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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선교부

사후동 생활

사후동의 삶 1963-1966

내 인생은 이제 사후동 산골에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산골에서 한 3년 동안 많은 경험을 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내 앞길의 청사진도 만들게 되었다. 1963~1964년 두 해 동안은 사후동 건설과 농장과 목장을 이루는 일로 내 삶의 모든 것을 바쳐 정신없이 살았다. 1965년 3월에야 매카피 선교사의 집 응접실에서 사후동 교회 개척의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산지에 포도, 복숭아, 사과나무를 심었고 개간지에는 사일리지(silage, 발효 사료) 용 옥수수와 오차드 글라스(Orchard grass)를 심고 채소밭도 만들어 먹거리를 심으면서 사후동은 일상적이 되어 가고 있었다. 두 마리 저지 젖소에서 나오는 우유로 치즈와 버터도 만들고 비트나 콩 종류 등의 농산물로 겨울 먹이 병 통조림(Canning)도 만들고, 자두로 잼도 만들면서 재밌는 농산물을 가공하는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다.

 

병 통조림(Canning)

지금은 통조림 병들이 많아 나와서, 이지 가지 다 담그지만,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던 시대였다. 한국은 저장 방법으로 소금에 절이는 방법을 썼지만, 서양에서는 옛날부터 농산물을 겨우내 두고 먹으려고 병 통조림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 나는 농업학교에서 농산물 가공을 조금 배워서 알고 있었는데, 매카피가 어느 날 미국에서 온 통조림 병을 가져와 통조림을 만들자고 하여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농산물을 익혀서 병에 담아 공기가 통하지 않는 뚜껑으로 닫고 100도가 넘는 물에 끓이면 살균이 되어서 일 년 내내 놔두어도 상하지 않는다.   

 

버터 치즈 만들기

서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염소와 양 그리고 젖소를 키우면서 버터와 치즈를 만들어 먹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전기가 없고 믹서(mixer)가 없던 그 시절에는 다 손으로 만들었다. 우유를 그릇에 담아 며칠 놔두면 하얀 기름이 뜬다. 이것이 치즈이다. 이것을 가두어내고 껄죽해진 우유를 병에 붓고 물을 부어 뚜껑을 닫아 두 손으로 힘껏 흔들어 주면 원심분리 현상으로 물과 버터가 나누어진다. 보자기에 부어서 꼭 짜주면 노란 버터가 남는다. 버터를 만든 물로 반죽하여 팬케이크를 만들면 맛이 좋다. 참고로 몽골 같이 양이나 소의 젖을 짜서 먹는 민족들은 큰 통에 붓고 막대기로 저어서 만들기도 한다. 

 

매카피 선교사와 3년 정도 살면서 사후동은 이제 일상적이 되면서 나에게 더는 발전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매카피 선교사가 만든 농장과 목장은 생산성을 가진 전문적인 농업도 축산업도 아니었고, 더욱이 한미재단같이 시범단지를 만들어 놓고 농촌 교육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매카피 개인의 노후를 즐기는 취미 생활에 불과하였다. 내가 그분의 이런 개인 취미 생활을 주님의 일이라고 보수 없이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 옳지 않았다. 월급을 받는 직장도 아니고 뭘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것도 없고 해서 떠나려고 하던 차에 대구에서 선교 단기 훈련 코스가 있다는 소식이 와서 가보기로 하였다.

 

대구 선교학교 1964. 1월

대구 수성구 삼덕동에서 미국 Dick York 선교사가 운영하는 선교훈련학교에서 단기 선교 훈련 코스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대구에 머무는 한 주일 동안 이전에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넘치는 영적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도착한 날부터 내 영혼은 성령의 감동으로 넘치고 있었다. 매일 오전 성경공부가 끝나면, 오후에는 노방전도를 나가고 있었는데 나는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다. 우리 반의 반장은 박태수 형제였는데, 그분은 이미 노방전도에는 숙달되어 있었다. 나는 노방전도에서 5분 간증을 하도록 하였다. 오전 성경공부를 마치고는 각반별로 훈련 차 노방전도 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삼덕동 시장에 가서 노방전도를 하였다. 박형제가 아코디언으로 인도하여 찬송을 한 장을 부른 다음에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큰 소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간증을 하였다. 이어서 박형제의 10분 정도의 설교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전도지를 전하면서 개인 전도를 하였다. 나는 그다음 날도 간증하였다. 그리고 대구 KBS한국방송 지하실에서 금요 저녁 전도 집회가 있던 날, 어두워진 거리에 나가 길가는 사람들을 청하여 집회 장소로 인도하는 일을 하였는데 보람이 있었다. 나는 여기에 남아서 그대로 훈련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다음 학생 모집에는 꼭 입학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사후동으로 돌아온 나는 전도에 더 열심을 내고 있었다.

 

대구 선교훈련학교에 가기를 무척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해 가을 대구에서 온 소식은 섭섭하게도 딕욕 선교사가 사정이 생겨서 학교를 더는 운영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한동안 몹시 마음이 허전하였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이것도 다 주님의 뜻이 있는 것이라 믿어, 주님께서 다른 길을 열어 주실 때까지 여기에서 주어진 일에 마음을 다하였다. 사후동을 중심으로 하는 동막 통골 멍게 새마을 순지 월경 방골 유평 등지로 걷고 걸으면서 방문전도 심방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 3년여 사후동에서 선교부와 교회 그리고 목장 생활을 통해 나의 세계관이 넓어지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 또 사도 바울의 모습을 닮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굳어지고 있었다. 또 여기에서 평생의 동역자인 아내를 만난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이었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신혼생활은 율북리(수부)에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시작하였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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