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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

아내와 찾은 조선 6. 2001

이번 조선 방문은 아내와 함께 가는 길이다. 우리는 조선을 가려고 훈춘에 있는 친구 집에서 하루 쉬면서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에 택시로 조선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취엔허(권하)로 가는 길은 이제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서 기분이 상쾌했다. 전에는 산굽이를 여러 차례 돌아 넘어갔지만 지금은 두 개의 굴을 뚫어서 직선 도로가 되어 시간도 짧아져서 좋았다. 이제는 훈춘에서 택시로 40분이면 조선이 건너다 보이는 두만강 국경선에 닿을 수 있는 편한 세상이 되었다. 세상은 3년 만에 이렇게 달라졌다. 중국은 모든 곳에서 빠르게 변화되어가고 있었다. 조선으로 관광 가는 중국 관광객들도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중국 해관에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배낭을 메고 긴 두만강 다리를 건너면서 간악한 섬나라 왜놈들의 발굽 아래 짓밟히던 우리나라 강산의 고통과 조국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껴진다.(지금은 버스로만 건너 다니게 하지만, 그때는 차가 없는 사람들은 걸어서 다리를 건너가게 하고 있어서 더 낭만적이었다) 역사를 지켜보면서 말없이 흘러가는 두만강 물결을 내려다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우리 앞에는 펄럭이는 큰 인공기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경비병에게 여권을 보이자 캐나다 멀리서 오셨다고 반가워했다. 조선의 원정 출입국관리소에 들어가서 우리를 데리러 오는 안내원들이 올 때까지 두 시간여 기다려야 하는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젊은 두 안내원이 와서 우리를 반겨 주었다. 우리의 입국 수속을 해 주고 우리를 데리고 보세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가지고 나온 차를 타고 라진으로 향했다. 두 안내원은 날렵하고 대화가 능하여 나와 통하는 데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친구는 나의 전속 안내원같이 수년 동안 수고해 주었다. 이들은 조국을 사랑하는 청년들로 모두 김일성대학을 나온 훌륭한 조선의 엘리트였다.
 

방문목적
우리는 이번에 들어가면서 중국에서 완성된 우산 재료를 보내 주어 조선에서 조립 생산하여 팔아 그 이익금으로 종사자들의 양식을 돕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안내원들과 구불구불한 태백산 험한 산길을 돌아 내리면서 자선 사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내원들이 우리에게 두 곳을 소개해 주었다. 지체 장애자들로 이루어져 있는 한 기업소를 지원하는 일, 명예 군인(상이용사) 촌을 지원하는 일 등을 나누면서 라진에 닿았다. 안내원들이 우리를 머물도록 해 준 곳은 라진 호텔이었다. 이곳은 시내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서 내가 움직이기에 불편해서 광장 옆에 있는 남산 여관으로 해 달라니까 여기에 그냥 머무르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호텔에 짐을 풀고 우리는 점심을 먹어야 하기에 가까운 고국의 음식을 하는 식당에 가자고 했더니 그런 곳은 너무 추하다고 하면서 우리를 일본 조총련 교포가 하는 금영 식당으로 갔다. 주로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이곳은 음식 값이 비쌌다. 거기에다가 함께 하는 날 동안 두 안내원도 내가 다 먹여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들 수밖에 없다. 식사 뒤 호텔에 돌아와 택시 값을 계산하는데 중국보다 대단히 비쌌다. 중국 돈으로 320원이었다. 여기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관문인 원정에서 라진 시로 들어오는 공공 차도, 택시도 없어서 들어오는 외국인은 안내원이 라진에서 택시나 차를 가지고 나오는데 왕복 차비를 방문자가 내도록 하고 있었다.
 
               

  

잠시 쉬고 있는데 호텔 앞으로 군중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서 밖으로 나와 보니 미 제국주의자들을 까부수자는 인민 궐기 대회를 하려고 직장 마을 단위로 모여 운동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호텔 뒷산으로 해서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오르니 산에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잘 만들어진 정자가 있고 주변에 화초들을 잘 가꾸어 놓고 있었다. 운동장에 가득히 모인 군중들은 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는 군중대회를 하고 있었다. 한참 성토하고 있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누런 먼지를 일으키더니 소나기가 내렸지만, 군중대회는 질서 있게 진행되었고 마지막 순서는 부시 인형과 성조기를 불태우면서 반미 구호를 외치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조선에 와서 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군중대회는 우리에게 또 색다른 경험이었다. 우리를 쉬게 하고 갔던 안내원들이 오후 늦게 왔다. 나는 군중대회에 관해서 물으니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클린턴 때에는 평화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고 발전하고 있었는데, 부시가 올라오더니 자기들을 업신여기고 힘으로 누르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전국적으로 이런 군중 궐기 대회를 한다고 했다.

