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두 번째 조선방문은 지원물자와 함께 하였다. 지난 9월 방문했을 때 한 인민학교(초등학교)를 찾아보면서 어린 학생들이 조금이나마 따뜻한 겨울을 보내도록 겨울 용품을 도와주리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어려움을 견디어 내고 있는 어린이들이 마음에 내내 걸렸다. (그동안 써 오든 “인민학교”라는 이름은 지금은 중국식으로 “소학교”로 바뀌었다.)
그 학교는 양재산 아래 있는 학교로 학생들이 한 700여 명 선생님들이 한 50여 명이었다. 그리고 공장 식구 가족들이 한 800여 명이었다. 이들 모두가 이 추운 겨울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지나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들을 돕기 위하여 자금이 아주 적게 생각하더라도 $15,000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몇 명 되지 않는 친구와 아는 사람들에게 이런 사정을 알리는 글을 보냈다. 그러나 11월 초순까지 그렇게 희망적인 소식은 오지를 않았다. 그래도 그저 간절하게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2:30에 전화 소리에 깨었다. 멀리 캐나다 밴쿠버에서 온 전화였다. 대북 양식 지원하고 계시는 분이셨다. 앞뒤 없이 11월 10일 중국 선양(심양) 비행장에서 만나자는 전화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만나면 알게 된다고만 한다. 주님께서 어떤 응답을 주시려는가 하는 마음으로 10시간 밤기차를 타고 선양으로 갔다. 이번에 이분은 단동에서 수십 톤의 양식을 들여보내기 위해서 오셨다. 비행장에서 만나 뵈니 나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주시면서, 서울에 있는 어떤 분이 북한 후원을 위하여 필요한데 쓰라고 자기에게 맡긴 것이라고 한다. 그 봉투 안에는 $3,000 이 들어있었다. 할렐루야! 우리 주님은 정말 놀라우신 분이셨다. 이것은 곧 추운 겨울을 보낼 조선의 어린 생명들에게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펴시고 계신 것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선물은 추위에 떠는 아이들을 도우려는 우리 목표의 시작이 되었다.
지난 10월에 12월 10일경 들어가도록 기대하였지만 11월 하순이 되도록 준비가 충분하지 못 하였다. 그래서 들어가는 날짜를 변경 신청을 하여서 두 번째 허가된 날짜는 12월 20-25일 사이였다. 12월이 되면서 우리 주님은 여러 손길들을 통해서 자금을 보내주셨다. 이번 일에 참예하여 주신 분들 가운데는 영국에 계시는 81세 된 Betty라는 노 자매님을 잊을 수 없다. 이 Betty 노 자매님은 내가 34세에 영국 남부 New Milton에 있는 Chelston Bible College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고 있을 때, 그 자매님은 은퇴한 63세의 나이로 나와 같이 공부한 동창생이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며 두 눈의 시력마저 상실하고 있는 자매님께 기도나 해 주기를 바라면서 글을 보냈는데 놀랍게도 £300을 보내 주셨다. 또 그때 함께 공부한 간호사인 Ruth자매는 간호사로서 파키스탄에서 의료 선교사로서 봉사하고 있는데 내 소식을 알고 £100을 보내왔다. 또 내가 영국에 있는 동안 독일교회의 초청으로 모두 6개월 정도 단기선교사로 Berlin과 Hanover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간호사와 광부 등 한인선교를 함께 동역하던 독일 국내 선교사이며 수간호사였던 칠십이 넘으신 Elisabeth Schaeper 노 자매님도 $550을 보내왔다.
