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진시
라진은 병풍같이 두르고 있는 재양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해 뜨는 동해의 푸른 바다를 안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바닷가로 나가려는데 약간의 가는 비가 또 내리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이 차를 가지고 아침 바닷바람을 쐬려고 나왔다. 어저께 바다에서 먹었던 백합은 지금 여기서 한 개 10원씩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앞쪽에 있는 마을을 돌아 지나서 버려진 수영장이 보여서 가보니 물이 없는 수영장에는 누더기 같은 덮을 것에 비닐을 그 위에 덮고 남녀가 자고 있었고, 3∼4살 되어 보이는 두 남자아이들이 일찍 일어나서 머리맡에서 놀고 있었다. 저 가족은 밤에 내리는 비를 비닐로 가리고 지낸 것이다. 마침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서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어도 아무것도 줄 수가 없었다.

꽃제비
라진 호텔 식당에서 주는 아침 음식은 남산여 관보다는 좋았다. 허 군과 공장으로 돌아오니 오후 3시경에 부시장과 공업 국장이 나를 만나러 온다고 전해 주었다. 우리는 오전에 안내원들과 함께 자유 시장에 갔다. 생선 시장을 도는데 꽃 재비(소매치기) 아이들이 내 주위를 돈다. 나도 신경을 쓰면서 한 모퉁이에서 무엇을 보려는 순간 티셔츠 윗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려는 꽃 이의 손을 순간적으로 쳤는데 일 원짜리 네 장이 땅에 떨어졌다. 아침 호텔에서 받은 잔돈 14원을 넣은 것인데 아이들이 그것을 노린 것이었다. 그들의 남루한 모습을 보면 그냥 줄 수도 있지만, 지도원이 말리고 한번 주면 계속 달라붙기 때문에 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서 온 사람들 주위에는 아이들이 언제나 줄줄 따라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가 있었다. 불쌍한 내 동족의 어린 새싹들이 비참한 삶의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내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6.25 전쟁 뒤의 비참한 한국의 모습이 주마등같이 스치고 지나간다. 시장 세금을 내기 싫은 사람들은 바깥 길가에서 검은 돌배와 삶아서 빨간색을 띤 작은 바다 게들을 자루에 담아 팔고 있었다.
라진시 간부들과 만남
오후 3시경 나선시 경제 공업 담당 부시장과 국장이 와서 지배인 사무실에서 중국 총 경리와 현지 경리 그리고 지배인 나 이렇게 자리를 함께하였다. 먼저 부위원장은 나의 인적 사항을 묻고는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무슨 사업을 하고자 하느냐고 묻기에 나진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일단 돌아보려고 왔다고 하면서 필요한 사업 종목들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제안을 했다. 그는 현재 수요 되는 항목들이 신발, 철 연장들, 문구류, 가방, 플라스틱 제품, 통조림, 그리고 우산 공장의 필요를 열거했다. 그리고 부시장은 내가 이미 지배인과 나눈 빵 공장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우선 이 공장 공원들의 점심 한 끼니라도 해결해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크게 도움이 된다고 말하면서 많이 만들어서 나머지는 팔아서 운영에 보태 쓰면 되지 않느냐고 은근히 제안한다. 나도 생각해 보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나진에는 두 개의 자선 단체가 있다고 소개해 주었다. 미국에서 와서 하는 “아가페 한마음의 집”에서 운영하는 빵 공장과 J. T. S.라는 단체에서 하는 영양 우유 공장이 있다고 소개하여 주었다. 빵 공장은 하루에 1.2톤씩 속이 들지 않은 찐빵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공급하는데 처음에는 무상으로 주다가 지금은 한 개에 1원씩을 받는다고 했다. 