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선교부 회장 : Wilbur T. McAfee & Helena 선교사
한국기독교선교부란 이름은 매카피 선교사가 오산 기독교병원을 설립하면서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매카피 선교사는 자신의 인생 후반부를 한국 선교에 이바지하려고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사후동 산골에 정착한다. 매카피 선교사가 무주구천동 같은 사후동에 정착하므로 그 골짜기는 마치 한국 형제교회의 요람지 같이 알려지게 되었다. 매카피 선교사를 중심으로 하는 사후동 골짜기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신 일들은 한국 형제교회의 한 역사가 되었다. 한 20년 사후동 골짜기에 서려 있는 이야기들을 해묵은 나의 일기장에서 옮겨본다.
지역 사회발전에 이바지한 공헌으로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수여받은 국민훈장 동백장
매카피 선교사는 1917년 9월 15일 미국 Kansas 주 Garnett에서 태어났다. 그분의 아버지는 미국 형제교회에서 성경을 잘 가리키시는 교사의 은사를 가지신 분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자라면서 안 믿는 청년이 되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에는 미식축구 (Foot Ball) 선수로 이름을 날리다가, 뒤에 Foot ball 감독도 하였다. 20세가 되던 1937년에 Dorothy 자매와 결혼하여 외동딸 Linda를 얻었다. 그분은 미국의 10개 주와 캐나다의 두 개의 주 그리고 한국, 세 나라에서 사신 것으로 보아 그의 인생도 나그네의 피곤한 삶을 사신 것 같다. 한때는 Resort 사업과 농장 사업 그리고 건축사업도 성공적으로 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 37세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내가 오래전 들은 기억으로는 그분의 나이 37세에 여행을 하다가 어느 모텔에서 기드온 성경을 보다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그분은 주님을 섬기는 길로 나아가 보육원 어린이(children's home) 사역과 원주민 사역 등을 하다가 한국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는다. Colorado Spring모임의 천거를 받은 매카피와 가족은 한국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미국을 떠나 배를 타고 1962년 5월 23일 부산항에 내렸다. 처음 이분이 한국에 온 목적은 미국 교회에서 투자하여 짓고 있는 거창 고등학교 건축 공사를 감독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 그 당시 전영찬 교장은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모임계통과 여러 곳으로부터 후원을 받아서 한국에 돌아와 그의 고향 거창에서 교육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학교를 짓는 동안 그는 거창 산골에 조그마한 목장을 이루며 장팔리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부인 Dorothy 자매는 낯설고 물선 경상도 산골의 고요한 농촌에서 변화 없는 일상생활에 대한 무료감은 그녀를 우울증에 시달리게 했다. 그래서 원래 그의 직업을 따라서 대구 공군 사령관 비서로 대구 영내에서 생활하면서 매카피와는 떨어져 살게 된다. 매카피가 선교지를 사후동으로 옮겨오면서 부인도 가까운 송탄 미 공군 사령관 비서로 옮겨와서 일하게 되었다. 가끔 매카피는 부인이 근무하는 송탄 비행장을 찾았고, 부인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주말에 사후동을 찾곤 하였다. 그 뒤 부인은 유방암으로 미국에서 주님의 나라로 가셨다. 어느 한해 매카피 선교사는 안식년으로 미국에 가셨다가 캐나다를 방문하는 동안 메노나이트 형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독신인 간호사, Helena 자매님과 결혼하여 돌아오셨다. 자매님은 간호사로서 우리가 운영하는 요양원이나, 무의촌 진료 등에 꼭 필요한 분이었다. Helena자매님은 의료선교사로서 한국 사람들과 가까이 살면서 선교사다운 삶을 사셨다.