그리고 이 할머니와 같은 교회에서 생활하는 김문봉 형제는 광부로 갔다가 나를 만나게 되어 주님을 믿고 믿는 자매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15년이 넘도록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그런데 이 할머니로부터 나의 소식을 듣고 $300과 함께 그들의 소식을 보내와서 정말 반갑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에 마포에 있는 중앙교회가 $1,000을, 그리고 또 한 교회가 $190을, 캐나다의 한 교회가 $120을 보내 주었다. 특별히 고마운 것은 Huston 서울 침례교회의 목단강 목장에서 $2,000 넘는 귀한 선물은 보내 주셨다. 온 세계에서 보내진 헌금은 모두 $8,000 정도였다. 이것은 조선을 돕고자 기도한 $15,000에 대한 절반 정도의 응답이었다. 주님은 이번에는 어린 아이들만 도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제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북방의 가장 추운 일월이 닦아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목단강 도매시장에 가서 서둘러 물건들을 사고 준비를 했다. 700명 학생들 위하여 방한모, 내복, 팬티, 방한화, 장갑 그리고 공책과 연필 지우개와 50여 명의 선생님들을 위하여질 좋은 내복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공장 식구들을 위해서도 가볍게 준비하였다. 정해진 마지막 날 연길 조선 대표부에 가서 입국 초청장을 250원(U$ 30)을 주고 찾았다.(그때는 지금보다는 입국절차가 조금 복잡하였다)
오늘은 1998년 12월 25일 성탄절 목요일로 날씨는 맑고 좋았다. 최 군이 아침에 반 트럭을 빌려 와서 짐을 실었다. 이번 일행은 도문 회사 여성 부경리와 지난번에 함께 했던 최 군이 운전을 하면서 가게 되었다. 최 군은 운전을 하면서 나에게 오늘이 성탄절인데 쉬지도 못하고 고생하러 간다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우리 함께 조선에 가서 뜻있는 성탄절을 지내자고 했다. 훈춘서 권하로 가는 산길은 눈이 얼어 빙판을 이루고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중국에서 간단히 수속을 끝내고 두만강 긴 다리를 건넜다. 캐나다 패스포트를 본 경비원은 나에게 깍듯이 경례를 붙이고 있어서 좀 친근감을 느꼈다. 조선 원정 출입국 관리소에는 라진 공장 지배인이 우리를 맞이하러 나와서 반가웠다. 조선 쪽은 이미 지원물자를 가져온 다고 신고해 놓았기 때문에 수속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가지고 가는 수량을 적은 물품 명세서를 건네주었다.
최 군은 나에게 “구호물자”라는 말은 조선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므로 “지원물자”라고 해야 한다고 알려 주어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보세 구역을 벗어나면 곧 바로 언덕길을 오르게 되는데 이 길에서 많은 도적 떼를 만나게 되는 사각지대이다. 지난번에는 그래도 도둑 떼들이 언덕길을 돌아서서 활동을 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보세구역이 바라보이는 길에서 차를 기다리다가 차가 언덕을 오를 때 까맣게 매달리는 바람에 트럭들은 올라가다가 차를 세워 놓고 차에 올라 탄 아이들을 쫓아 내리곤 하고 있었고, 이런 광경을 내가 차 안에서 보면서 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다. 경비병들이나 관리들이 멀리서 구경만 하고 아무 상관을 하지 않고 있어서 중국 상인들의 화물은 아무런 보장이 없는 듯했다. 도둑 떼를 다 쫓아 내린 차는 언덕을 다시 오르기 시작하지만 또 어느 산 고개에서 같은 일을 당할지 아무 보장이 없었다, 아직까지 다행한 것은 이 도적 떼들이 폭력적이 아니라는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강도들은 칼을 가지고 있어서 쌀자루나 로프를 자르기 때문에 특히 밤은 위험했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조선 세관원은 명세서에 도장을 찍어서 돌려주고는 차의 짐을 묶은 로프에 양은으로 된 것으로 봉인을 하는 것으로 우리들의 입국 수속을 마쳤다. 마지막 경비병의 확인을 마치고 그 악마의 사각지대 언덕을 오르게 되었다. 나는 최 군에게 지배인을 뒤에 태우자고 하니까 괜찮다고 차를 전속으로 몰아서인지 아무도 차에 오르지는 못했다. 다행이 큰 어려움 없이 그 사각지대를 무사히 빠져나왔다. 마치 무슨 모험을 하는 듯 차들이 여기서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약 40킬로는 산길이며 얼어붙은 눈길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골골이 보이는 농촌 마을들이 점점 어두움에 묻혀가고 있었다. 언덕을 오를 때마다 뒤에 실은 짐에 신경을 썼고, 차 부경리는 자주 창문을 열고 내다보곤 했다. 얼마나 왔을까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두운 산길은 자동차 불빛만이 길을 밝히고 있었고, 맑게 갠 하늘에는 초순의 초생 달과 별들은 내가 7살 때 부모를 따라 밤길을 따라 남으로 걸어가던 이름 모를 산야를 그리게 해 주었다. 이 깊고 깊은 그리고 캄캄한 산길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걸아가고 있었다.