영양 우유 빵 공장에서는 한 달에 4톤 정도를 만들어서 유치원 등 주로 영아들에게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부시장은 회의가 끝나는 대로 과장과 함께 자선 단체들이 하는 공장을 가보라고 권하여 주었다. 지배인이 분위기가 무거워지니까 나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권해서, 나는 그에게 만약 우산을 생산하면 우리가 평양이나 원산 같은데 지점을 두고 시장 개척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부시장은 그렇게는 안 되며 정부가 여기에서 사서 공급하게 된다고 말했다. 짐작하고 있는 일이지만 한 번 더 확인해 본 것이다. 그리고 부시장은 지배인에게 공장 시설은 넓은데 일거리는 없고 하니까 무엇이든지 유치해서 공원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 보라고 조언하면서, 나에게 여기에 건물도 많고 땅도 넓으니까 빵 공장도, 우산 공장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라고 권해 주었다. 내가 여기는 땅 1㎡에 얼마냐고 물으니 미화 30불이라고 했다. 그리고 현재 15만 인구를 2005년까지 인구 100만 도시로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그의 이 말은 2005년이 지나도록 이 계획은 아직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리고 부시장은 대화의 방향을 중국 합자 회사의 총 경리에 공장이 잘 돌아가도록 협조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말을 받아서 현지 대표가 지난 2년 동안 여러분이 아무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합동 서(계약서)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항의를 하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합동할 때 외국 사람들의 안전을 위하여 거주할 집을 지어 주기로 했던 모양인데 돈이 없어서인지 2년 동안 지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팽 사장은 이번에 1만 벌의 옷을 만드는 동안에는 정전이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특별히 주문하고 있었다. 그는 메모하고 있었다. 또 그는 외국 업체를 유치하자면 우선 통신 시설이 편리해야 하는데 그동안 쓰던 전화도 다 불통이 되어서 경쟁 입찰에 1초를 다투는데 현지와 연락이 안 되어 어떻게 사업을 하겠느냐고 불평을 하자, 그는 얼마 전에 태국 통신회사에서 지금 핸드폰 중개 탑을 건설 중이어서 곧 개통될 예정이라고 말하면서 조금 기다려 달라고 하며, 지금 노선 공사로 전화가 일방적으로 바뀌어서 우리도 혼돈하고 있다고 양해를 구하면서 이달 말경에는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한 시간 정도의 회합이었다. 그분들은 그저 사무적이고 무엇인가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만 늘어놓고 있을 뿐 인간미는 전혀 없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중국 관리들같이 캐나다는 살기가 어떠냐, 가족은 몇이냐, 고향은 어디냐 등의 개인적인 관심에 관한 대화는 전혀 없는 것이 달랐다. 회의를 마치고 과장과 함께 바닷가에 있는 수산 공장 안에 있는 빵 공장과 영양 우유 공장을 가보았다. 이 빵공장은 미남침례교가 운영하는 것으로 하루에 만개 이상의 빵을 만들어 점심시간에 라선시의 모든 중 고등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주먹보다도 더 큰 빵은 캘리포니아 건포도도 박혀 있어서 배고픈 학생들의 한 끼니 요기는 되었다. 국장은 나에게 이제 라선시에 있는 모든 소학교 학생들에게도 하루 한 끼니 빵을 만들어 먹일 필요성을 말하고 있었다. 이 큰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연구해 보기로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산책하려고 나섰다. 산등선 넘어 라진 시내로 가는 길을 따라서 가니 큰 마을들이 골짜기마다 있었다. 산등성이에는 옥수수밭으로 덮여 있었지만, 옥수수는 그리 잘되지는 않았다. 종자 개량이 없고 비료도 충분하지 못한 것이 문제인 것 같았다. 