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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선교부

McCafee 선교사와 함께

McCafee 선교사와 함께 1963년 10월 17일(목)

매카피 선교사를 나에게 소개해 주신 분은 부평 강태훈 원장이시다. 매카피 선교사가 같이 일하자고 할 때 나는 좋은 직장이라도 얻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매카피 선교사가 개척하고 있는 사후동에서 함께 하려고 짐을 챙기면서 인천 부평교회에서 주님이 내게 주신 축복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곳에서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고 일 년 반 동안 너무 많은 축복과 변화를 통하여 내 인생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많은 것을 배우고 자라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예수 믿는 원장이 싫어서 떠나려고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을 받은 것이다. 인생의 문제로 갈등하든 내가 이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삶의 목표가 분명해졌고 사도 바울의 위대한 삶이 나의 삶이 되기를 바라는 내가 선교사와 만나 함께 일하게 되었으니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기뻤다. 인천에서 사후동으로 일하러 가는 천주교 청년을 데리고 오산으로 갔다. 오산에서 우촌리를 물어 그곳에서 치 고개라 부르는 산을 넘으니 동서남북으로 가로막힌 경기도 무주구천동에 온 것이다. 20여 초가집들이 골짜기들을 따라 늘어져 있었다. 몹시 가난한 골짜기였다. 매카피는 사후동 출신이며 서울 은행가에서 뼈가 굵은 구성회 씨의 땅 20만 평을 20년간 빌려서 개간하여 사용하다가 돌려주기로 계약을 하였다. 매카피와 양딸 미자, 그리고 가정부 김흥자 일행은 구본숙 집의 문간 방 한 칸에 지내고 있었고, 통역으로 일하는 김규환 형이 다른 곳에 방을 얻어 지내고 있었다. 도착 첫날 우리 두 사람은 매카피 선교사 방에서 인터뷰했다. 인천서 온 친구는 한 달에 700원씩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매카피 선교사는 내가 강태훈 원장에게서 듣기는 김 형제가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살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나도 한국 사람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러 왔으니까 우리 같이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일하도록 하자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나에게 월급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자원봉사자로서 일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나는 좋다고 하면서, 그러나 매주 헌금도 해야 하고 생활의 필요를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매주 100원씩을 주겠다고 하여서 좋다고 받아들였다. 주급이 100원씩이니 결국 한 달에 400원 받는 셈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 골짜기에서 흙과 더불어 자연 속에 사는 삶이 시작되었다.

 

사후동 개척 선교지

사후동(寺後洞)이란 뜻은 절 뒤 마을이란 뜻이다. 사후 동은 평택군(시) 진위면에 속하고 용인군(시) 남사면은 해가 뜨는 앞산을 경계하고 있으며 해가 넘어가는 쪽으로는 오산읍(시)이다. 북동에서 동남으로 길게 뻗어 흘러내려 가는 골짜기를 따라 논들과 초가집들이 점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동북 위쪽을 넘으면 동막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새마을에 이른다. 사후동에서 오산으로 가려고 치 고개를 넘으면 오산읍(시) 우촌리이다. 앞산과 뒷산이 가로 놓여 밖에 세상은 전혀 볼 수 없고 오로지 푸른 하늘만 보이는 무주구천동이다. 하나님은 이 골짜기를 통해서 한국 형제교회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려고 매카피 선교사를 이 산골로 보내셔서 준비하시고 계셨다. 지금은 하루하루 정착할 기본 시설을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동리 인부들이 흙벽돌을 만들었고 양과 소들을 키울 이 층 측사와 매카피 선교사가 살 이 층 집을 짓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나는 건축일을 돕는 일이 하루의 일과였다. 힘들고 피곤한 세월을 보내면서 수고에 대한 현실적인 아무 대가도 없었지만, 이 일이 바로 주님을 위한 봉사라는 생각으로 만족했다. 우리는 주일에 매카피 선교사님이 머무는 구본숙 자매 집 사랑방에서 우리끼리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뒤에 이 집 모친과 딸, 구본숙이 구원받은 사후동 교회의 첫 자매가 되었다.

 

무르익은 단풍의 끝자락인 늦가을에 접어들면서 동네 인부들을 데리고 시멘트와 진흙을 1:4 비율의 흜 벽돌 찍는 일들이 한 창이었다. 농한기에 할 일이 없는 산골 농민들에게는 수입을 얻는 좋은 기회였다. 이 일꾼들 가운데는 나중에 형제가 되는 박관영과 유천희가 있었다. 감리교 권찰인 유천희는 필요한 일꾼을 불러 모아 일을 함께하고 있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집 짓는 일을 마쳐야 해서 서둘렀다. 서울에서 신진 건설회사의 한 팀이 와서 사후동 건축을 도왔다.

 

쑥고개(송탄)에서 우리들의 주모가 될 감리교 권사 한 분이 오셔서 밥을 해 주기 시작했다. 고향이 충청도이신 권사님은 음식도 잘하시고 부드럽고 자상한 어머니 같았다. 얼마 뒤에 권사님이 쑥고개에 사는 큰딸에게 맡겨 놓았던 막내 고등학생 딸을 데리고 와서 함께 살게 되었다. 오산 고등학교에 다니며 이름은 미연인데 우리를 오빠라 부르면서 한솥밥을 먹는 한 가족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미연이는 학교 갈 때나 올 때나 인사하는 법을 모르고 있었다. 좀 제멋대로 자란 아이 같았다. 내가 매일 아침만 되면 지키고 있다가, 학교에 그냥 가려고 하면 귀찮으리만큼 그에게 엄마에게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하도록 한 달이나 성가시게 해서 드디어 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다음부터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잘하는 미연이가 되어서 더 귀여웠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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