강도의 공격을 받은 트럭
청학 전방 8 Km 정도쯤에서 산을 끼고 고갯길을 돌아 내려오는데 운전하던 최 군이 백미러를 보더니 도둑이 탔다고 소리치면서 급히 차를 세웠다. 그리고 라진 공장지배인과 최가 날래게 뛰어내려 그들을 쫓아갔다. 캄캄한 산길에는 실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배인은 저놈 잡으라는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고 있었다. 마침 밤길을 걸어오던 남자들이 저 놈을 잡으라는 지배인의 소리에 발을 걸어 넘어트려 주어서 한 청년을 잡을 수가 있었다. 도둑을 잡아 준 6-7명의 남자들이 차에 와서 담배나 한 값 달라고 했다. 최 군은 없다고 하면서 몇 개비를 집어 주고 보냈다. 짐을 찾자고 얼마의 밤길을 가 보았지만 오히려 저들의 함정에 걸릴 수가 있어서 그대로 포기했다. 잡은 도둑은 지배인과 최 군이 그의 손을 묶어서 뒷자리에 태웠다. 예리한 칼로 덮은 포장을 십자로 찢고, 짐을 묶은 로프도 칼에 잘려 있었다. 2-3개의 상자가 없어진 것으로 생각하면서 다시 짐을 대충 묶었다.
나는 국경선에서 세관이 로프에 인봉한 양은 봉인이 떨어져 있어서 기념으로 주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원래 이 양은 봉인은 도착지 세관원이 와서 뜯게 되어있는 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마침 일곱 살 된 딸을 데린 아주머니가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다가 우리에게 와서 선봉까지 간다고 태워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아이를 보니 딱해 보였다. 이 추운 겨울 어린아이를 데리고 아직도 25Km의 밤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딱해 보여서, 최 군에게 뒤에 태우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 주머니에 있던 사탕 몇 개를 먹으라고 어린아이 손에 쥐어 주었다. 아이의 손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잡힌 도둑은 17살이었고, 이런 일에 상당히 세련되어 보였다. 물건은 훔치는 데로 팔아먹는다고 했다. 그의 이름이나 주소 등은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지배인이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 아이는 얼마를 갈 때 까지는 짐을 내리지 않았다고 우기다가, 잘 못 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했다. 지배인은 너를 놓아주면 내 목이 달아난다고 화를 내고 있었다. 지배인은 군에서 장교로 재대한 분으로 자주 아이의 머리를 때리면서 이 화물은 위대하신 장군님께서 내리신 예물로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것이라고 아이를 겁주고 있었다. 이 화물이 중국서 보내오는, 또는 캐나다 김 사장이 가져오는 지원 물품이라는 말은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장군님이 내리는 선물이란 말만 하고 있어서 나는 놀랐다. 같은 소리를 여러 번 들으면서 섭섭한 마음이 느껴졌다. 듣던 대로 조선은 누가 지원하던 생색은 장군님이 낸다고 하더니 지금 내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주영 사장이 소떼와 트럭들을 그렇게 많이 갖다 주었어도 아래 집단 농장들에 내려 보내면서 위대하신 장군님이 내리는 것이라고 했다는 말을 이제 내가 실감하고 있었다. 선봉에서 아이와 아주머니를 내려주었다.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연이어하고 있었다. 나는 차가운 그들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잘 가라고 보냈다.
나는 지배인에게 저 애를 안전국에 넘겨봐야 매만 썩어지게(죽도록) 맞지 무슨 짐을 찾겠느냐고 보내라고 했더니, 함께 가는 최 경리가 지난 달 중국에서 원단을 싣고 자기네 회사 트럭이 이렇게 습격을 받아 물건을 많이 잃어버려서 일을 오랫동안 못했다고 하면서 안전국에 넘겨야 한다고 했다. 그 뒤 시장에서 그 원단을 파는 것을 알고 장사꾼과 몇 마디 물어보고 곧 가서 안전원을 데리고 왔는데, 장사꾼이 이미 눈치를 채고 사라져 버려서 물건을 결국 찾지를 못했다고 했다. 우리 트럭은 라진 안전국 앞에 와 서자, 지배인은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서 안전국에 넘겨 버렸다. 안전국에서는 이 애들이 높고 깊은 산에 살면서 내려와 이런 짓을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고 물건을 찾는 일은 부정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밤늦게야 나진 공장에 도착했다. 공장 당비서 등 간부의 영접을 받았다. 당서기와 간부들이 우리 차가 강도 만난 것을 알고 미안해하였다. 차는 화물을 실은 그대로 창고에 넣고 큰 열쇠로 문을 잠근다.