어디를 가나 옥수수밭에는 원두막들이 있어서 지키고 있었다. 외지에는 군인들이 지킨다고 한다. 동네를 돌아보면서 나를 궁금하게 한 것은 연기가 나는 집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돌아와서 물어보니까 여기 사람들은 저녁 생활이 없으니까, 전기가 없는 데다가 볼거리도 없으니까 저녁이 되면 일찍 자고 아침 4시면 일어나서 밥 지어먹고 6시면 일하러 가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중교통이 없는 이곳은 먼 길을 걸어야 하므로 일찍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장의 몇몇 직원들도 매일 4㎞가 넘는 길을 걸어서 출퇴근하고 있었다. 자전거가 있으면 편하겠지만 여기서는 자가용과 같은 것으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전에는 선봉을 가보기로 하였다. 선봉은 라진 시에 속하는 곳으로 12㎞ 거리에 있었다. 가는 길은 도로 공사를 하고 있어서 몹시 나빴다. 도로 공사에는 군인들이 동원되고 있었다. 길에는 사람들이 자루에 끈을 맨 배낭들을 지고 라진 쪽으로 가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다. 선봉은 주로 유조선 같은 배들이 들어오는 곳으로 미국의 원유도 이리로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은 원유가 들어오지를 않아서 정유공장이 쉬고 있었다. 그 옆으로 화력 발전소가 있는데 굴뚝에 연기 난 지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선봉에는 김일성, 김정숙, 김정일 세 장군의 어록을 적은 판이 아주 길게 나란히 세 개가 서 있었다. 저 판에 새겨진 저 많은 글씨를 과연 누가 다 읽어보기나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더 많은 사람이 등짐을 지고 가고 있었다. 등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이었다. 무엇을 저렇게 지고 가고 오는지 궁금하기만 하였다. 배낭 안의 짐은 산야에서 거둔 먹을거리들과 팔 물건들을 라진으로 팔려고 나가고, 팔아서 먹을 양식이나 필요를 사서 돌아가 고들 있었다. 물론 그 가운데는 마을에 가서 팔 물건들을 사 나르는 보따리 장수도 있었다. 젊은 여자들은 무거운 등짐에 흐르는 땀에 길 먼지에 얼굴들은 몹시 꾀죄죄하고 피곤들 해 보였다.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여기도 여성들이 가족의 생명을 책임지고 매일 혹사를 당하고 있었다. 한 여인이 다 헤어진 산달을 신고 머리에 보따리 하나를 기고 4-5살 된 아기 손을 잡고 걷는데 아기가 신발을 신지 않은 채 자갈길을 걷고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중국에서 합자한 공공 버스가 드문드문 다니는데 사람들이 꽉꽉 차 있었고, 트럭 위에도 사람들이 위험할 정도로 가득히 타고들 다니고 있었다. 그것마저도 아껴야 하는 사람들은 걸어야만 했다. 원정서 라진까지 40Km인데 그 정도 걷는 것은 이제 모두에게는 숙달된 일로 보였다.
음식점
나진에 돌아와서 외국인들을 위한 서점이 있어서 들어가서 책과 기념품들을 돌아보았다. 오늘 점심
은 내가 청하면서, 이곳 사람들이 드나드는 평범한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허 군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내가 원하는 곳은 아니었다. 내가 지나다가 길가에서 본 국수라고 써 붙인 집을 가보고 싶었던 것인데, 양고기구이를 먹으면서 나는 최 선생에게 조선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한 곡 청하라고 부탁했다. 주인에게 부탁하자 부엌에서 얼굴이 울퉁불퉁하게 생긴 아가씨를 데리고 나왔는데,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영원한 미소”라는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였다. 노래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부르면서 감정이 격한지 눈물을 흘리면서 삼절까지 부르는데 나는 마음이 찡해짐을 느꼈다. 나는 도대체 그 영원한 미소가 무엇이기에 저렇게 눈물을 흘리는가 싶어서 가사를 적어 달라고 했다. 적어 온 가사를 읽어보니 “위대한 수상의 미소"라는 내용이었다.


