밤 사이에 모든 살림을 놔둔 채 떠나 우리의 고국 조선을 마주 보고 있는 길림성 연변 도문에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우선 우리 가족이 머물 곳으로 왜인들이 운영하던 도문 고무에. 한겨울을 지나면서 여동생(김영희)이 태어나서 우리 식구는 여섯 명이 되었다. 나는 형과 거의 매일 두만강 둑(지금 도문 강변 공원) 나가서 놀았는데, 그때는 조선으로 건너가려는 수많은 조선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두만강을 건너다.
다음 해 5월이 되자 아버지는 강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가시려고 우리 모두를 강둑으로 데리고 나왔다. 두만강 물의 가장 낮은 곳으로 가서 아버지께서 먼저 할머니 어머니와 갓 태어난 여동생을 건너다 놓으시고 아버지는 형과 나를 차례로 목에 태워서 건넸다. 잠시 만에 우리는 정든 중국에서 낯선 조선 땅에 있게 되었다. 그때 두만강 조선 쪽 강변에는 깨끗한 돌들이 넓은 강변에 가득했었다. 이때는 중국 쪽 두만강에 팔로군 초소가 있어서 강을 건너가는 것을 막고는 있었지만, 아직 경계가 허술할 때여서 누구든지 기회를 타서 쉽게 건널 수 있었다. 돈을 받고 등에 업어서 건네다 주면서 돈벌이하는 사람들이 제법 재미를 보고 있었다. 우리 가족도 그때 아버지께서 단호하게 떠나도록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중국 조선족으로 남았을 것이다.
◆ 중국, 도문→두만강→조선, 남양→삼봉
고국인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우리 가족은 보따리 하나씩 챙겨 들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이제 여섯 살을 넘긴 내 등에도 조그마한 배낭이 지워졌다. 우리가 남양 시내에 들어가기 전에 조선 국경 경비대의 조사를 받았지만 귀국하는 동포인지라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 지금부터 우리 가족에게는 많은 어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에서 쓰던 돈은 완전히 종잇장이 되어 쓸모가 없게 되었다. 얼마간 가지고 있는 금은 폐물들을 팔아서 살아야 했다. 어렸을 때 나는 끝이 안 보이는 힘든 행군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핏덩이 동생을 안고 아버지는 연로한 외할머니를 때때로 부축하면서 고난의 행군은 계속되었다. 나이 어린 나를 돌보아줄 손길은 없었다. 그저 형이 나를 이끌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는 걷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걷고 걸어서 지금 삼봉이란 곳에 닿았다. 우리는 여기서 방을 정하여 머물면서 아버지는 매일 역에 나가셔서 남쪽 원산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는지를 알아보시고 계셨다. 철없는 형과 나는 날마다 삼봉의 이 거리 저 거리를 쏘다니며 소련군과 북한 군인들을 보곤 하였다. 남쪽으로 가려고 밀려오는 사람들로 이 작은 도시는 북적거리고 있었다. 마침 이때 북한에는 콜레라 전염병이 크게 돌아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진통제로 쓰던 생아편 주사를 만들어 식구들에게 예방 주사로 놓아주기도 하셨다.
삼봉에서 원산으로
이때 북한은 아직 모든 질서가 잡히지 않고 있었지만 이미 공민증이나 통행증이 만들어져 있어서 기차를 타려면 이러한 증명서들이 있어야만 했다. 중국에서 갓 나온 우리에게 그런 신분증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떠나가는 기차를 보면서도 우리는 탈 수가 없었다. 그러든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오셨다. 그날도 역에 나가셨다가 마침 고향이 같은 철도 안전원(경찰)을 만나게 되어 열차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열차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탔다. 태백산 험한 준령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굴을 지나면서 열차는 며칠을 달리고 달려서 드디어 원산으로 오게 되었다. 힘든 길이기는 해도 우리는 점점 남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기차역 광장에는 남으로 가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머물 곳이 없는 우리 같은 나그네들은 그냥 역 광장에서 며칠이고 지내면서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는 기차가 원하는 곳으로 매일 다니지도 않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표를 얻는 일도 쉽지 않아서 무작정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원산에서 양양으로
이렇게 살기를 한 보름 만에 아버지는 드디어 기차를 탈 기회를 얻었다. 며칠 뒤 이른 새벽 우리 가족은 역 한 모퉁이에서 역원의 안내로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기차에 우리를 태우고는 조용히 있으라는 부탁을 하고는 사라졌다. 마음 졸이며 얼마를 기다렸을까,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물밀 듯이 몰려오고 있었고 삽시간에 기차는 사람들로 꽉 차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동해안 철로는 원산에서 양양까지 놓여 있었다. 지난번 삼봉에서 원산까지 기차는 백두대간의 험산 준령을 타고 밤낮으로 계곡과 굴로 이어져 오느라 석탄 연기에 시달렸는데, 이번에는 탁 터진 바다를 바라보면서 여행을 하게 되어서 마음이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양양 역에 내린 우리 가족은 빨리 시내를 벗어나서 남쪽으로 가는 산속에 몸을 숨겼다. 