 

특히 라진은 외국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한 지도원은 나하고 단둘이 있는 시간에 우리 공화국에 핵폭탄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 미국과 직접 상대하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3년 전보다는 여기도 발전을 많이 했다. 공장들도 눈에 띄게 들어섰고, 식당들도 여러 개가 생겨났다. 그러나 한 나라의 개방 도시로서는 너무 느린 발전이라고 해야겠다. 오후 5시에 박 과장이 호텔로 왔다. 자선 사업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때 나는 박 과장에게 이틀간의 계획 속에 한 가지 나의 부탁을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첫째는 지난 일 연간 밀가루를 지원했던 곳에 가서 함께 빵을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가까운 곳에 있는 락원 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라진 항구의 불빛들을 바라보는 조국의 밤은 왠지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싱싱한 오징어
동해의 밝은 해가 온 누리를 비추며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안내원이 일어나기 전에 일찍 해변에 나갔다. 몇 사람들이 검은 기름때가 묻어 있는 바다에 들어가 허리춤 정도 차는 곳에서 대합을 잡고 있었고 1kg에 조선 돈으로 80원에 팔고 있었다. 몇 개 사 먹고 싶었으나 여기는 항구여서 물이 더럽고 바다 바닥도 더러워서 그만두었다. 바다가 오솔길에 늘어선 소나무는 마치 분재를 한 것 같이 멋있게 휘어져 있어서 아름다웠다. 그 오솔길을 지나 나오니 작은 어선들이 있는 외진 곳에는 밤새 통통배들이 잡아 온 싱싱한 오징어들을 두 아주머니가 배를 가르고 손질하고 있었다. 몇 마리를 살 수 있느냐고 묻자 아주머니가 주위를 살피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는 1kg에 조선 돈 150원(중국 돈 4원, 미화 50센트)이란다. 네 마리를 샀다. 호텔 방에 돌아와 주머니칼로 썰어서 중국에서 가지고 간 고추장으로 회를 해 먹으니 별맛이었다. 시간이 되어서 아침을 먹으러 내려가니 로비에 안내원들이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전에 후원하던 공장과 경로동 기업소에 들릴 것이며, 가는 길에 출입국 관리소에 가서 입국 신고를 해야 한다는 계획을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었다. 명태 국으로 된 아침은 맛이 좋았다. 9시경 우리는 로비에서 안내원들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에게 “택시를 부를까요”하고 물었다. 나는 아침이니까 운동 삼아 출입국 관리소까지는 걷고, 그 뒤에 택시로 가자고 권했다. 우리는 호텔의 뒷동산을 넘어서 갔다. 출입국 관리소에 도착하니 장마철이라 비가 좀 내리고 있었다. 왕 가뭄에 시달리던 이곳에도 비가 이렇게 내려주니 반가운 일이었다. 원정에서 입국할 때 이미 입국 수속을 하고 도장을 찍었는데, 시내에 들어와서 또다시 입국 확인 도장을 찍는다. 여기 제도는 입국 통과, 목적지에서 다시 확인하는 절차였다. 이중으로 하고 있어서 불편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택시로 우리는 양식 지원을 하던 청계천으로 갔다. 전에 있던 지배인은 다른 곳으로 가고 젊은 새 지배인이 와 있었다.

 