조선의 백성들은 "쌀은 곧 공산주의"라는 말과 같이 이밥에 소고깃국을 먹는 그날을 바라보면서 허리를 동여맨 채 굶주림과 억압 속에서 날마다 중노동에 내몰리는 고생들을 자애로운 수상의 미소로 위로를 받으며 살아온 것 같았다. 오후에는 라진 기차역을 가보았다. 여자 역원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동료 역원의 얼굴을 살피며 꾸물대더니 시내 쪽으로 찍으라고 대답한다. 박 대표에게 이 말을 하니 물어보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냥 찍으면 되는데 물어보았기 때문에 역을 찍으면 안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맞는 것 같다. 중국같이 무조건 찍고 나서 뭐라고 하면 몰랐다고 하면 될 일을..., 마음이 좀 얼어 있기 때문이었다. 자기는 가서 그냥 찍는다고 말하면서 다음에 오면 내가 그냥 찍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청진 가는 길로 가다가 언덕 위에 오르니 라진 항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박 대표에게 청진을 가보았느냐고 물으니 한번 갔는데 마음대로 다니게 못 해서 갇혀 살다가 왔다고 했다. 조선은 특별한 때 외에는 외국 사람에게 개방 지역인 라진-선봉 밖으로는 나가도록 허가하지 않고 있었다. 왜 그럴까? 하는 많은 상상을 하게 해 주었다. 돌아와서 나는 떠나기 전에 이 공장의 당 비서와 지배인과 간부들을 청해서 음식 대접을 한번 하고 싶다고 했더니, 박경리는 아마 당 비서는 안 올 걸요 하면서, 내가 여기 온 지 2년이 되는데 당 비서는 자주 직장에서 만나지만 빈 인사라도 놀러 오라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단다. 그는 덧 붙여 외국 사람을 만나는 것을 조심한다고 했다. 나중에 어떤 비판받을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리를 지키느라 조심하고 경계한다고 했다. 지나 9.9절 때 텔레비전으로 평양의 행사를 보느라 나와 함께 당 비서 집을 가 본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또 여기 보통 사람들도 개인적으로 외국 사람 만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사람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개인 집을 방문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시간이 좀 있어서 혼자 정문 쪽에 갔더니 마침 운동회 때 아이 사진을 찍어 준 여공이 임시로 수위를 보고 있었다. 마침 단둘이라 남편은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니, 멀리 가 있다고 했다. 멀리 라면 어디냐고 물으니, 아주 먼 데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밝지는 않았다. 월급은 제대로 받느냐고 물으니. 머리를 흔들면서 아니라고 대답했다. 사정을 물으니, 올해 아홉 달 동안 두 달 치도 적게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느냐고 물으니 부모님과 함께 사는데 그럭저럭 먹고 산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오므로 해서 더는 말을 나누지 못했다. 나중에 박 대표가 나에게 저 여공의 남편은 광산에서 일하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는 한 방에 모여서 북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사 경리를 하는 신양이 머리를 감는다고 옆방으로 가더니 갑자기 ‘니깐썸머(뭐하는 거야)!’ 하는 큰 소리가 들려서 우리는 뛰어나갔다. 도둑이 방 뒤 창문 유리를 깨고 유리를 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사실은 낯에 방이 어두워서 커튼을 걷어 놓고 다시 내리지 않아서 창문 가까이에 있는 여직원의 핸드백과 가방들을 노렸던 것이다. 가까이에 경비실이 있었지만 경비원은 자리에 없었다. 공장 안이 한 번 비상이 걸렸다. 사실 그 핸드백에는 우리 모두의 여권과 회사의 돈도 들어 있어서 잃어버렸으면 큰 일 날 뻔했다. 이 공장의 집들은 소련 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인데 모든 창문에는 안으로 쇠창살로 되어 있고 안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쇠창살 앞문을 걸곤 해서 분위기가 살벌하고 마치 감옥 같은 기분을 들게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지배인이 달려왔다. 엊저녁에 시내 회의에 갔다가 늦게 와서 오지 못했다고 사과를 했다. 박경리는 사람이 버젓이 있는 집에 도둑이 드는 이런 집에 계속 살게 하고 있다고 평소의 불만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세숫대야고 무엇이든지 밖에만 내어놓으면 없어지고 있는데 언제 돌이 날아들지 모른다고 다그치고 있었다. 지배인은 예산이 없어서 못 해 드리는 걸 난들 어떻게 하겠느냐는 하소연에, 대표는 그래도 당신들 할 일은 다 하고 있지 않느냐고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지배인은 현금을 더 얹어 주어도 시멘트를 사기 힘든데 우리에게는 현금이 아니라 돈표가 나오기 때문에 사기가 어렵다는 사정을 말하는 지배인도 딱하기만 했다. 나는 그들의 화제를 좀 바꾸어 보려고 지배인의 부인은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좀 망설이는 듯하더니, 일 나간다고 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말이 없다. 그러자 박 대표가 시장에서 장사한다고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장사하는데 왜 그렇게 말하기를 주저하느냐고 물으니, 박 대표는 이 사회에서는 장사한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고 말해 주었다. 정말 그러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다. 특히 당에서 일하는 일꾼들 일수록 장사를 천하게 생각한다고 하며, 그래서 부인이 장사하는 사람들은 쉬쉬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의 표어들
조선은 표어의 나라이다. 거리마다 직장마다 어디든지 표어를 쉽게 볼 수 있었는데 매일 그 표어들을 보면서 매일매일 모으다 보니까 이만큼 모아졌다. 그 표어들을 살펴보면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좋은 내용도 있었다.