방은 따뜻하게 불이 떼져 있었고, 우리를 위하여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마련한 것 같았다. 열 콩을 넣어서 만든 송편, 가자미, 돼지고기, 고사리, 숙주나물과 모 두부였다. 밥은 이밥이었다. 이곳 두부는 공해가 없고, 바닷물로 만드는지라 맛이 대단히 좋았다. 나는 양념간장을 숟가락으로 퍼서 모두부 위에 얹어 놓고 떠서 입에 넣고 씹는데, 아차 이게 웬 말인가 모래가 콱 씹힌다. 깜짝 놀라 입에 물고 그대로 있는데 짠 물이 녹아내린다, 그때서야 나는 굵은소금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모두 헤어진 다음에 이 일을 이야기하니까 이곳에는 간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콩이 없으니 어떻게 간장을 담을 수가 있느냐고 한다. 여성 당 비서와 공장 지배인 등 간부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함께 한 것은 뜻있는 일이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전기불이 왔다 갔다 해서 아예 촛불을 켜 놓고 먹었다.
크리스마스 캐럴
깊은 잠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려는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캐럴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
상하다 생각하면서 잠결에 중국 내 집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잠시 뒤에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원장님 잘 주무셨습니까?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 나는 깜짝 놀라, 아차 여기가, 거기가 아닌가, 하고 깜짝 놀라 라디오를 찾았다. 경음악으로 나오는 캐럴을 들은 그는 노래 소리가 아름답습니다, 하면서 어디 노래 입네까? 하고 묻는다. 나는 중국 방송이라고 하고는 라디오를 껐다. 이 조그마한 트랜지스터는 내가 중국어 공부를 위하여 가지고 다니면서 중국 방송을 듣는 것인데 가방에 그냥 묻어온 것이다. 어제저녁 잠자리에서 잠을 청하려고 켜 보니 음질 좋은 아름다운 Carol이 흘러나와서 듣다가 그냥 잠이 들었고 밤새 그리고 아침에는 이렇게 아름답고 경쾌한 캐럴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세아 방송이 중국 목단강 보다 더 맑게 나오고 있었다. 차 경리와 공장 측 여자분이 와서 아침을 준비하였다. 공장에서 우리의 지원물자 도착을 알린 모양인데 이 물건 검사를 위하여 3개 부처에서 나 다고 해서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지배인이 우리 차가 습격받은 것을 모두에게 알린 모양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뒤에 짐짝들을 내려놓았다. 잠시 뒤 세관, 출입국관리국 그리고 안전부(경찰)에서 왔다. 별 것도 아닌 이 일로 세 곳 부서에서 와서 물건 조사를 하고 있었다. 나를 만나러 온 교육국장도 와서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두 세관원이 중국에서 내가 가져간다고 신고한 숫자대로 물건 덩어리를 열어서 하나하나 세어서 700개의 숫자가 맞는지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정말 피곤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부시장이 와서 우리를 환영하면서, “오시는 길에 습격을 받으셨다고요”하면서 미안해했다. 짐짝을 세어보니 700개의 모자와 내복이 든 상자 두 개가 없어졌다.