여기서부터 38선 국경이 가까워져 오므로 조사와 경계가 심하여 낯에는 숨어 있다가 어두운 밤에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두움이 온 산천을 덮었을 때 우리는 바닷가 길로 나와서 남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얼마를 가다가 보니까 함께 남으로 내려가는 여러 가족을 만나게 되어 우리는 이제 한 무리가 되었다. 어른들은 의논하여 무리를 두 패로 나누었다. 먼저 어른들이 앞으로 나아가서 안전한 지를 알아보고 와서 가족들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가게 하고 있었다. 양양과 주문진 사이 국경선까지는 불과 20Km밖에 안 되지만 밤길을 가는 가족들에게는 멀고 먼 길이었다. 소가 매인 농가를 지나 바닷가 길에 나오자 바닷가에서는 소금을 굽는 장작불이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지만, 우리는 곧 다시 캄캄함에 묻혔다. 저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숨소리마저 죽여 가며 남으로 걷고 있는 어린 내 마음에는 무서움이 가득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중국에서 자유 대한으로 온 2,500리 길(1947)
38선을 넘어
새벽 미명에 우리 일행은 드디어 38선에 다 달았다. 우리 앞에 별빛을 담은 얕은 개울물이 소리 없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또 가까운 데서 파도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지금 38교 휴게소가 있는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 잔교천이었다. 저 건너가 자유 대한민국이다. 아버지들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돌아보신 뒤 노인들과 여성들과 아이들을 먼저 건네 놓고 아버지들이 건넜다. 천신만고 끝에 자유 대한민국 땅을 밟은 것이다. 이제 개울가 언덕에 모두 짐을 내려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른들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개울 건너 쪽을 향하여 험한 말씀들을 하시고 계셨다. 이제 고난의 행군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일행들은 자유롭고 가벼운 마음들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길에 나서서 주문진을 향하여 힘차게 걷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어두움이 깊은 새벽 미명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앞에 갑자기 밝은 손전등 불이 비취면서 서라는 큰 소리에 일행은 모두 긴장하여 멈추어 섰다. 가까이 다가온 분들은 한국 국경 수비대 군인들이었다. 군인들은 우리를 부대 임시 수용소로 데리고 가서 쉬게 하면서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었다. 월남 경위를 조사하고는 월남자라는 증명서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교통비를 주고는 부대 차로 우리를 주문진까지 태워다 주었다. 우리는 하룻밤을 함께한 월남 식구들과 헤어졌다. 우리는 어머니 고향이며 외가가 있는 연곡면 큰 외삼촌 집으로 갔다. 외할머니가 살아오시자 외가와 마을에서는 경사가 났다.
◆ 주문진에서 도계로
우리 가족이 외가에서 고난의 행군에 지친 피로를 달래고 있을 때, 형과 나는 외삼촌의 눈빛이 우리에 대해서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삼촌의 눈빛을 피해 다니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큰 외삼촌은 남로당 그 지역 간부로 사회주의 조국을 버리고 내려왔다고 아버지와 다투고 계셔서 서로가 감정이 안 좋아져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외가를 떠나서 우리 가족을 데리고 도계로 이사를 했다.
도계에서 우리는 탄광촌으로 들어가는 흥전리 다리 옆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 이곳은 석탄매장량이 많은 것을 일찍이 왜인들이 알고 탄광을 개발하여서 조선의 지하자원을 수탈하던 탄광 지대였다. 그때는 왜인들도 많이 살아서 흥전리 산 중턱 위에는 탄광 노동자들의 사택이 있었고 개울 건너 동리는 일본 직원들의 주택들이 있었다. 심지어 일본 아이들을 위한 교육시설도 잘 되어있었다. 깊은 산골 탄광에서 기차역까지 석탄을 운반하는 Cable Car가 하늘 높이 놓여 있었는데 처음 보는 나는 그때 너무 신기했었다. (지금도 여전히 Cable Car가 운영되고 있었다)
개기일식
우리가 흥전리에 살고 있을 때 개기일식이 일어나서 밝은 해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해는 점점 작아지면서 밝던 낮이 어두워지자 어렸을 때 놀란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일식을 불개가 해를 먹고 있다고 아이들끼리 이야기 했다. (11.1, 1948 지속 시간 1분 56초).
아홉 살이 되던 해 우리는 도계 시장으로 이사를 하였고 나는 도계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내가 처음 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만나는 아이들과 사귀며 공부를 하는데 아이들이 일본어를 많이 쓰고 있어서 중국에 살다가 온 나는 처음에 많이 당황한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지우개를 게스꼬무, 연필을 엔비스, 등 아이들이 쉽게 일본어 단어들을 쓰고 있었다.
