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동 교회 개척
1965년이 되면서 사후동 개간과 건축하는 일들이 어지간히 마무리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선 사후동 골짜기 개척을 하였다. 목장 식구들을 기본으로 하여 마을의 청년들과 모친들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사후동에서 복음이 북쪽으로는 동막, 남쪽으로는 새마을 방골에 이르렀는데, 그 이상은 아직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매카피 선교사는 복음 전파와 교회개척을 위한 특별한 계획이나 훈련된 일꾼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같이 개인적으로 복음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 소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후동 교회가 워낙 골짜기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먼 곳에서 깊은 골 안으로 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동막에서 그리고 방골에서 얼마가 나오게 되었고 나중에 먼 거리인 유평에서도 나오는 길이 열렸다. 사후동 골짜기에서 남쪽으로 나오면 새마을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에 자리를 잡았어도 복음 진보에 좀 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동천리
새마을 삼거리는 오산에서 남사면으로 가는 지방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교통중심지이다. 사후동 골안에서 새마을을 나오면 세상이 넓어짐을 느낀다. 왼쪽으로는 방골 유평, 외미로 가며 오른쪽으로는 오산으로 가게 된다. 길을 건너 남쪽으로 가면 진위면에 닿는다. 새마을에서 길을 건너 조금 가면 동천리 골짜기가 나온다. 골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히 살고 있는데, 그곳 산채를 둘러싸고 있는 솔밭은 왜가리의 일종인 백로(白鷺)들의 보금자리이다. 그 주위에도 솔밭 산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백로는 그 골 안에서만 살고 있다. 우리는 동천리 마을에서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려고 여러 번 전도하여 보았지만, 사후동 골짜기 막장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2년 전 내가 사후동에 오던 해에 이 동천리 처녀가 오산을 갔다가 들어오다가 바로 마을 넘어 지나지 고개 솔밭에서 강간을 당하고 살해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적막한 산골에서 남자나 여성이 밤에 움직이는 것은 두려운 일들이었다. 이 산골에서 어두운 밤에 공동묘지들을 지나 오산이나 쑥고개를 드나드는 사람은 사후동 우리들 뿐이었다.
그해 가을 추수가 끝난 늦가을에 우리는 동천리 앞 논에 천막을 치고 권신찬 형을 초청하여 아주 훌륭한 말씀으로 전도 집회를 했지만, 교회로 오거나 우리와 손이 닿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때 방골에서는 여러 자매가 나오고 있어서 주기적으로 전도와 심방을 하고 있었지만, 유평이란 마을이 방골 앞산 너머에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너무 멀어서 거기까지 전도할 생각을 못 하였다. 박상호형제가 그때 사후동을 찾아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유평교회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평 교회개척
우리가 유평 마을을 알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유평에서 불러내실 영혼들이 있었다. 놀라운 일은 유평교회의 개척은 우연히 사후동에서 시작되었다. 유평교회의 시작에는 한 형제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박상호 형제(수원 동수원교회)였다. 박상호 형제가 그 먼 길을 걸어서 사후동에 오려고 할 즈음에 사후동 교회에서는 몇 주 전부터 주일학교 교사 양성을 위하여 어린이 전도협회 강사를 모시고 5일 간 강습회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사의 사정으로 오지 못하게 되어서 예정된 날에 강습회를 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바로 그날에 한 청년이 왔다. 마침 내가 낯선 청년이 온 것을 알고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니, 그는 나에게 자기는 유평에서 왔는데 주일학교 교사 강습회를 한다고 들었는데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사정을 설명해 주고, 그를 데리고 내 방으로 와서 전도하였는데, 그는 그날 주님을 그의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 형제가 바로 유평교회 시작의 불씨가 되었다. 그리고 한 달 뒤쯤 누나를 데리고 왔는데 내가 그를 처음 볼 때 내 짝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뒤 박상호 형제 누나도 구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박상호 형제와 그 누나는 유평에 복음을 전하려고 복음 집회를 준비하고 우리를 청하였다. 유평동 동장으로 계시는 박 형제 부친의 허락으로 공회당에서 전도 집회를 하게 되었다. 이종섭 형제와 내가 첫날 집회를 위하여 갔다. 붓글씨로 전도 집회를 한다는 광고가 공회당 문에 붙어 있었다. 그때 유평에서는 먼 곳에 있는 전궁리 감리교회에 다니시는 몇 분들이 계셨다. 처음 얼마는 이종섭 형제와 또는 여럿이 함께 다니다가 점차 나 혼자 다니게 되었다. 날이 추워지자 집회는 주로 박형제 아버님이 쓰시는 사랑방에서 모이게 되었다. 박 형제의 어머니께서도 주님을 믿고 구원받으셨고, 먼 친척이며, 감리교 권찰로 계시던 모친과 아들인 조병현 형제가 주님을 영접함으로 서 조병현 형제는 유평의 든든한 일꾼이 되어갔다. 조 형제는 사후동 선교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유평모임을 인도하게 되었다.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유평은 15여 명의 식구로 발전함으로 예배당을 지을 계획을 하게 되었다.
