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조망에 갇힌 나라
바다로 내려가는 중턱에는 녹슨 고압선 전깃줄이 걸려 있는 철조망이 길게 뻗어 있어서 기분이 섬뜩했다. 박 대표는 남조선 특무(간첩)들 보다는 여기 사람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쳐 놓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나마 지금은 전기가 없어서 사용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온 나라가 철조망으로 둘러 쳐져 있어서 마치 조선은 철조망에 갇혀있는 나라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자기 백성들을 막기 위한 철조망이라니 한심하기만 했다.
해산금 해수욕장
아침 식사를 하고 호텔 라운지에 잠시 앉아 있자니 호텔에 속한 여성들이 모두 흰 운동복에 흰 모자를 쓰고 먹을 음식들을 들고 어디론가 가는 것 같아서,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일부는 산으로 일부는 바다로 간다고 했다. 어저께 경축 절은 경건하게 보내고, 휴일인 오늘은 여가를 즐기는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방값을 내러 갔더니 234원만 받는다. 시설이 나빠서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한 말 때문에 싸게 해 주는 것 같았다. 8시 반 공장에서 지배인을 데리고 일행들이 여관에 왔는데, 생각밖에도 오늘 우리도 바다로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8킬로 정도 달려서 산등성이를 넘으니 산 계곡을 타고 아름다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가는 해산금 해수욕장은 그동안 통제구역으로 되어 있다가 금년에 풀린 곳이라고 한다. 차를 언덕에 놔두고 가스통, 솥과 음식물들을 나누어 들고 한 500미터를 내려가니 하얀 모래밭과 푸른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모래, 바닥에 부엌을 만들고 음식을 만들 준비를 하였다. 우선 더운 몸들을 식히려고 바다에 들어가 한참을 신나게 놀았다. 나는 해산물을 좀 살 수 있을까 하여 돌아보니 저 멀리한 2킬로쯤 떨어진 바닷가에 집들이 보여서 걸어갔다. 어촌은 10여 호 정도 되었다. 모래 불에서 한 분을 만나 해산물을 좀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어저께 쉬어서 잡은 고기도 조개도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바다 저만큼 조개 잡는 조그마한 배가 보여서 헤엄을 쳐서 가서 보니 아바이(노인)와 아들 같은 젊은이가 노를 저으면서 갈퀴를 끌면서 백합을 건져내고 있었다. 방금 건져낸 백합 조개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는 바닷가로 나와서 돈을 가지고 박 경리를 데리고 배로 헤엄쳐 갔다. 아바이는 우리를 배에 타라고 하였다. 우리는 백합 조개 하나에 조선 돈으로 5원씩 하여 150개를 샀는데, 중국 돈으로는 30원(U$4) 정도 되었다. 나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싱싱한 백합을 깨어 먹는 즐거움을 누리는 동안 배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왔다. 내가 뱃삯이라고 20원을 주었더니 얼마나 고마워하고 좋아하는지.
박 대표는 백합을 갈라서 양념 고추장을 발라서 모두가 먹기 좋게 해 주고 있었다. 공해가 없는 이곳의 백합은 정말 맛있었다. 공장 지배인은 바로 바닷가에 살면서도 7-8개의 백합을 먹고는 평생에 이렇게 많은 백합을 많이 먹어 보기는 평생 처음이라고 했다. 바닷가에 살면서 어떻게 그렇게 못 먹어 보았느냐고 물으니, 그는 우리는 이런 것을 마음대로 먹기가 쉽지 않다고 대답한다. 나는 오래간만에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렸다. 중국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이 넓은 대양에서 시원하게 풀고 있었다. 나는 바다에서 하나님께 아름다운 우리 조국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리고 이 반쪽 조국을 위해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음식이 다 되어서 모여 함께 먹으면서 나는 지배인과 이곳의 실정들을 좀 더 알기 위하여 대화하는 가운데, 그는 지금 우리가 대단히 곤란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잠시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내가 어저께 연회에서 말한 자선 사업의 하나로 빵 또는 국수 공장 이야기를 하니까 그는 시에서 절대적으로 환영할 것이라면서 관계자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했다.