“우리 식대로 살자”
“가는 길 험해도 웃으며 가자”
“쌀은 곧 공산주의다”
“주체의 요구대로...”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최후 승리를 위한 강행군 앞으로!”
“밥에 돼지고기는 곧 공산주의이다”
“위대한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자”
“무역 제일주의 방침을 철저히 관철하자”
“우리의 영원한 운명의 수호자! 김일성 동지 만세”
“위대한 김일성 동지의 혁명 사상으로 더욱 철저히 무장하자”
“위대한 김일성 동지를 천세 만세 받들어 모시자”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해와 달이 다하도록 높이 받들어 모시자”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 동지를 따라 배우자”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을 위하여 한목숨 버리자”
“내 나라를 위대한 김정일 장군의 나라로 더욱 빛내자”
“비겁한 자는 떠나가라 우리는 붉은 기를 지키겠다”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 유격대 식으로”
“비좁은 집에 살아도 마음만은 넓게 가지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 끝없이 충직한 친위대, 돌격대가 되자”
“혁명적 군인 정신적으로 김정일 동지의 현지의 교시를 관철하자”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 중앙 위원회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고난의 행군에서 승리한 기세로 새 세기의 진격로를 열어나가자”
“수령 결사 옹위 정신이 행동의 구호 실천의 구호로 되게 하자”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신근 한 벌꿀이 될지언정 한가한 개미가 되지 말고, 나무가 되려면 청송이 되고,
돌이 되려면 바위가 되고, 사람이 되려면 영웅이 돼라”
(김정은 시대에 들어오면서 이런 표어와 구호들은 많이 사라지고 간단하게 되었다)
김일성과 김정숙의 전적비가 있는 재양산
나는 반쪽 조국에 있는 동안 좀 더 조국 산야의 모습들을 보고 싶어서 시간이 나는 대로 나들이를 하게 되었는데 공식적인 시간이 시작되기 전인 이른 아침 시간이 좋았다. 오늘도 이른 아침 김일성과 김정숙의 전적비가 있는 재양산으로 갔다.
전적비로 들어가는 길은 이른 아침에 벌써 깨끗이 쓰러져 있었다. 두 분이 이 산에서 라진을 탈환하기 위한 항일 작전을 성공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길가에는 마침 봉선화가 아름답게 피어 있고 씨들이 맺혀 있어서 씨를 좀 따고 있는데 관리인 같은 분이 나타나서 어디 계십니까? 하고 퉁명스럽게 묻는다. “여기 공장에 있쑤다” 하니까. “씨는 와 땁네까?” 하고 묻기에, 내년에 기념으로 심으려고 한다니까,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내려오면서 동네를 살펴보았다. 집체로 된 집들은 잘 정돈되어 있고 비질을 한 자국이 있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들이 중국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역시 우리 한 민족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집단으로 관리하는 넓은 배추밭에서는 농약을 뿌리는데 등에 분무기는 한 대밖에 없어서 다른 사람들은 그릇에 농약 물을 담아서 쑥 잎으로 적셔서 배추에 뿌리고 있었다. 집체 밭의 배추는 조그마한 데 개인의 텃밭에 배추는 세 배나 크게 자라고 있어서 비교되었다. 오전에 공장 안 길에서 지배인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는데, “김 사장님 빵 공장을 세워 주시겠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리고 지나던 지도원 동무도 가까이 왔다. “글쎄요, 지금 나로서는 이 공장의 형편을 잘 모르기 때문에 무어라 말할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나에게 여러분 사정을 좀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매월 기본 생활비는 주고 있느냐고 물으니, 지배인은 충분히 주지는 못하지만 조금은 주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얼마나 주고 있느냐고 물으니 원래 4000원(조선 돈)씩 주어야 하는데 요즈음 좀 어려워서 한 2500원(중국 돈 100원=$12 정도) 정도씩 주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라진에서 팔리는 중국 쌀이 1㎏에 조선 돈으로 70원 정도 하는데, 그 정도면 여기 실정으로는 기본 생활이 되는 데, 식생활 보조를 위한 빵 공장이 필요하냐고 하면서, 만일 기본 생활 형편도 안 되어 어렵다면 그것은 생각해 볼 만한 일이라고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지도원이 “아이, 지배인 동지” 솔직히 말해야지 하면서 실은 지금 2500원 정도도 못 주고 있다면서 어려운 형편을 나에게 시원하게 말해 주었다. 