유평교회의 숨은 손길들
유평교회의 시작과 발전괴정에서 물심양면으로 크게 헌신하신 분들이 계시는데 특히 박상호 형제의 부모님(박종우 , 소화자 )이 계신다. 그때 마을 촌장이시던 부친께서 공회당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고, 날씨가 추워지자 사랑방을 내주셔서 집회 장소로 쓰게 해 주셔서 집회가 계속되도록 도와주셨다. 그리고 유평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자 부친께서 당신의 땅을 내주셔서 유평교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여 주셨다. 우린 그때 얼마나 기뻤었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유평 교회가 박상호 형제 가정에서 시작된 지 이태 뒤인 1966년 6월 사후동선교부에서 흙벽돌 기계를 가져와서 시멘트를 섞은 흙벽돌을 만들어 예배당을 지었다. 이 교회당 터는 지금 유평 교회당이 새로 지어질 때 팔아서 기금의 밑거름이 되었다. 유평 예배당 터를 헌신해 주신 부친(박종우)께서 병석에 누우신 자리 옆 벽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써 놓으시고 천국으로 가셨다. 주 예수님이 그 마음에 계셨음을 보여주는 간증이었다.
조병현 형제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자, 사후동 선교 학교에서 훈련받던 선산 낙동강변 내고에서 온 서명수 형제가 사역하는 동안 외미에서 여러분들이 나오게 되었다. 몇 해가 지나서 서 형제는 외미 식구들을 데리고 외미로 개척을 나가자, 장로교 목사 출신인 이윤범 형제가 사역을 하다가 오산으로 떠나자, 사후동 선교 학교에서 훈련받던 진도에서 온 양진효 형제가 사역을 하였다.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유평 교회를 지켜내느라 모두 애들을 많이 썼다. 박상호 모친께서 일꾼들을 돌보시느라 숨은 봉사를 많이 하셨다. 지금 유평 교회가 있기까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고 헌신했던 손길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흥동 교회 (남사면 )
경북 선산 출신으로 사후동에 와서 훈련을 받던 배영호 형제가 신흥동 동장의 딸인 자매와 결혼을 하게 되어 그곳에서 전도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72년 처음 배 형제는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 것같이 했다. 아직 그곳에 안정된 식구들도 없는데 배 형제는 성급하게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였다. 마침 장인인 동장이 동리 길 어구에 예배당 터를 내주자 매카피를 졸라서 시멘트 부록으로 예배당을 지었다. 그러나 배 형제는 그곳에 살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선산 고향으로 떠나자, 1974년 김제현 형제 부부가 와서 잠시 사역을 하다가 떠나간 후에는 그곳은 창고가 되어 버렸다.
외미교회
1966년부터 사후동 선교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서명수 형제가 1968년에 유평교회의 사역자로 있었다. 그때 얼마의 식구들이 수세월, 월경, 외미 등지에서 유평으로 나오고 있었다. 외미 식구들이 늘어나자 외미로 자리를 옮겨서 외미 교회를 이루었다. 외미 모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서울에서 James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시던 Kirk 선교사(1969 Northern Ireland, Balfast)가 외미모임에 와서 함께 살면서 서형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면서 교회는 활력을 얻고 있었다. 목수였던 컥 선교사와 서형과 함께 외미에서 수년간 산 것은 아름다운 일이었다. 모임의 선교사라고 온 분 가운데 전도 설교를 하실 정도로 한국 말을 제일 잘하셨다. 그리고 현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산분은 매카피 선교사와 컼 선교사뿐이다. 컥 선교사는 예배당 지붕을 수리하다가 떨어져서 허리를 다쳐서 연세대학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 큰 몸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간 것 자체가 무리였다. 우리가 병문안을 갔는데 얼마나 평안한 모습으로 우리를 위로하던지 오히려 우리가 위로를 받았다. 이런 귀한 분이 한국에 더 오래 계시지 않고 건강 때문에 돌아간 것은 아쉽고 아쉬운 일이었다. 한국말을 잘하시는 그는 아침에 길에서 형제자매들을 만나면 성경을 읽으셨습니까? 하고 늘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남사 교회
선교부가 남사 고등공민학교를 정규 중학교로 발전시킴에 따라 학교 직원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남사 교회가 이루어졌다. 후에 부평에 있던 선한 사마리아 보육원이 남사면 방아리로 옮겨가면서 남사 교회는 더욱 활발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율북리 교회(수부) 1963년 4월
우리가 결혼하여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율북리로 가서 살게 되므로 복음은 사후동에서 평태군 청북면 율북리까지 서쪽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율북리 교회 개척 편)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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