늘은 모두 바빠서 당 비서 권 동지 등 아는 얼굴들을 볼 수는 없었다, 지난 1년 동안 지원했던 밀가루 도착 현황을 확인하고 내일 빵을 만들어 함께 점심을 먹는 일을 서로 약속했다. 그리고 중국 무역상에게 가서 밀가루 10톤과 설탕 한 포, 그리고 열 콩을 사도록 돈을 주었다. 내려오는 길에 미국 휴스턴 장로교회 노회에서 운영하는 영양 빵 공장에 들렀다. 중국 길림에서 조선족 집사 부부를 책임자로 두고 운영하고 있었다. 빵 만드는 기술자인 중국 여성 8명과 조선 직공들을 데리고 빵을 생산하고 있었다. 하루 8,000개 정도를 생산하는데 유치원 아이들에게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빵은 설탕, 닭알(달걀), 우유, 밀가루, 등을 섞어서 만드는 영양가 높은 빵이었다. 책임자 조선족 자매는 길림에서 가정교회를 하다가 여기 책임자로 오게 되었고 자체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물론 북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것은 금지라고 한다. 우리를 친절히 대해 주었고 금방 만든 빵을 먹어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떠날 때 따끈따끈한 빵을 싸주어서 고마웠다. 이 빵들을 안내원들에게 주면서 나누어 먹으라고 하니 반가워했다. 

               

 

경로동 기업소
생산 공장에서 일하다가 신체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인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이곳에 모아 하루 6시간만 일하게 하고 8시간의 노동 대가를 받게 해서 살아가게 하는 곳이었다. 내가 그곳에 갔을 때는 마침 못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원자재가 없어서 녹슨 철망으로 못을 만들고 있었는데 내 평생에 처음 보는 초라한 못이었다. 일이 생기면 일하고 없으면 놀고 있었다. 그들은 어렵게 연명해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가지고 간 우산 재료들을 그곳에 주고 연구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 남침례교회가 운영하는 빵 공장을 방문했다. 하루에 12,000개 정도를 생산하여 점심시간에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에 오고 그들이 우리를 초청한 목적은 자선 사업에 대한 것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라진시 정부 측에서는 무상으로 양식을 도와주면 고맙기는 한데 먹고 나면 그만이지 않으냐고 하면서 양식을 지원해 줄 돈으로 원자재를 사주어 스스로 생산하여 팔아서 먹고살도록 해 주면 자립도 되고 더 도움이 되겠다는 제안이었다. 바로 이런 제안에 대해서 나는 우산 조립 생산을 제안하게 된 것이었다. 현재 조선에는 우산공장이 없다고 한다. 얼마 전 일본 사람이 평양 부근에 우산공장을 차렸다가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무슨 큰 공장보다는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양식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양식 대신 원자재를 사주어서 수고한 노력의 대가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나는 왜 우산 조립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느냐 하면, 98년 처음 왔을 때, 시 당국의 한 관리가 자기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일용품 생산을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라진에 우산 생산의 필요하다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고 가는 일들을 보면서 우산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같이 마대를 접어 쓰거나, 비닐을 쓰고 가는 모습, 또 그냥 비를 맞고 가는 아이들이 많아서 측은 했다.   

 

우산공장을 찾아서 

여기 오기 전에  나는 우산 파는 분들에게 우산공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결과는 동북 삼성에는 우산공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얻은 정보는 저장성 항죠(杭州)에 가야 우상 공장들이 있다는 것이다. 마침 청도 옆에 있는 황도에 조선 형제가 하는 가정교회를 가는 길이 있어서 그곳에 있는 우산 공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항도 가정교회를 방문하고 그곳 형제를 데리고 상해를 거쳐 항죠에 가서 알아보니 소산(萧山)에 쟈루(佳禄)라는 우산공장 주소를 알아냈다. 해가 기울어져서 항조에서 하룻밤을 쉬어야 하는데 내가 외국 사람이라고 두 배나 숙박료를 내라고 한다. 그래서 형제가 다른 여관에 가서 부친이라고 말하고 하룻밤을 쉴 수가 있었다.(몇 년 뒤 외국인에 대한 가격 차별제도가 없어졌다) 우리가 머문 여관은 항죠의 아름다운 서호(西湖)옆이었다. 아침 일찍 우리는 서호의 아름다운 호수를  걸어서 큰 길에 나와서 소산으로 가는 차를 탔다. 소산에서 또 차를 타고 20Km 이상 가서 쟈루(佳禄)라는 우산 공장을 찾아들어갔다. 나 자신을 소개하니 바오자러 라는 사장은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하여 공장 시설을 보도록 해 주었다. 사무실에 돌아와서 나는 부품을 사서 조선에서 조립하는 문제를, 그리고 조립하는 기술자를 훈련하는 일들을 의논했는데, 그때 바오 사장은 일주일 정도면 조립 기술을 배울 수 있는데 사람을 보내 주면 자기들이 숙식을 제공하여 무료로 가르쳐 주겠다고 하여서 고마웠다.  