한국 기독교 선교회 (Korea Christian Mission In Land)
매카피 선교사는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부를 세우게 되리라는 것은 본인 자신도 미쳐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사전에 구체적인 준비도 없이 오산 기독교병원을 설립하여 시작부터 시행착오를 겪었다. 우선 미국에서 들여오는 모든 물자에 대해서 세금을 너무 많이 요구해서 찾을 수가 없었다. 매카피의 사정을 안 세관에서 면세를 받기 위해서는 보건사회부에 비영리 단체등록을 하면 된다고 조언하여 주어서 본의 아니게 한국 기독교 선교부라는 이름으로 보건사회부에 등록하게 되었다. 그 뒤로 모든 물자는 면세가 되어서 편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교부를 만들어 세상 정부에 등록했다고 비판하는 소리가 서울 쪽에서 들리기도 했다. 뒷날 이 선교부 이름은 법적 배경이 없는 한국 형제교회에게는 든든한 언덕이 된다.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일본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해외 나들이가 시작되었다. 여권을 내는 과정에서 형제들이 정부에 등록된 종교단체의 성직자가 아니어서 여권 내기가 몹시 어려웠던 그때 선교부 직원의 이름으로 견학이니, 연수니,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외 나들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보건사회부 한국 기독교 선교부 등록증
또 국내에서 사역은 하고 있으나 법적으로 아무 신분 보장을 받을 수 없었던 어떤 형제에게는 선교부의 이름은 든든한 산성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예를 들면, 원주 출신이며 대구에서 사역한 김영철 형제는 시후동 선교학교에서 훈련을 받다가 군에 갔다. 우리가 만들어준 선교학교 졸업증명서로 그는 군종 하사로 군 교회 일을 하다가 제대하였다. 또 나 같은 경우는, 우리 부모님이 운천에 살고 계셨는데 가끔 집엘 가려면 군 검문소를 두 곳이나 지나야 하는데 주민등록증만이 아니고 직업을 물을 때 어물어물하면 내리게 하는데, 선교부 직원 신분증이 한몫하곤 했었다. 한국 기독교 선교회의 Heading이 있는 편지지에 매카피 사인과 선교회 공인된 도장이 찍힌 추천서 등은 법적 효력이 있었다. 나는 여러 번 이 혜택을 받아 본 적이 있다. [한국기독교선교부]가 보건사회부에 등록하자 세상 정부에 등록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뒷날 당신이 필요할 때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모두 선교부 도장을 찍어달라고 오기가 바빴으니 웃기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몇몇 선교사도 기독교 선교부 이름으로 체류 허가에 도움을 받고 있었다.
매카피 선교사의 한국 선교 관
사후동에 정착하는 매카피 선교사는 산지를 개간하여 농장과 목장을 하면서 선교하려는 계획을 하였다. 그분은 먼저 자기 삶의 터전이 될 농장과 목장을 일구는 데 주력했다. 내가 이해하는 그분은 한국 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기념비적인 무엇을 남기려는 역사적인 사명감을 가지신 분은 아니었다. 그분이 사후동에 정착하는 동기나 삶의 내용을 보면 짐작하게 된다. 그분이 20년간 사용하도록 계약한 땅은 이곳 사후동 출신이며 서울 은행가에서 활동하는 구성회씨의 산이다. 이 땅을 마음대로 쓰다가 20년 뒤에는 그대로 돌려주기로 계약하였다. 50대 가까운 그분이 20년 뒤면 70대에 이르면 그분의 인생도 살 만큼 산 것이 되고 땅도 쓸데로 써먹었고 시멘트와 진흙 벽돌로 된 건물들도 그 연한을 다하게 되는 데, 그래서 그분의 한국사역은 20년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미국과 캐나다의 성도들의 귀한 선교 헌금을 쏟아부어 개간하고 꾸미고 있는 농장과 목장은 선교를 위한 특별한 목적은 없고 그저 그분 자신의 취미 생활을 즐기는 전원에 불과했다.
그분은 목가(牧歌)적이고 단순한 삶을 사는 분이었다. 도심보다는 산골 가난한 농촌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더 낭만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분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만 주로 상대하면서 그런 환경 가운데 살아서인지는 몰라도 가난하고 초라한 한국 사람들의 모습, 그것이 바로 그분의 한국관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골에 산다는 자체는 좋았지만, 시골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는 못하고 주민들과는 거리를 두고 사셨던 것은 아쉬운 일이다. 외국 선교사들이 문화시설이 갖추어진 도시 생활을 선호하는 데 비해 산간 농촌에서 수수하게 사는 그의 모습은 미국, 캐나다 성도들에게 호감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매카피 선교사가 한국 선교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었고, 미국의 CMML과 캐나다 MSC를 통해 헌금이 집중적으로 오고 있어서 서울에 사는 선교사들의 시기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 CMML-Christian Mission in Many Lands, 미국 형제교회 선교 지원단체
MSC-Missionary Service Committee Canada, 캐나다 형제교회 선교 지원단체
선교사역
매카피 선교사는 한국 형제교회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분의 은사는 복음 설교자이지만 언어장벽으로 자신의 뜻을 널리 펴보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었다. 선교의 기본인 Cultural Mandate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으로 매카피와 제임스 선교사는 자신의 뜻을 효과적으로 펴 보지 못한 분들이다. 일 세대 선교사였던 두 분은 한국에서 20여 년 한국 음식과 물을 마시며 살았으면서도 기본적인 대화도 제대로 못 하는 그분들의 수준은 타 문화권의 선교사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다. 경쟁적으로 우리 언어를 배우고 문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타 교파 선교사들을 보면 머리가 숙어질 만큼 존경스럽다.