마침 지배인이 입고 있는 팬티에 백양 상표가 붙어 있어서 남조선 것이라고 말했더니 안보는 데서 입는 것이야 어떠냐고 대답했다. 사실 여기서는 한국 상표가 붙은 옷을 입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여기서는 한국 옷을 입을 때는 상표를 떼고 입어야 한다고 한다. 내가 여기 올 때 한국 옷을 가져오려고 하니까 상표를 떼고 가져오라는 했다. 지배인은 나와의 대화 가운데 그는 솔직하게 마음을 열지 않고 소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데 대하여 답답할 지경이지만, 그의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는 말할 때마다 지금 형편은 잠시 어렵지만, 곧 괜찮아질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토를 다는 것을 빼놓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표현이 ‘우리 식대로 산다’라는 그들의 자존심의 한쪽을 볼 수가 있었다. 모두를 데리고 바다에 들어가서 가볍게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기었다. 중국서 온 직원들은 드넓은 바다와 밀려오는 파도가 신기한지 감탄하면서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바다는 먼 데까지 얕아서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이 놀기가 좋았고, 가벼운 파도는 물 장난치기에 잘 어울렸다. 가을의 햇살은 그리 뜨겁지 않았고 가끔 불어주는 바람결은 우리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저쪽 바위 옆에 어른 셋과 아이들 서넛이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도 점심을 준비하고 있어서 무엇을 먹으려고 하는지 궁금하여 슬슬 가는데 아이 하나가 바닷물에 빠져 늘어져 있지 않은가! 아이들이 고함치는 소리에 나도 달려가는 데 더 가까이 있던 어른이 들어가서 건져내 모랫바닥에 내려놓았다. 혹 인공호흡이라도 해 줄까 하여 달리는 데 한 어른이 여러 번 가슴을 누르자 아이가 재채기하면서 물을 토해 내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아이 아버지가 아이를 안고 기뻐하고 있었다. 이분들은 시에 근무하는 직원들이었다. 우리가 있는 이 넓은 바닷가에는 우리와 이분들만 있어서 해수욕장은 너무 조용하기만 했다. 중국 공장 남자 여자 직원들이 헤엄을 칠 줄 모른다고 가르쳐 달라고 하여 한 참 가르쳐 주느라 웃고 웃는 시간을 보냈다. 해는 3시를 지나고 있었다. 한 번 더 바다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우리는 더 머물고 싶은 바다를 떠나야 했다. 언덕을 올라와서 북쪽으로 향한 산등성이를 오르니 여기서부터는 출입금지 구역이라고 하면서 더 가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 인민군 한 사람이 앉아서 쉬기에 가까이 가서 그가 옷깃에 달고 있는 계급장을 물으니 하전사(하사)라고 한다. 북쪽으로 뻗어 있는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린 산기슭의 구불구불한 해안선 사이사이에 보이는 모래밭들과 이어진 푸른 바다는 한 폭의 그림으로 아름다운 자연의 신비를 가득히 담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푸른 산 그리고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조선의 바다는 아름다웠다. 이 바다를 개방한다면 관광수입도 엄청날 텐데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지배인과 팽 사장을 보내고 우리끼리 김일성 주석 부자가 와서 현지 교시를 했다는 집을 가보았다. 조선은 위대한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지도자가 방문한 곳은 사적지같이 보존하며 말씀한 것을 기록하여 말씀 판을 만들어 세워 기념하고 있다. 우리가 머무는 공장의 한 건물도 다녀간 곳이라 하여 기념 간판을 걸어 놓고 있었다. 오는 길에 도문시 밀가루를 싣고 온 트럭을 보았는데 뒤쪽 두 포대가 칼로 찢어져 있어서 밀가루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자유 시장에 들러서 구경했다. 고기 시장에는 많은 종류의 신선한 해산물들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음식들을 만들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작은 접시에 담아 팔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식욕을 일으킬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중국서 온 밀가루, 쌀, 그리고 옥수숫가루 자루를 열어 놓고 파는 장사가 몇 사람이 있었다. 큰 창고 안에는 판매대가 있어서 온갖 장사꾼들이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중국산 신발, 양말, 옷 종류, 비누, 치약, 칫솔, 살림 도구, 전기, 등 모든 물건이 중국 것이어서 중국이 조선을 입히고 먹여 살리고 있었다. 품질이 좋지 않은 작은 사과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10여 명이 되었다. 그리고 흰 줄이 두른 엿으로 만든 눈깔사탕들은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이 엿 사탕이 지금 이곳에서는 최고의 것이었다. 떡 파는 아주머니들도 몇 사람 있었다. 나는 문구류를 파는 가게에서 옥수수와 볏짚으로 만든 공책을 여러 권 샀다. 이때 조선은 원자재 부족으로 몹시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날그날 조선 방문기를 여기에다 썼다.