6.25 사변
2학년 때 6.25 사변이 일어났다. 7월 어느 날 나는 동무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도계 기차역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궁금하여 가보니 이게 웬 말인가! 내가 북에서 그렇게 많이 보던 인민군 일개 분대 정도가 따발총을 매고 경계를 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둘러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내가 북한 군인들이라고 하자, 어른들이 어떻게 아느냐고 묻기도 했다. 북한 괴뢰들이 남침하여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 도계 초등학교는 인민학교가 되어서 매일 북한 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이때 배운 노래들 가운데 두 곡의 첫 절은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그것은 김일성 빨지 산 혁명가인데, 지금은 "김일성의 노래"라고 한다.” 장백두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그리고 북한 국가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 금이 자원도 가득한 산천 …”이다. 이 노래들은 48년 뒤 1998년 북한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 북한 사람들과 어울려 노래할 기회가 있어서 잘 써먹은 적이 있다. (북한 방문기 참고)
북한 인민군대가 머물렀던 몇 달 동안 아버지는 여러 번 안전부에 불려 가서 왜 남반부로 내려왔는지에 대해 여러 차례 조사를 받으면서 시달려만 했다. 형과 내가 학교에 가지 않자, 붉은 완장을 찬 애들이 형을 데리러 오기도 하였다. 몇 달 뒤 인민군대가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자 도계는 아무도 관리하는 세력이 없는 텅 빈 곳이 되었다. 반공청년 단체가 소극적으로 치안을 하고 있었고, 밤이면 인민군들이 산간의 집들을 다니며 남자들을 잡아간다는 괴소문이 돌면서 밤만 되면 남자 어른들은 숨느라 바빴다. 낯에 태극기를 흔들던 우리도 밤이 오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보내야만 했다. 어른들은 저 멀리 보이는 산속에 빨갱이들이 숨어 있다가 밤이면 시내에 내려온다고 생각하면서 두려움이 어두움과 함께 날마다 시내를 뒤덮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군이 50리밖에 지금 오고 있다는 소식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가장 안심하게 하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 국군이 오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국군이 오자 어른들과 아이들은 열광적으로 군인들을 환영하여 맞이하고 있었다. 다음 날 어른들은 부잣집의 머슴으로 있다가 인민군 앞잡이가 되어 부잣집의 주인행세를 하면서 악행을 일삼던 그 머슴을 시장 가운데서 사정없이 몰매를 맞고 있었다. 학교가 다시 시작되었는데, 음악선생이신 우리의 담임 선생님은 북괴의 부역자로 잡혀가셨다고 하여서 우리는 슬퍼했다.
우리가 살던 시장통에는 교회가 없고 멀리 있었다. 나는 교회에 가고 싶어서 도계 기차역을 건너 신리 쪽으로 가는 산 언덕에 석탄을 실어 나르는 철길을 따라 한참을 가면 일본인들만 살던 고급 주택 단지가 나오는데 그 산모퉁이에 감리교회가 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멀고 좀 으스스한 밤 길이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다녔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으로 북괴군이 38 이북으로 물러가고 사회가 안정되자, 우리 가족은 묵호(동해시)로 이사하여 살면서, 1.4 후퇴를 겪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묵호(동해시) 초등학교 17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때 부모님은 믿지 않으셨으나 나는 묵호 감리교회에 다니는 주일학교 학생이었다.
다시 찾아본 도계
2013년 어린 시절의 추억을 좇아 도계를 찾았다. 세월이 무상하리만큼 많이 변하였지만, 흥정리 다리 옆 그때 우리가 살던 그 집이 그대로 있어서 너무 반가웠다. 지금 사는 분과 옛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바늘 낚시로 피라미를 잡으면서 즐거워하던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양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수정 같은 개울물은 온통 검고 붉은 물로 더러워져 있어서 보기 흉했다. 봄이면 아름다운 진달래가 만발하던 꽃피는 산골이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케이블카도 여전히 정상적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던 곳은 도계 시장통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가 살던 그 집도 어렴풋이 짐작이 갈 뿐이었다.
억의 도계 역
도계 초등학교 2학년 때 6. 25가 일어났다. 도계역의 넓은 마당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지금 생각해도 도계역 건물과 철로들과 송수 탑과 기관차를 돌리는 곳 등 아직도 눈에 선하다. 추억의 도계역 건물은 사라지고 깔끔한 현대식 역 건물은 낯설었다. 도계역 옛 건물을 그리워 사이트에서 여러 번 찾다가 드디어 누군가가 올린 옛 역사 건물을 찾았으나,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반갑고 반가웠다.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