▶Cultural Mandate은 선교 용어로, 타 문화권을 복음화하라는 주님의 명령이다.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타문화권의 언어와 문화를 수용하므로 그들의 말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관계를 말한다.
그분은 사업가적인 기질이 강한 분으로 깊이 기도하는 경건하고 조용한 분은 아니었다. 그분은 키가 크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는 그의 첫인상이 좀 날카롭게 보였다. 가끔 그의 좀 거친 성격은 공사판 감독을 연상케 하여 그분의 경건한 모습을 흐리게 하는 한점 먹구름이었다. 또 어떤 일을 잘 못 하여 꾸중할 때, 그는 Korean, 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American(미국 사람)은, 하면서 모멸감을 느끼리만치 한국들에게 내뱉는 말들은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아 오르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 선교사로서 본국 자기 교회에서 하던 대로만 선교 현지 사람들을 대했어도 무리가 없을 텐데, 그는 본국 교회에서도 안 하던 말과 행동을 선교지에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분의 강한 기질에서 풍겨 나오는 미국 우월주의(Americanism)적인 말들과 행동들은 영적 어른으로 받들기가 어려웠다.
그럴지라도,
매카피 선교사란 존재가 사후동에 계셨기에 그 주위에 여러 교회 개척과 지역 사회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직접 참여하여 개척한 교회는 사후동, 유평, 율북리(수부)이며, 외미 교회는 서명수 형제가 유평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외미 식구들을 데리고 나가서 개척했고, 형제들이 공동으로 개척한 교회는 남사. 오산 교회이다.
◈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정부는 매카피 회장이 지역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하여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하였다. 세상 정부도 공로를 인정하여 훈장을 주는 데, 주님은 매카피 선교사에게 어떤 훈장을 주실 것인지 궁금하다. 만일 매카피 선교사가 농장과 목장을 운영하는데 들어가는 예산으로 학교를 세우고 영적 일꾼을 키웠더라면, 복음이 더 넓게 퍼져나갔을 것이며, 주님께서 더 큰 상을 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푸념을 해 본다.
매카피 선교사의 위기
한국모임이 사후동을 중심으로 상당한 발전을 하고 있을 무렵 사단은 매키피 선교사를 흔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매카피 선교사에게서 불거진 스캔들(Scandal) 문제는 매카피를 시기하는 미국 선교사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빌미를 주었다. 그들은 매카피 선교사를 미국과 캐나다 교회에 고발하고 탄핵하는 일로 그는 몹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훼어리스 선교사가 전 미국과 캐나다 교회에 매카피를 탄핵하는 일의 주동자였다. 결국 매카피 선교사는 본국 교회의 부름을 받고 돌아가서는 다시 선교사로서는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선교부 사업체의 처리
오산 기독교병원과 남사중학교는 매카피 선교사에게 아무 일이 없을 때 다른 사업가에게 넘겨졌다. 남사중학교를 사업가에게 넘기면서 선교비 명목으로 700만 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가운데 동래교회 100만 원 그리고 강릉교회에 100만 원을 보내주어서 강릉교회의 전세문제가 해결되면서 교회가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때 형제교회에는 이런 사업체를 맡아 운영할만한 재력과 역량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없었다. 또한, 캐나다와 미국 성도들이 보내 준 헌금으로 세워진 사후동 수양관 정도는 한국 교회에 남겨 놓았더라면 그의 수고와 이름이 한국 형제교회와 함께 아름답게 남아 있었을 텐데, 교통도 불편한 산골 막장에 있는 수양관, 토지와 볼품없는 시멘트 건물들이 돈이 얼마나 된다고 그걸 한국 교회에 남겨 놓지 않고 거두어 가므로 매카피의 흔적도 함께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은 아쉽고 서운한 일이다. 아름다운 사연들과 기억들로 가득 찬 사후동 역사가 이렇게 허전하게 막을 내리면서 한국 형제 교회 역사의 한 장도 얼룩지게 되어 씁쓸한 여운이 남는다. 다른 기독교 단체들은 그들이 하던 모든 사업과 기관들을 현지 한국 사람들의 복지를 위하여 남겨두고 가는 것을 보면 참 훌륭하다는 존경심을 가진다. 그것뿐인가, 심지어 목숨까지 내어놓고 살다 간 귀한 선교사들의 위대함은 어떠한가!