라진항
라진 털세
저녁은 팽 사장이 털 게를 좋아해서 여기에 오면 꼭 먹고 간다고 하며 한 마리 사 왔는데, 그 머리는 한 뼘이 될 만큼 컸다. 내가 영덕 게같이 큰 게를 여러 마리 사서 삶아 놓고 함께 먹으면서 또 한 번 바다의 진미를 즐겼다.
나는 나진 사람들의 밤 생활을 보고 싶어서 거리에 허 군과 나갔다. 라진에는 세 개의 호텔이 있는데 각각 노래방들을 가지고 있었다. 외국인 전용 지역에는 층집(아파트)들이 있고 거기에 식당과 노래방과 일용품과 선물용품 가게가 있었다. 노래방들은 외국인들을 위한 것으로, 내국인은 경제 형편상 이런 곳에 올 형편도 아니거니와 자본주의 부르주아(bourgeois) 문화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외국인이라고 해야 중국에서 온 장사꾼들이었다. 그저 돌아보고 우리는 허 군이 알고 있는 밥집으로 갔다. 우리 다섯은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저 가벼운 몇 가지를 시켰다. 허 군이 주인아주머니와 잘 알고 있어서 잘해 주는 것 같았고, 안내원(접대부)이 새로 왔다고 소개하는데 붙임성이 있게 생겼다. 밥집은 방 두 개로 알게 모르게 영업을 하고 있었다.
얼마 뒤 옆방 손님들이 떠나고 나니까 주인아주머니 요리사 봉사원 그리고 우리 다섯 사람과 여덟 사람이 마치 한 식구들 같이 어울렸다. 주인도 몇 가지 음식을 해와서 나누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사람들과 인간적인 사귐을 가지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허 군이 안내원에게 노래를 시켜서 조선의 이름난 “피바다”의 주제가 “꽃 파는 처녀”와 여러 조선 노래들을 들을 기회를 가졌다. 노래들 가운데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지도자를 흠모하는 내용이 꼭 들어 있었다. 모두 차례대로 노래하고는 이제 내 차례라고 손뼉을 치면서 청하는데, 나는 이곳에서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갑자기 감도 잡히지 않았고 좀 당황스러웠다. 생각 끝에 한국전쟁 때 초등학교에서 배운 노래가 떠올라서, “장백산 줄기줄기...”를 아느냐고 물으니, 김일성 빨치산 혁명가란다. 북조선이 한국을 쳐 내려올 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고, 우리 학교에는 인공기가 올라가면서 삽시간에 인민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빠르게 북조선 노래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어린 학생들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세월이 반세기가 흘렀고 기억하고 연습한 것도 아닌데 그때 얼마나 단단히 배웠으면 조선 국가와 빨치산 혁명가 첫 절을 외우고 있으니 나 자신도 놀랐다. 머릿속 어디엔가 묻혀 있던 것이 때가 되니까 서슴없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모두 내가 그 노래를 안다고 좋아들 하여서 함께 부르자고 하였다.