 

우산 조립 생산 의논

우리가 그때 가져온 부품 본보기(견본)를 내놓고 라진에서 생산하는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였다. 한 관리는 우산 조립 사업으로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우리가 중국에서 우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여기에서 생산하는 우산만 팔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술자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두 사람 정도를 보내 주면 모든 경비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제안했다. 다음 날 안내원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기술을 배우는 사람을 내 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 기술자가 들어와서 가르쳐 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아니면 부속품만 보내 주면 자기들이 알아서 조립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도 현재 이 일을 위하여 구체적인 후원회가 없어서 우선 의견만 나누는 일에 그쳤다. 그리 큰 자본이 드는 일이 아니므로  조선을 사랑하는 분들이 뜻을 모아 간접 선교의 차원에서 그들을 도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라진에 있는 학생들 약 일만 오천 명 그리고 팔천여 명의 유치원 어린이들에게도 상징적인 뜻을 담은 사랑의 우산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빈 물병과 얼음과자
오후 4시에 이곳에 온 관광객들을 위하여 라진 인민 회관에서 어린이들이 연출(공연) 한다고 하여 안내원들이 우리를 데리고 갔다. 대부분의 관객은 1박 2일로 온 중국 관광객들과 장사하러 온 사람들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저 모두가 중국 사람들이었다. 입장료는 받지 않고 무료였다. 밖에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들 두세 명이 우리 주위를 서성거린다. 안내원들이 가라고 해도 몇 발자국 물러갔다가는 다시 가까이 온다. 내가 궁금해서 아이들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우리가 마시고 있는 물병을 달란다.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고 물으니, 얼음과자를 바꾸어 먹으려고 한다고 한다. 얼음과자는 한 개에 북한 돈으로 5원이었다. 병에 아직 물은 있었지만 내 것을 주었더니 고맙다고 하고는 얼음 장사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극장 문이 열리고 들어갔다. 공회당 안은 환경이 좋지 않았다. 공연이 시작되면서 한 여자아이가 조선을 방문하여 주신 외국 손님들을 환영한다는 말을 하는데, 평범한 목소리로 낙낙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말에서 한 옥타브 높게 말을 빠르게 하고 있어서 우리도 말하는 내용을 잘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보통 말할 때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공연장에서 하는 노래나 말은 왜 그렇게 높은 옥타브로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귀여운 어린이들의 노래와 춤은 고국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공연이 끝나고 나는 안내원들과 시장에 가서 바다 게들을 좀 사서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자 갔지만 싱싱한 것은 없었다. 익혀서 얼린 것들뿐이었다. 원래 안내원들과 아침에 사서 점심으로 먹고자 의논이 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잊어먹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큰 게들을 몇 마리 그리고 털게도 두 마리를 샀다. 그리고 한 여성이 팔던 대합 살을 샀다. 그 외에는 싱싱한 생선이라고는 없었다. 박 과장과 안내원들과 함께 게들을 가지고 조선 식당으로 가서 삶아 달라고 해서 함께 저녁을 먹는데 털게와 대합은 좀 상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음식을 나누면서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또 나누었다. 나는 과장에게 이 두 젊은이가 우리를 위해서 너무 수고가 많아서 일정을 이틀 줄이겠다고 했다.

                      

 

오전에 안내원들과 시내 출입국관리소에 가서 출국신고를 하고 경로동 기업소에 갔다. 소장과 모든 사람들이 길 수리하러 가서 만날 수가 없었지만, 빵을 만들려고 가는 길에서 길 수리하는 기업소 사람들을 만났다. 큰비는 아니지만 계속 내리고 있었다. 기업소 소장 동지를 우리 차에 태워서 간단히 이야기 나누고 밀가루 5톤을 살 돈을 주었다. 그는 진실로 고마워했고 안내원들도 고마워했다. 공장에 가서 우리는 공장 아주머니들과 함께 빵 만들 준비를 하였다. 밀가루 반죽 기계로 반죽을 하고 절단기로 같은 크기로 자르면서 붉은 열 콩을 삶아서 찐빵을 만드는데 여러 사람이 정성을 다했다. 우리 집 사람이 아주머니들과 어울려 빵을 만들면서 보람된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당 비서 동지가 인사하러 와서 반가워했다. 그리고 아는 얼굴들도 와서 반가웠는데, 마치 옛날 살던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감사를 하면서 우리가 몹시 어려울 때 도와주신 캐나다 김 사장님의 이름을 말하곤 했다며 다시 보고 싶었다는 정겨운 마음을 들려주었다.