나도 이미 뒤로 다 듣고 있는데 지배인은 계속해서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있는 그의 현실도 이해해야만 했다. 지배인이 알아서 공장을 마음대로 결정하고 운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배인(공장장) 위에는 당 비서가 있고 공원들 가운데는 청년단의 젊은 당 비서가 있고 조직들이 만만치 않았다. 이 모든 정치적인 관계 속에서 지배인은 어떻게 하든지 공장을 잘 돌아 가게 해서 이 어려운 시기에 공원들과 함께 무사히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지만, 그러나 일거리가 없어서 공장을 돌아가도록 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아마 지배인은 밖의 도움이 절실하지만, 외국인과 접촉해서 말조심하느라 시원하게 속사정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있는 답답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저 두 끼니를 먹기가 어렵다는 것이 이곳의 현실이었다. 당 영도자들은 시로부터 직접 월급을 받고 있지만, 공원들은 생산이 없으면 월급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공장이 돌아가서 수입이 생겨도 먼저 시로 들어갔다가 그 가운데서 20%만 개인에게 돌아온다고 한다. 심지어 노래방 종업원의 팁까지도 바쳐야 한다고 한다. 모든 수입은 일단 국가로 들어갔다가 얼마큼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는 국가에서 국민의 모든 필요를 나누어 주다가 지금은 공급과 분배가 전혀 안 되기 때문에 살림이 어렵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두 살기 위해서 나라에 기대기보다는 개인이 나서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은 이 공장이 맡고 있는 길을 보수하기 위하여 여공들이 가야 하는데 준비된 트럭을 타고 8㎞나 가야 한다고 서둘고 있었다. 마침 지도원이 볼일이 있다고 데려다 주기를 청하여 내가 차를 운전하여 청진 가는 길 언덕 위로 갔다. 지도원은 나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바다를 보고 쉬고 있는데 얼굴이 익은 여공이 삽과 우산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길 수리하러 가느냐고 물으니, “나를 알아보세요?” 하고 웃는다. 왜 혼자 오느냐고 물으니, 아까 트럭을 놓쳐서 걸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맡은 구역이 어디냐고 물으니 바로 여기라고 한다.

마침 주머니에 사탕이 두 개가 있어서 하나씩 나누어 먹으면서 점심을 싸 왔느냐고 물으니 가지고 왔다고 한다.
무엇을 싸 가지고 왔느냐고 물으니 쌀밥이라고 한다. 왜 감자도 영양이 많고 맛도 좋은데 자주 먹느냐? 고 물으니 그는 “에이, 감자는 너무 먹어서 먹기가 싫어요.” 한다. 그의 밥 곽을 열어 보자고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못했다. 한 가정은 세 끼니를 먹기가 힘들다고 했다. 사실은 꼭 세 끼니를 먹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영양성분이 어떻든 두 끼니만 제대로 먹어도 다행인 것 같았다. 특혜를 받는 무역 개방 구의 실정이 이렇다면 다른 지역이야 어떠하겠는가. 여기는 함경도 산악지대여서 감자와 옥수수 생산이 많아 주식이 감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자도 알이 크고 충실하지 못하여 잘았다. 시장에서 감자는 1킬로에 35∼40원 정도였고 쌀은 70원 정도였다. 아주머니들이 자루를 메고 60리를 걸어가서 감자 이삭이나 여러 가지를 주어서 다시 60리를 걸어오는 이들의 삶은 얼마나 피곤한지를 상상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침 지도원이 볼일을 보러 갔다가 오고 있어서 그와는 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지도원이란 이 친구는 사실상 보위부(정보국) 직원으로 공장에 배치되어 외국인들의 동정을 감시하는 자라고 누가 나에게 일러 주었다. 