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tenberg(비텐베르크) 7. 20, 1992
오늘은 유럽에서 암흑시대를 이끌면서 가장 참혹했던 역사를 만들어 낸 암흑시대의 주역 로마 천주교에 항거하여 일으킨 개혁의 현장인 Wittenberg으로 가는 날이다. 독일을 여러 번 방문하였지만, 이제 떠나면 다시 독일을 방문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어서 Martin Luther가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킨 현장을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간호사 강 자매가 나의 뜻을 알고 자기네 가정과 함께 가자고 알려왔다. 아침에 강자매 가정이 왔다. 남편은 호리호리한 키에 날렵하게 생긴 독일 청년으로 직업이 자매와 같은 간호사였다. 두 초등학생 아들들도 귀엽게 생겼다. 그리고 한국서 방문한 두 자매도 데리고 와서 오늘 우리 일행은 모두 8명이나 되었다. 만남의 기쁨을 나누면서 즐거운 여행을 떠났다. 베를린에서 비텐베르크까지는 110Km 정도의 거리이다.
해바라기 밭
어느 한 지역을 지나는 데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황금 들판이 펼쳐진다. 해바라기 들녘이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이 놀라운 황금 들판에 들어가서 역사적인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신기한 것은 해바라기 씨앗이 뿌려질 때 방향이 없이 마구 부려졌을 텐데 싹이나 자라면서 하나같이 해가 뜨는 방향으로 꽃이 피어 해님을 반기고 있으니 자연의 신비가 놀라울 뿐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우리는 비텐베르크 시내에 들어왔다.
† Wittenberg
비텐베르크는 루터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독일 동부 작센안할트 주에 있는 도시로, 이곳에서 로마 가톨릭의 사제요 이곳 대학의 교수인 마르틴 루터가 폭력과 살인 마적인 가톨릭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는 영혼들을 해방하고자 일어난 기독교 혁명의 성지이다. 지금은 이 조그마한 마을이 온 세계에서 많은 기독교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기독교 성지가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1511년 이곳에 부임한 이후 1546년 하늘나라 갈 때까지 이 도시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 Martin Luther (1483~1546)
바벨론 종교의 탈을 쓴 혼합종교 로마 가톨릭의 만행으로부터 기독교의 믿음과 자유를 얻으려고 투쟁한 기독교 개혁의 선구자, Martin Luther는 1483년 독일 작센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그는 1507년 독일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사제가 됐다. 그리고 34살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학 교수가 되어 이곳에 부임하였다. 그리고 10개의 기도원을 관리하는 자리에 있었다. 이때 유럽에서 종교 암흑시대의 주역은 로마 가톨릭이었다. 로마 가톨릭은 정치권력을 장악한 뒤에 정치와 종교의 칼을 휘두르면서 유럽을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하면서 축배의 잔을 마시며 기뻐한 악의 집단이었다. (피 흘린 발자취 The trail of Blood, J. M. Carol). 루터에 앞서 이 악의 가톨릭과 맞서 싸워 온 영국의 Wycliffe와 체코의 John Huss 등의 순교자들은 종교개혁의 떠오르는 새벽 별들이었다.
종교 암흑시대가 깊어가던 그때 갈등하고 고뇌하는 한 영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그는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느냐? 하는 성경의 근본적인 문제에 답을 얻지 못하여 애태우며 갈등하는 가운데 어느 날 바티칸에 갔다가 마음의 죄를 씻을 양으로 스칼라 생타 (Scala Sancta), 거룩한 계단의 28개의 대리석 계단을 무르팍으로 기어오르다가 갑자기 그의 마음에 떠오르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으로 벌떡 일어났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으로 그의 영혼이 깨우침을 받았다. 성령이 그의 마음에 빛을 주시자 그가 갈등하던 "칭의(称义)"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에는 죄인이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없다고 깨달았다. 가톨릭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진리를 떠나서 죄인이 구원받아 천국으로 가는 길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아무도 갈 수 없게 해 놓았다. 천주교의 구원론은 이원론으로 수식으로 표현하면 믿고+ 행함=구원을 이다. 천주교의 구원론은 설명하기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쉽게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죄는 용서되었지만, 그 지은 죄에 대한 흔적을 지워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 흔적을 지운다는 것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죄의 흔적을 '잠 벌'이라고 하고 그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내서 없애는 것을 '보속'이라 한다. 땅에서 다 갚지 못하면 연옥에 가서 불의 연단(정화)을 받으면서 죄 값을 다 갚아야 어느 날 천국으로 건너간다고 하는데 그 기한은 아무 보장도 없다. 그러나 땅에서 가족이나 친구가 나 대신 보속(공양)을 해주면 그 시간이 단축된다고 한다.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여러 가지 종교 행위가 따르는데, 바로 가톨릭이 만든 사이비 교리로 믿는 자들을 가볍게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여 살아서도 죽어서도 가톨릭이란 종교에 얽매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멍에를 가볍게 해 주시려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었다고"라고 쉽고도 간단하게 약속해 주셨다 (요한복음 3:16).