교육국장의 기막힌 제안
오랜 시간 끝에 검사를 마쳤다. 공장에 줄 것을 주고는 학교로 갈 물건을 차에 싣고 교육국장과 함께 그 마을의 인민학교 문 앞에 왔을 때, 교육국장이 나에게 이 학교에 다 주어도 좋지만 이 학교에 그냥주면 내복이나 신발이 있는 아이는 두 개씩이 된다고 하면서, 교육국에 주시면 우리가 각 학교에 공문을 보내서 신발이나 내복이 없는 아이들을 보고 받아서 꼭 필요한 아이들에게 주면 어떻겠느냐고 묻는데, 듣고 보니 정말 말이 되었다. 국장이 그렇게 제안하는 데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만 이 선물들이 이 학교에서 교육국으로 옮겨지게 하는 기막힌 묘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국장에게 듣고 보니 좋은 말씀입니다. 꼭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다짐을 하고는 지원물자는 교육국으로 가게 되었다. 국장의 의견은 좋은 생각이다. 문제는 실제로 그렇게 하는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다. (이 년 뒤에 내가 들은 것은 그 가운데 얼마는 위로(평양) 보내졌다고 한다)
천연색 사진에 반한 마음들
지배인과 함께 공장 한 작업장에 가니 여공들이 다 모여 있었다. 작업대에다 지난번 찍은 사진들을 펴 놓고 얼굴 따라 찾아가게 하니 모두 얼마나 기뻐하는지 난리들이다. 처음 활짝 웃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도 기뻤다. 그도 그럴 것이 Colour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이때 만 해도 여기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얼마나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간부들 색 사진 찍어주기
우리는 공장 당 서기 사무실에 갔다. 당 서기는 여성으로서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그 자리에서 안 지도원이 나에게 그 때 왜 간부들은 안 찍어 주었느냐고 섭섭해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비서 동지와 지배인이 있는 자리에서 그때는 여러분들을 찍어도 괜찮은지 알 수도 없었고 조심스러워서 못 찍었는데, 이번에는 많이 찍어드리겠다고 하자 모두 웃는다. 사무실에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 사진 앞에서 앉히고 세우고 하면서 멋있게 찍어주고 우리도 함께 찍었다. 그리고 이 공장 지도자들을 많이 찍어 주었다. 사진을 찍어 주는 일은 서로 사귈 수 있는 좋은 접촉점이 되고 있었다. 지난 9월 왔다가 3개월 반 정도 뒤에 온 지금 라진시의 정책이 여러 가지로 많이 바뀌어졌다. 우선 자유 시장에는 그동안 자유로운 개인장사를 금지하고 직장 단위로만 장사를 하도록 해서 시장이 한산한 분위기가 되었다. 물고기나 산에서 잡은 산토끼와 꿩 등은 부대에 숨겨가지고 있다가 우리가 지나가니까 꿩을 사라고 하면서 여전히 몰래들 팔고 있었다. 여러 가지 짐승 가죽들도 팔려고 소개하고 있었다.
양식 후원 계약
지배인 사무실에서 빵 생산에 대한 일을 토의하였다. 나는 일 년 동안 매일 150g 찐빵 하나씩을 먹도록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지배인이 우리 공화국의 한 끼니 표준 정량이 200g이라고 하면서 200g으로 해 달라고 했다. 지금 끼니도 제대로 못 먹는 형편에 정량 타령을 하고 있었다. 얼마간의 토론이 있은 뒤 200g으로 하기로 했다. 빵을 찌는 데 필요한 연료 문제도 한참 토론이 있었다. 그것마저 나에게 다 맡기려고 하였으나, 연료는 공장이 맡도록 했다. 나는 밀가루 반죽 기, 빵 찌는 솥들과 틀을 사서 보내기로 했다. 이렇게 대충 토론한 뒤에 라진과 도문 공장 그리고 나의 이름으로 임시 합동서(계약서)를 쓰고 서명을 했다. 하루 점심 한 끼니로 공장 450명에게 200g 찐빵 한 덩어리를 공급한다는 내용이다. 합동서의 내용은 1999년 3월 중순경 빵 생산에 필요한 설비를 들여오고 4월에 정상 생산을 하자는 내용이다. 지배인은 4월 1일에 생산을 하기를 원하는데 이유는 4월 15일이 위대한 김일성장군의 탄신일이라고 그때를 기하여 생산하자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도록 해 보자고 하였다.