그래도 그는 지배인보다는 유연하며 인간미도 있어 보여서 편했다. 나는 지도원에게 그동안 궁금해하고 있던 일을 물어보았다. 오다 보니 “쌀은 곧 공산주의다”라고 쓰여 있는데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는 씩 웃으면서, 광복 뒤에 너무 사는 것이 어려워서 김일성 주석께서 사회주의가 실천되면 모든 인민이 소고깃국에 이밥을 먹게 될 것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지도자들은 호의호식하면서 무지한 인민들을 채찍으로 사회주의 실천에 내몰고 있었다. 소고깃국에 이밥을 먹여주시겠다던 임은 어느 날 말없이 떠나가시고, 인민들에게 남겨준 것은 기약 없는 고난의 헹군 뿐이었다. (이 간판은 이년 뒤에 사라졌다)
나는 돌아오면서 여기 당 비서나, 지배인이 사업을 할 줄을 모르는 것 같다고 하면서, 중국의 영도자들은 사업가가 자기 지역에 오면 자리를 같이하여 음식을 나누면서 사업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서로 인간적으로 사귀려고 하는데, 여기 분들은 전혀 다르다고 은근히 한마디 해 주었더니, 그는 시치미를 떼고는, 왜 그렇게 하지 않던가요, 하고 은근히 나에게 도로 묻는다. 그는 나에게 한국 돈 1000원짜리 한 장과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준다. 나는 그에게 기념으로 그냥 가지고 있으라고 하자, 필요 없다고 한다, 내가 중국 돈 1원짜리 하나를 주면서 우리 서로 바꾸자고 웃으면서 주고받았다. 라진에는 차가 없으면 외국 사람은 움직이기가 어려운 곳이다. 택시라고 지프차를 중국 사람이 운영하고 있는데 비싸고 먼 곳에서는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중국식 인력거나 삼륜 자전거를 운행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여기서 그렇게 하는 것은 노동 착취라고 보기 때문에 그런 영업은 할 수 없다고 한다.
비파 해수욕장
우리 일행은 이름난 관광지인 비파로 떠났다. 나진서 선봉 가는 중간쯤에서 산을 넘어 바닷가로 오는데 한 12Km는 되었다. 비파 섬은 길을 돋우어서 뭍과 이어놓고 있었다. 바위와 바다가 어우러진 자연의 조화는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비파 해수욕장에 카지노와 호텔이 들어서서 외국인들을 위한 유람 지를 꾸리고 있었다.

김일성 낚시터
이곳에는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께서 친히 낚시하시던 곳이 있는데 마치 사적지 같이 낚시를 하시던 곳이라고 붉은 글씨로 쓰여있다.

여기에는 해산물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간이식당이 하나가 있다. 그러나 생선회 같은 것은 없고 성게, 섭, 조개, 말린 오징어 구운 것과 전복 또는 섭죽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전복죽과 함께 먹고 싶은 만큼 먹었다. 이곳 바다에는 물개들이 살고 있어서 외국 관광객들(모두 중국 사람들)을 위하여 배들이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언덕 너머 쪽 바다로 들어가서 돌들을 뒤집어 게를 잡으면서 한참 재미있게 놀았다. 또 여기는 차가 없으면 올 수 없는 곳이었다. 나오는 길가에는 어촌 사람들이 잡은 어물들을 길가에 늘어놓고 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몽금포 해수욕장
산언덕을 넘어서 신해리 해수욕장에 들렸다. 구름이 끼고 바람이 차서 수영을 할 수는 없었다. 몽골식 집들을 지어 놓고 있어서 몽금포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 우리는 나선 시의 좋은 해수욕장 세 곳을 다 돌아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전에 갔던 밥집에 들렀다. 저녁은 홍 사장이 내겠다고 하였다. 싱싱한 바다 굴과 소라 등 해산물과 단 고기로 된 저녁은 푸짐했다. 봉사원이 불러 주는 조선 노래 ‘휘파람은’ 우리의 식욕을 더 돋우어 주었다. 얼마 전 조선에서 유행한 최신가요 휘파람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경색돼가는 사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만든 정치선전적인 노래로 북한 주민들에게는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부른다고 한다.