‡ 95개 조 반박문을 내 건 연유
95개 조 반박문을 내 건 연유에는 면죄부 판매에 그 동기가 있다. 면죄부 판매는 가톨릭이 저지른 희대의 사기극이었다. 원래 면죄(벌) 부는 간단하게 죄를 용서받았다는 보증서 같은 것으로 만들어지다가 상업적으로 발전하여 베드로 성단 건축 자금 마련을 위한 마케팅 기획상품이 되면서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재물 축적과 착취의 수단이 되었다. 이 면죄부 판매가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Blog. 혼합종교 로마 가톨릭)
‡ 루터의 분노
면죄부 판매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과 원성을 가져왔으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테첼이 이끄는 면죄부 판매팀이 작센주에 이르러 루터가 있는 비텐베르크에서 판매 시장을 열려고 했는데, 작센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허락하지 않아서 못하고 1517년 봄 비텐베르크 옆 동네 위터보크에서 면죄부 시장을 열어서 테첼이 대중들에게, '여러분의 동전이 돈통에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온갖 감언이설로 면죄부의 효력을 과대 선전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루터가 받은 충격은, 자신이 목회하던 Stadtkirche 성당 사람들이 면죄부 집회에 참여하고 면죄부를 산 뒤에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것에 크게 분노하였다. 루터는 근처 교구인 브란덴부르크 주교 제롬,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면죄부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판매를 중지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는데, 오히려 그들은 루터를 무시하고 공개적으로 비웃었다.
‡ 95개 조의 반박문
루터는 이제 막 가고 있는 로마 가톨릭의 타락상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수장, 교종에게 도전하는 95개 조로 된 질의서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앞문에 내 걸면서 공개토론을 요구했다. 이때로부터 루터도 미쳐 기대하지 않았던 걷잡을 수 없는 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루터의 이런 도전에 화가 난 테첼은 루터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프랑크푸르트 대학 신학 교수들에게 부탁하여 루터를 이단으로 고발하는 고발장을 써서 로마 교종에게 고소하였다. 이에 레오 10세는 루터를 파문하고 보름스 국회로 소환한다. 사실 "95개 조항"은 당시 로마 가톨릭교의 기초를 뒤흔드는 일이었고, 이날은 교회사에 있어서 종교개혁이라는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아마 루터 자신도 이 일로 역사의 대변혁의 주역이 되리라고는 미쳐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를 받으면 교종의 권위에 도전하여 승리함으로 써 독일은 교황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아울러 유럽은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95개 조 반박문 요약
1-4조 속죄에 대한 규정
5-7조 교종의 사면권의 한계
8-29조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한 구원 문제
30-40조 면죄와 참회 그리고 사죄 문제
41-52조 면죄부의 구입과 면죄 시행의 남용
53-80조 면죄부 판매 설교의 문제 지적
81-91조 면죄부 남용과 시행에 대한 공박
92-95조 십자가 신학에 입각한 그리스도교인의 진정한 생활
‡ 면죄부의 비판
1516년부터 면죄부(대사)에 대한 루터의 비판은 사제, 수도자, 신학 교수들로부터 상당한 호응과 지지를 받고 있었다. 루터 이전부터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어 왔다. 콘스탄츠 공의회((Konstazer,1414~1418)에서도 현금형 사면의 부당성에 대한 논쟁은 있었지만, 해결점을 찾지는 못했다. 또 츠빙글리나 에라스뮈스, 지성인들이 비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공론화되지는 못하였는데, 그것은 1518년 교종 레오 10세는 대사(면죄부)의 판매 권한과 면죄부의 효력에 대해서 비판과 토론을 금했고 어기면 파문한다고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비합리적이고 비성경적인 악습에 실망한 지식인층과 경제적 수탈에 지친 영주와 제후, 가톨릭 성직자들의 과세와 과중한 세금으로 불만이 많던 농민들까지 가톨릭에 등을 돌리면서 독일 전역이 개혁의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가톨릭은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ient, 1545-1563)를 열어 개혁의 바람이 부는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제반 문제를 토의하려고 모였다. 이 회의에서 면죄부의 폐해가 공론화되어서 면죄부 판매는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사라진다.