일등품 밀가루 요구
그리고 지배인은 나에게 밀가루는 일등품으로 보내주어야 한다고 부탁을 하는데 내 마음이 좀 거슬렸다. 나는 그에게 지배인 동지, 중국에서 일등품 밀가루가 어떤 것인지는 아느냐고 물었다. 잘 모른다고 대답한다. 나는 그에게 일등품은 밀의 속 부분의 하얀 성분으로 되어 있어서 그것만 먹으면 각기병에 걸린다 하면서, 그런 밀가루는 특별한 음식, 즉 색깔을 좋게 하
기 위해서 만두 등을 만드는 데 쓴다고 설명하여 주었다. 그리고 우리 양로원은 이 등급 정도를 먹는 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 밀기울이 함께 빻아진 밀가루가 몸에 좋은 것이라고 설명하여 주었더니, 지배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좀 속된 말로 하자면 지금 끼니도 제대로 못 먹어 도움을 받으면서도 일등급만 찾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밀가루 찐 빵은 먹기가 텁텁하니까 맛을 내고 잘 먹을 수 있도록 사카린을 사 보내 주겠다고 하니까, 우리 공화국 식품 법에는 사카린을 쓰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하면서 설탕밖에는 안 된다고 하면서 사양해서 내가 또 한 번 놀랐다. 또 내가 입던 옷을 좀 가지고 오는 일을 의논하자, 옷은 입던 것은 안 되고 새것이어야 하고 남조선 상표를 떼고 가져와야 한다고 한다. 이 추워오는 동삼(겨울)에 입을 것이 마땅치 않은데 새것만 찾고 있으니 한심했다. 나는 지배인에게 여보시오! 나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오는 동무들이 거두어 오는 중고품 옷들을 골라서 입고 살고 있다고 내 입은 옷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옷감이 좋아서 몇 년을 입어도 새것이나 다름없어서 입기에 편하다고 설명해 주었더니, 공화국 법이 그렇다고 한다. 이제는 말만 하면 법으로 나오고 있었다. 얻어먹으면서도 당당하고 자기 할 소리는 다하는 기죽지 않는 자존심을 가진 이 친구들을 누가 쉽게 다룰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생각하기에 주제를 모르고 착각에 빠진 백성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굽히지 않는 그 자존심의 고고한 모습은 오히려 굽힐 줄 모르는 조선민족의 기개 인지도 모른다.
돌아 나오는 길
모든 일을 마치고 우리는 날도 춥고 해서 26일 오후에 나오고자 서둘렀다. 라진 시에는 연길에서 온 조선족 부부가 잡화점과 중국 식당을 하고 있는데, 식당은 중국 사람들이 주 고객이어서 장사가 잘 되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이 중국식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밖에 나오니 두 여인이 나에게 선생님 우리는 원정까지 가는데 차를 태워달라고 부탁을 한다. 나는 쾌히 허락하고 두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이 둘씩인 여자들로 얼굴은 거칠고 화장 끼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등에 진 짐들은 무엇인가 물으니 쌀이라고 한다. 왜 쌀을 이 먼데까지 사러 나오느냐고 물으니, 그곳에는 쌀을 파는 곳이 없다고 한다. 쌀은 1 Kg에 70원씩(중국 돈 2.8원)에 샀다고 한다. 언제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기차를 타고 왔는데 오후에는 가는 차가 없다고 한다. 차비는 30원이라고 했다. 그리고 10Kg은 들어가는 큰 통에는 무엇인가 조금 들어 있어서 이것은 무엇인가 물으니, 콩기름이라고 한다. 설을 쇠려고 산 것이라는데 평소에는 기름 구경을 못한다고 했다. 기름은 한 1 Kg 정도밖에 못 산 것 같았다. 기름집이 가까웠으면 가득 채워주고 싶었다. 내가 농담 삼아 이왕 중국차를 타고 가니 중국까지 가자고 하니까, 두 여인들은 히죽이 웃는다. 한 여자가 “나에게 중국으로 많이 건너가지요”하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른 여자가 “중국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의 손발을 잘라서 인(人) 돼지를 만든다면서요? 하고 말한다. 나는 웃으면서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건너오면 먹이고, 입히고, 도와주고 살길들을 열어 준다고 대답해 주었다. 몹시 지치고 피곤한 이 여인들의 얼굴에는 쌀과 기름을 사서 이제 설날을 가족과 함께 이밥을 먹을 수 있다는 뿌듯한 마음과 이 추운 겨울 날씨에 40Km의 먼 길을 우리 차를 타고 가게 된 것을 흐뭇하게 여기는 듯했다. 북한은 양력설만 쉰다면서 음력설이란 것은 모른다고 한다.(수년이 지난 뒤부터 음력설도 쉬도록 하고 있다) 가는 길에 이 사람 저 사람들을 태우게 되었는데, 한 곳에서는 군인들이 길을 막고 차를 세운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가까이 와서 경례를 하고는 휴가 가는 병사를 태워 달라고 해서, 타라고 했다.