노년의 매카피 선교사 부부를 찾아서... 2006. 10
중국에서 잠시 Canada로 돌아와 있는 동안 우리는 매카피 선교사가 살아계실 때 한번 찾아뵙고 싶었다. 나와 아내는 노년을 보내고 계시는 퇴역 장군 매카피 선교사를 만나 뵈러 앨버타주 Morden으로 갔다. 공항에는 부인되는 Hellena 자매님과 손녀(미첼 딸) Rwanda가 갓난아기를 데리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두 시간여 달려 Morden에 도착하여 집에 들어가니 매카피 선교사가 반가이 맞이하여 주셨다. 얼마 만인가! 거의 16년 정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한국에서 그런 일로 돌아온 그분들은 미국과 캐나다에서의 여정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주님을 섬기는 여러 가지 일을 하시다가 자매님의 고향인 캐나다 Morden에서 노후를 보내고 계셨다. 그동안 여러 번의 수술로 이제는 보조 기구(walker)가 있어야 걸음을 걸을 수가 있었다. 백발의 노장은 유머가 풍부하고 재미있는 할아버지로 변하여 있었다. 사후동에 계실 때 이 모습의 절반이라도 보여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스치고 지났다. 매카피 선교사의 흔들의자는 참새들이 많이 날아와 앉는 앞들 창가에 있었다. 거기에는 참새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이 있었다. 하루 낯에 참새들이 많이 날아와서 준 먹이들을 쪼아 먹고 있는데, 나에게 참새들을 가리키면서 이것과 저것이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참새에 관한 연구가 깊은 것 같았다.
지난날 사후동 일들이 생각이 나셨는지, 나에게 나하고 있을 때 몇 번이나 떠나려고 했느냐고 물으셔서, 두 번이나 떠나려고 했다고 했다. 그저 그렇게만 묻고 사후동 이야기는 더 하시지 않아서, 나도 혹 좋지 않은 기억이라도 건드릴까 봐서 사후동 이야기는 더 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중국 선교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급자족하는 농장과 농산 물 사진들을 보여 드렸더니, 너도 나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구나 하면서 좋아했다. 2박 3일 머무는 동안 하루는 진공청소기로 전 집안을 청소해 드렸다. 하루 오후에 날씨가 아주 좋은 날, 뒷마당으로 나오신 매카피 선교사는 토마토를 가리키면서 왜 붉게 익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분들은 심어만 놓고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채, 거름만 많이 주어서 잡초같이 우거져 있어서 토마토가 익지 않고 있었다. 눈이 곧 내리게 생긴 그 철에 붉은 토마토 따먹기는 틀린 것 같았다. 토마토 가지치기하는 법을 그림을 그리면서 가르쳐 드렸다. 앞뒤 마당에 심어진 큰 사과나무에는 많은 사과가 달려 있었다. 사과는 우리 중국 목단강 양로원 사과같이 크지는 않으나 맛은 좋았다. 이 도시가 발전하면서 가로수로 이 사과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결과 이 마을은 사과로 만드는 식품이 발달하였지만, 너무 많아서 길거리에 막 떨어져서 공해가 되고 있다고 한다. 나를 창고로 데리고 가더니 책과 연장들을 보여 주면서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은 다 가져가라고 하신다, 나는 책 몇 권만 집었다. 떠나기 전날 우리는 불고기 파티를 열어서 대접해 드리기로 하였다.
불고기 파티
Hellen 자매님과 마트에 가서 저녁에 불고기 파티를 할 장을 보았다. 저녁 식탁에는 매카피의 손녀딸 부부의 식구 6명과 평택에서 수고하는 John 형제의 어머니도 청하여 함께 즐거운 식사를 나누며 교제했다. 우리로서는 이분들과 이 땅에서는 마지막 나누는 만찬이라고 믿어져 시간 가는 것이 몹시 아쉽기만 했다. 나는 그곳에서 Greyhound Bus로 비행장으로 올 생각이었는데, Hellen 자매님 남동생이 내일 올라가는 길에 태워다 준다고 하여서 고마웠다. 날이 밝자 우리는 이 땅에서 다시 보지 못하면 하늘나라에서 보자고 힘 있는 악수와 포옹을 하면서 헤어져야만 했다. Hellen 자매님은 우리와 함께 동생 차로 비행장까지 오셔서 전송하여 주셨다.
퇴역 장군 매카피 선교사는 주님의 나라로 가시다
그로부터 삼 년 뒤 유머가 넘치고 자상한 할아버지, 매카피 선교사, 퇴역 장군은 91년 3개월 21일을 이 땅에서 사시고 2009년 1월 10일 오전 5시 사랑하는 부인 Hellen 자매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부인 Dorothy가 기다리고 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매카피 선교사는 전처와 사별한 뒤 간호사인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여 선교사다운 커플로 32년 동안 함께 주님을 섬기면서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다 가신 처복이 많은 분이셨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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