종교 암흑기라 불리는 16세기 유럽은 적그리스도의 화상인 교종과 살인집단인 가톨릭은 아무도 못 말리는 무소불위(无所不为)의 공포정치를 하고 있었다. 루터의 "95개의 반박문"은 가톨릭 교회의 모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교종의 보호자들인 기성세력들도 그를 탄압하였다. 1521년 교종청은 그의 사제직을 박탈하고 파문하고 이단으로 규정했다. 독일 지역을 다스리던 신성로마제국의 왕인 카를 5세도 교종청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를 추방된 자로 선언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루터를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쓰셨다. 루터는 그의 성채에서 숨어 지내게 된다. 그리고 그 기간에 하나님은 독일인들이 자기 나라 글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게 하셨다. 가톨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개혁의 바람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안타깝게도 루터는 개혁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1546년 63세의 나이로 고향 아이슬레벤에서 눈을 감았다. 루터의 주장은 교종 지배에 반발하던 제 후들을 결속시켰고, 1555년 종교 선택권을 인정한 아우크스부르크 회의를 끌어내면서, 사단의 화신인 교종 지배는 끝나고, 믿음의
자유가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하는 역사적 사실은 루터는 가톨릭의 그릇된 교리를 개혁한 것이다. 독일교회인 루터교회는 천주교의 외형적인 요소를 완전히 버리지 않고, 많은 모양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채 교종의 정치적인 지배와 일부 교리적인 자유를 얻는 개혁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결코 사도적인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의 정치제도들과 예배 순서 등 여러 점들은 장로교 등 여러 교파에서도 여전히 보게 된다. 영국의 성공회(Anglican Church)는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로마 가톨릭의 옷을 입고 있는 성공회와 가톨릭의 옷을 완전히 벗어버린 침례교 같은 복음주의 성공회이다.
루터를 기점으로 교황의 지배에서 자유를 얻은 복음주의자들은 초대교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활발해지게 된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런 복음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의 주체가 되었던 루터 칼빈 쯔윙글리 등에 의해서 다시 핍박을 받으면서 유럽에서는 종교혁명에 성공한 형제들에 의해서 다시 50년 동안 약 10만 명의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된다. 특히 루터, 칼빈, 쯔윙글리 등은 정권과 타협함으로써 주안의 형제자매들을 무참히 학살하는데 동조한 살인자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들은 한결같이 국가가 지배하는 국가적 교회를 주장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 저들이 저지른 살인적인 죄악들은 역사 자료들에 기록되어 남아 있다. (※재 침례교도의 역사)
†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1486~1525)
작센 지방의 통치자로서 선제후(選帝侯)이다. 선제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권한을 가진 선거인단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현명한 지방 군주이다. 그는 비텐베르크를 예술 활동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으며, 1502년 비텐베르크 대학교를 세웠다. 그는 열렬한 로마 가톨릭의 신자였지만, 루터를 바르트부르크성에 숨겨 보호하고 도와주어서 종교개혁자의 수호자로 개혁을 가능하게 한 큰 인물이다.
† Zinzendorf 백작
비텐베르크 대학의 벽에 붙은 Zinzendorf 백작의 기념 표지판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한 시대 독일의 형제 운동을 일으킨 복음주의 지도자요, 세계선교의 붐을 일으킨 큰 영적 지도자이다. 나는 이곳에서 진젠도르프 백작이 이 대학에서 공부하였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 분이 모라비안 형제 회의 창시자요 선교의 선구자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진젠도르프 형제들은 가톨릭의 모든 잔재를 버리고 정치적인 조직이 없는 믿는 자들의 중심인 사도 교회의 회복에 힘썼다. 개인의 믿음을 중요시하고 주의 만찬 예배와 물 침례를 회복하였다.
하루를 마치면서,
ㅌ오늘은 무더운 날이어서 여덟 사람이 탄 큰 차에는 에어컨이 없어서 몹시 덥고 피곤한 하루였다. 유럽은 더운 여름이 짧아서 대개 자동차에 에어컨을 달지 않는데, 이렇게 여럿이서 긴 여행을 하는 데는 좀 무리인 것 같았다. 피곤하고 무덥기는 했어도 즐겁고 보람 있는 하루였다. 강 자매 부부의 수고에 고마운 마음이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역사의 현장과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사도행전 교회의 회복이야말로 우리가 힘써가야 할 가장 큰 사명이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이 역사의 땅에 와 볼 수 있었던 것은 나만이 누리는 하나님의 큰 축복이요 특권이었다. 이 형제가 내일 파리로 가는 나를 위하여 자기가 알고 있는 파리의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에 있는 호텔을 예약해 주었다. 이 호텔은 파리 한인 침례교 집사가 하는 호텔로 자기도 머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이 언덕을 가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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