                      

                      

이 공장은 지금 중국 훈춘에 있는 중국 회사에서 하청을 받으면 원단이 부산에서 직접 들어와 가공하는 일거리가 많아져서 어지간히 살 만하다고 한다. 부산에서 보낸 겨울 잠바 속들이 방금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느라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 만들어진 빵들을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했고, 처음 이런 빵을 먹어 보는 안내원 친구들도 맛이 있다고 좋아들 했다. 그동안 지원하면서도 자주 와 보지를 못 했었는데 이렇게 함께 만들어 먹으면서 웃음을 나누어 보니 보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 어려운 가운데 있는 동포들을 도울 수가 있었던 것은 보람 있는 일이었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우리는 아쉬워하는 그들과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가까워져 오지만 어느 사람 하고도 속마음의 이야기를 나눌만한 사람은 없었다. 떠날 때가 되어서인지 가랑비가 죽죽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정겨워하는 분들을 뒤로하고 떠났다. 오는 길에 우리는 선봉에 있는 신체장애 노인들이 사는 곳을 방문했다. 이들은 명예(상이) 군인들로서 외로운 삶을 보내고 있었다. 안내원들은 이분들에게 얼마의 양식을 보내 줄 것을 나에게 청했다. 나는 생각해 보겠노라고 했다. 국가에서 자립하여 먹고살라고 수공업 공장도 세워주었지만, 지금은 원자재도 없고 일거리가 없어서 놀고 있는지가 오래되었다고 했다. 장애인들을 포함한 공원들은 약 100여 명이 되고 딸린 전체 수는 한 5-600여 명이 된다고 하였다. 이곳도 도와주어야 할 절실한 곳이라고 느껴졌다. 우리가 조선 변경 원정에 도착할 때까지도 비는 내리고 있었다. 두 안내원 가운데 한 사람은 우리 출국 수속을 위하여 우리 여권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다른 안내원과 그동안 나누어 보지 못한 말들을 많이 나누었다. 그는 나하고만 있을 때는 곧잘 속에 있는 말도 해 주곤 해서 좀 정이 드는 젊은이였다. 그의 모든 친절이나 대화는 오로지 조국을 위하려는 것이어서 대견스러웠다. 그는 나에게 자기들이 외국인들을 위해 안내원 노릇을 하고 싶어서 하겠습니까, 하면서 우리도 피곤하고, 또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이것이 이곳의 질서이기 때문에 이해해 달라고 청했다. 안내도 혼자는 안 되고 꼭 둘이서 하는 것이 질서라고 했다. 오늘은 다음에 들어오실 때 부탁이 있다고 했다.  무엇이냐고 했더니 전자수첩 두 개 그리고 무역 영어와 한영 영한사전을 갔다고 달라고 청했다. 나는 그에게 이런 책들은 모두 한국 책인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전문 서적은 괜찮다고 했다. 나는 다음에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어려운 형편 등을 솔직하게 말해 주기도 하고, 아직 기술이 남쪽보다는 뒤떨어진다고도 말하는 그에게서 우리는 아들 같은 정감을 느꼈다. 그러나 다른 안내원은 일체 개인적인 말은 하지 않았고 공적인 이야기만 나누어서 대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이번 조선 일정을 마치면서 새로운 여러 가지 간접 선교의 차원에서 후원하면 좋겠다는 자료를 얻었다.
 

라진 정부는 우리에게  라진시에 복지사업이나 사업 투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모시고 와달라고 하면서, 언제든지 연락하면 입국을 허락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 주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나는 마치 에이전트같이 조선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소개해서 여러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는 특혜를 누렸다. 그렇게 하여 조선 라진은 일곱 번이나 드나들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분을 모시고 들어가서 라선 당국 자들과 만남을 자리를 만들었다. 그들은 여러 종류의 사업들을 우리 손님들에게 소개하면서 지원 협조를 부탁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원 사업이 연결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주로 우리에게 연결되는 분들이 목회자들이어서 마음만 한창이지 주관적으로 일을 저질러 할 수 있는 분들이 아니었다. 그저 조선을 경험해 보고자 하는 관광목적을 가진 분들 이어서 더는 이런 일들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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