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동 교회 시작 1965년 3월
겨우 내 공사하여 다음 해 2월에는 농장의 다른 건물들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우선 매카피 선교사의 흙벽돌 이 층 집이 다 지어졌다. 이층에는 반 구대와 넓은 응접실이 있고 아래층은 두 개의 방과 창고 그리고 부엌이 있었다. 부엌이 달린 방은 권사님과 미연이가 살면서, 직원들의 식당이기도 했다. 또 한방은 내 방은 창문 두 개가 있어서 앞쪽으로는 동막으로 가는 골짜기가 환히 내다보이는 위치가 좋은 곳이었다. 반년 정도 안정이 없이 지내다가 이제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니 안정을 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선교부 본부 건물 겸 매카피 선교사의 사택으로 한국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처음에도 사후동 개척교회로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이제 건축일도 어지간히 마무리되고 안정이 되자 새해부터 우리는 마을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선교사의 응접실에서 모이기 시작하므로 사후동 교회가 시작했다. 우선 믿는 직원들이 중심이 되어있어서 개척교회는 순조로웠다. 설교는 매카피 선교사, 김규환, 염일부, 전정표, 그리고 내가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내 일생에 처음 설교하던 그 밤에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내용의 책을 읽고 받은 바 은혜가 커서 그 내용에 근거해서 1시간 45분이나 설교를 하는데 중간에 두 번이나 매카피 선교사가 시간이 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때부터 나는 설교하는 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구원받는 영혼도 생기기 시작하여 내 영혼은 주님의 기쁨과 은혜로 넘치고 있었다.
사후동 농장 건물이 모두 지어지고 안정이 되면서, 우리는 서둘러 흙벽돌로 예배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마을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거들어 주어서 쉬이 지을 수가 있었다. 사후동 교회가 개척되면서 우리는 복음을 골짜기 밖으로 나가 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위쪽으로는 동막, 아래쪽으로는 새마을, 순지, 방골까지 전도하러 나아갔다. 동막과 방골에서 나오는 무리 가운데 구원받은 형제자매가 교회에 더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더욱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몇 년 뒤 동막에서 김종승형제가 구원을 받고 사후동 선교학교 출신인 권외순 자매와 결혼하여 뒷날 오산교회의 기둥이 되었다. 사후동 교회는 시작한 지 2년이 채 안되어 농촌 교회로서는 부흥되고 있었다. 교회가 활발해지면서 나는 전도 심방 그리고 집회 준비하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되었다.
사후동 교회가 아직 젊은이들로 주로 구성되면서 바깥 활동도 활발하게 시작하였다. 진달래가 피는 봄이 오자 나는 가까운 곳에 있는 장지리 저수지로 봄 소풍을 나가 들에서 예배를 드리며 형제자매의 사랑과 교제를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6년 7월에는 신갈 저수지로 나가 민박을 정하여 2박 3일의 수양회도 가졌다.
주일학교 강습회 1965. 3. 4
우리는 주일학교 선생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주일학교 강습회를 열었다. 강사로는 대구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최경희와 김춘강 자매들을 초청하였다. 뒷날 최경희 자매는 박태수 형제와 김춘강 자매는 이종섭 형제와 결혼하여 목회자로서 주님을 아름답게 섬겼다.
방골 자매들
방골 자매들은 나의 사후동 사역의 한 부분이었다. 방골은 사후동까지 한 3K로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낯에도 여성들이 혼자 걸어 다니기는 그리 편한 골짜기가 아닌 데 밤의 그 음침한 골짜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길이다. 그런데 이제 자매들의 뜨거운 믿음은 주일 저녁과 또 수요일 저녁 집회에 2~3자매들이 오면, 그 밤길에 그들을 보내기가 마음이 편치 않아서 형제들이 데려다 주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2년 전에 지나지 고갯길에서 동천리 처녀가 솔밭에서 강간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일도 있고 하여 자매들의 밤길은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범인은 2년 뒤에 잡힘) 그래서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새마을 큰길까지만 데려가 주기로 하였다. 자매들은 괜찮다고 하였지만, 우리가 편하지 않아서였다. 그러다가 점점 다 빠지고 내가 주로 맡게 되어서 좀 힘든 일이 되기도 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때때로 누군가 함께하여 주기도 하다가 대부분 혼자일 때가 많았는데 가는 동안은 서로 교제하면서 재미있지만 혼자 돌아오는 길은 피곤도 하고 그리 편한 길은 아니었다. 달이 없는 캄캄한 어떤 밤에는 소름 끼치는 일들도 있곤 하여서, 자매들을 데려다주는 일이 시험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 수요일에는 구본숙 자매가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자매들을 새마을 큰길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은 자매와 나 단둘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캄캄한 골짜기를 올라오다가 횃불을 들고 논을 따라 흐르는 개울에서 밤 고기를 잡는 동리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거기에 구 자매 오빠도 있었다. 서로 다 아는 사이인지라 고기를 좀 잡았느냐고 인사를 나누면서 우리는 지나쳤다. 다음 날 구 자매는 오빠에게 되게 시달린 모양이다. 그리고 교회를 나가지 못하였다. 몇 날이 못 되어서 이 작은 산골 마을에 구 자매와 내가 연애한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나는 구 자매 집에 가서 자매님이신 모친을 뵙고, 그 밤의 일들을 말씀드리고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말씀드렸더니, 모친은, 자기는 그날 딸이 함께 갔다가 오겠다고 하여서 허락한 일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위로하여 주셔서 고마웠다. 이런 헛소문들로 교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고 아들을 잘 설득하여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나오다가 마당에서 오빠를 만났다. 나와 동갑네긴 그에게 오해하지 말라고 하면서, 내가 만일 동생과 연애를 하게 되면 자네한테 먼저 의논하겠다고 하니 씩 웃는다. 저녁에 교회를 못 가게 하자 자매는 뒷담에 개구멍을 만들어 놓고 다니고 있었다.
그 해는 몹시 가문 해로서 이 산간은 비가 오지 않아 모를 심지 못하여 모두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만 쉬고 있었다. 우리 목장의 소와 양들도 방목이 힘들 때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비가 좀 내렸지만, 논에 물을 채우지는 못하고, 겨우 땅만 적시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더 늦기 전에 모를 심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우리 선교부에서도 몇몇 형제들이 모심기 자원봉사에 나가기로 하여서 나는 구 자매 집으로 갔다. 손으로 모를 심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여서 축축해진 논바닥을 호미로 파서 모를 오전 내내 쪼그리고 심었더니 허리가 끊어지는 듯하였다. 점심을 먹고 모두 잠시 누워서 쉬는데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아무도 없다. 얼른 일어나서 논에 올라가니 세 식구가 모를 심고 있었다. 모친이 나를 보고 안 해 본 일을 하느라 힘들 텐데 그만 쉬라고 하신다.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 식구들과 함께 해가 맞도록 심었다. 그 뒤 오빠가 마음이 풀려서 동생의 신앙생활을 간섭하지 않게 되어서 자유로워졌다. 이런 자매들 가운데 방골의 곽영미 자매는 지금도 외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어서 고마운 마음이다. 그리고 여러 해만에라도 자매를 주안에서 볼 수 있어서 반갑기가 그지없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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