빨치산 혁명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국
오늘도 자유 조선 꽃다발 위에, 역력이 비춰 주는 거룩한 자국
아- 그 이름도 빛나는 우리 장군님,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님,
함께 신나게 부르고 나니 앙코르 하면서 또 노래를 하라고 청한다. 나는 그분들에게 이런 자리에서 조선 국가를 불러도 되느냐고 물으니 된다고 했다. 역시 첫 절만 기억이 나서 또 함께 부르기로 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의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역사에 유구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 린의 이 영광
몸과 맘 바쳐서 이 조선 길이 받드세
그런데 조선 사람 가운데는 자기네 국가를 제대로 못 부르는 분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동무들, 국가 가사를 잘 모르는 것을 보니끼니, 주체사상 교육이 제대로 잘 안 되어 있구먼, 당에 회보 해서 사상 교화를 받도록 해야겠다고 했더니, 모두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 올 때 가사를 적어서 바치도록 하라고 했다. 나는 조선에 있는 동안 듣기에 좋았던 피바다의 주제가 “꽃 파는 처녀”를 배웠다. 내가 너무 열정적으로 배우니까 함께 온 조선족 여직원들이 잘 가르쳐 주었다. 꽃 파는 처녀라는 영화는 위대하신 김일성 장군께서 조선을 해방하시기 전에 조선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여 주면서, 장군님의 영도로 조선이 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선전 선동의 내용이었다.
꽃 파는 처녀
꽃 사시오 꽃 사시오 어-여뿐 빨강 꽃
향기롭고 빛깔 고운 아름다운 빨강 꽃
앓는 엄마 약 구하려 정성 다해 가꾼 꽃
꽃 사시오 꽃 사시오 이 꽃 이 꽃 빨강 꽃
꽃 파는 처녀"는 1930년도에 김일성 주석이 중국 길림성 장춘 일대에서 혁명 사업을 할 때 만든 가극인데 1972년 김정일 위원장이 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나는 우리의 만남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다 함께 손에 손을 잡고 고향의 봄을 부르자고 청하였더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우리는 일어나 손에 손을 잡고, 조용하게 고향의 봄을 부르기 시작하는데, 일절이 끝나기도 전에 노랫소리가 촉촉해지면서 눈시울들이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노래가 마쳐지자 모두 숙연해졌고 마주 보는 눈길들에는 표현하지 못하는 아쉬움의 촉촉함이 젖어 있었다. 만일 이때 누군가가 한 사람이라도 흐느끼기만 한다면 눈물바다를 이룰 것만 같았다. 고향의 봄이 2절까지 계속되는 동안 내 마음에는 사상과 국경을 초월한 하나 된 것 같은 감정을 진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이럴 때 기도하고 마치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하여서 아쉬운 마음이었다. 이때 박 대표는 우리가 서로 국적은 다르지만 우리는 영원히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힘주어 말할 때 모두 손뼉을 쳤다. 사실 우리 8명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조선, 중국, 그리고 캐나다 세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안내원이 부르는 “반갑습니다”라는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우리는 자리를 떠났다.
반갑습니다
1.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2.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정다운 그 손목 잡아봅시다
얼싸안고 좋아 웃음이요 조국 위한 마음 뜨거우니
절 싸안고 좋아 눈물일세 통일 잔치 날도 멀잖았네
<후렴>
오오오오오오오오 늴리리야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국경절이 끝난 밤거리 가로등은 이제는 켜지지 않아서 시가지는 어둠에 깊이 잠겨 있었다. 전력이 부족하여 조선에서 유일하게 외부로 개방한 무역도시의 밤길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밤하늘에 길게 뻗은 은하수와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이 유난히 밝았다.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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