무거운 배낭 짐을 지고 걷는 모든 사람들을 다 태워 줄 수는 없었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은 다 나약한 여인들이었다. 남자들은 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 여인들만 이렇게 가족의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날마다 이렇게 헤매고 다녀야만 하는지, 푸른 하늘아래 이 고통받는 백성을 하나님은 왜 이대로 버려두고 계시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대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먹을 것을 찾아 나서고, 여자들이 배낭을 지고 어디론가 양식을 구하려 다니고, 대개 남자들은 집을 지키고 있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서는 남자들을 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집을 지킨다고 해서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어떤 면으로 조선은 매일매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양식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지친 모습들로 가득 찬 나라라고 말하고 싶다. 두만강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마지막 두 여인이 내렸다. 두만 강가에 사는 여인들이었다. 내가 차 문을 열고, “가족과 설을 잘 쉬세요”하고 말했더니, 한 여성은 태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인사하는 그의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활짝 웃는 그 얼굴에는 사상도 이념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언덕에 올라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손짓하는 그 젊은 여인은 귀엽게 보였다. 모든 여인들도 키가 작은 것이 공통점이었다. 어렸을 때 영양이 충분하지 못한 것도 원인이겠지만, 크면서 이렇게 무거운 짐을 많이 지고 다니는 것도 성장에 지장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워져 가는 산골들로 총총히 사라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도 길을 재촉했다. 골짝 동리의 굴뚝에서는 저녁 짓는 연기들이 무럭무럭 오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우리가 산정 국경관리소에 들어와 수속을 하는데 지원물품을 넘겨주었다는 세관의 인수증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전화로 확인하는 동안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원래 이 서류를 가지고 와야 하는데 직원을 만나지 못해서 찾다 못하여 시간은 가고 최 경리가 해관(출입국 관리소)에서 해결하자고 온 그냥 온 것이다. 마침 라진 세관에 우리 짐을 검사한 담당자가 전화를 받아서 출경 수속이 겨우 끝났다. 그리고 관리가 짐 검사하러 왔다. 최가 잘 아는 사람이어서 마침 차에 있는 백알 두병을 주니까, “좋은 술이구먼”하고 서류에 사인을 해주었다. 서둘러 다리 경비병의 확인을 받고 다리를 전속으로 건너오니 저녁 5시 5분, 이미 중국 두만강 국경선 다리는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오후 5시에 근무가 끝나면서 철문은 닫는다고 한다.
우리 앞에 트럭이 세대가 서 있고 우리가 마지막이었다. 앞에서 중국 사람들이 철문을 사이에 두고 큰 소리로 경비병들과 다투고 있었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중국 경비병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들고 철문을 넘어 오라고 하였다. 사람은 건너가게 하는데 차는 왜 안 되느냐고 시비다. 일직 장교는 이 문은 내일 아침 출근시간까지는 열리지 않는 다고 한다.
두만강 다리 국경 철문을 넘다
나는 가방을 가로매고 캄캄한 밤 찬바람이 세차게 부는 두만강 다리 난간에 부축을 받으며 올라서서 철문을 기어올라 넘었다. 당직 장교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로 가서 입국 수속을 하는 동안 한 장교가 영어를 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마침 두 일직 장교가 조선 사람들이었다. 나보고 “캐나다 사장님은 여러 나라를 다녀 보셨을 텐데 이렇게 철망을 넘어 입국해 보신 것은 처음이시지요?”하고 물어서 정말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사람은 들여보내고 철문을 닫으면 안 되느냐고”물었더니 자기네 규칙 때문에 미안하다고 말했다. 조선족 장교는 우리에게 귀띔 말로 어떤 때는 밤 12시에 국경선 문이 살짝 열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밀수 차를 들여올 때란다. 우리는 기대하고 기다려 보았지만 그 밤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차량 경비를 줄이려고 빨리 나오는 길인데 오늘은 토요일, 내일은 일요일이라 근무를 안 하고 월요일 아침 9시 이후에야 차를 가져갈 수가 있다고 하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지금은 일요일도 정상 근무를 하고 점심시간도 한 시간으로 되어 있다) 사실은 차량 경비를 줄이려고 하다가 더 들어 가게 되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보세 구역 가까이에 있는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하면서 최 선생과 최 경리에게 성경이 무슨 책인 것과 예수님이 누구 신지를 한 40분간 진지하게 소개 할 수 있어서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비록 두만강 철문을 넘는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이렇게 두만강 언덕 밥집에서 이분들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전도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 귀한 시간이었다. 이 시간 도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차는 없다. 나는 여기서 밤을 지새우는가 하는데, 최 부경리의 남편이 자가용을 가지고 우리를 데리러 와서 반가웠다. 몸을 여위는 차가운 강바람과 함께 깊어가는 두만강 밤의 추억이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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