휘파람
1. 어젯밤에도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
벌써 몇 달째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
갑순이네 집 앞을 지날 때 이 가슴 설레어
나도 모르게 안타까이 휘파람 불었네.
후렴
휘휘휘 호호호 휘휘 호호호
휘휘휘 호호호 휘휘 호호 하
아아아 휘파람.. 아아 휘파람
아아아 휘파람.. 휘휘 호호 휘파람
2. 한 번 보면은 어쩐지 다시 못 볼 듯
보고 또 봐도 그 모습 또 보고 싶네.
어젯밤에 밤샘을 했다고 생긋이 웃을 때
이 가슴엔 불이 인 다오 이 일을 어찌하랴.
3. 어젯밤에도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
벌써 몇 달째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
혁신자의 꽃다발 안고서 휘파람 불면은
갑순이도 내 마음 알리라 알아주리라.
밤 12시가 다 되어서 돌아오는 길은 캄캄하기만 한데, 김일성 초상화에는 환한 불빛이 있어서 캄캄한 밤을 외로이 밝히고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죽어서 벽에 그림으로 모셔진 신이 되어 이 어두운 밤을 지키고 있었다. 경축 절이 지난 시내 길은 칠 흙 같이 어둡기만 했다. 깊은 밤이고 어두운 밤인데도 차 불이 비추면 여전히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고, 남녀가 길 가운데 쪼그리고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놀라서 달아나는 모습들이 보였다. 나는 또 새로운 경험을 위하여 바닷가에 자리 잡은 라진 호텔로 옮겼다. 3층으로 지은 건물로 값은 같았으며 더운물이 항상 나와서 좋았다. 오늘은 허 군과 함께 쉬었다. 이른 아침 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돌아보기 위하여 공장 뒤로 나왔다. 직원들이 오고 나면 나에 대한 계획이 잡혀있고 또 낮에는 혼자서 나가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한 2Km쯤 가다가 보니 웅라 기차역이 나온다. 이 역을 막 지나면 재양산 밑으로 4Km 되는 굴이 있다고 한다. 철길 다리를 지나서 산 밑 동리 어구까지 갔다. 그리고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물에는 몇 여성들이 빨래하는데 검은색의 빨랫비누는 겨로 만든 것 같이 보였다. 한 남자가 가루분 치약으로 이를 닦고 있어서 내가 어렸을 때 써보고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하기만 했다. 나도 시원한 산골 물로 세수를 하였다. 산골짜기를 따라 논들이 펼쳐져 있고 행인들의 옷차림은 어디를 가든지 남루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역에 다시 가보았다. 농촌 역으로 낡은 역 건물에 6명의 역원이 역장의 호령에 따라 제식 훈련을 하고 있어서 군대 같았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이렇게 제식 훈련을 한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철로는 제2의 군대라고 한다. 역에는 기차를 타려고 몇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오전에 지배인과 우리는 자리를 함께하여 여러 가지 대화를 했다. 특히 박 대표는 지난 2년 동안 있으면서 이들의 사상과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어서 한마디로 데리고 놀고 있었다. 어떤 때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들의 허구와 어리석음을 빈정거리면서도 듣기 싫지 않은 대화로 잘 넘어가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지배인은 우리 공장이 현재 중국 쪽에서 일을 가져오지 않으면 일이 없는 실정이라고 하면서 어려운 실정을 나에게 말하면서 하루 점심 한 끼니라도 먹을 수 있도록 빵을 만드는 시설을 해 달라고 다시 간절히 부탁하고 있었다. 나는 가서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현재 이 공장은 중국에서 한국으로부터 일감을 맡아 삯품을 주는데 중국 쪽에서는 그 이득을 얻어먹고 있었다. 실제로는 중국 공장도 일이 없어서 쩔쩔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에 일을 주고 있는 것은 장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는 한국 부산에서 원단이 들어오면 라진 이 공장에서 만들어 Made in Korea의 상표를 달아서 다시 한국으로 보내면 한국에서 다시 수출하고 있었다. 이번에 생산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는 캐나다에 보낼 운동복에 Maple Leap Garden의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기계류들도 라진항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대우 굴착기를 싣고 가는 것을 보았다는데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조선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보면서 무엇을 느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마친 우리는 떠날 준비를 하였다. 며칠간 정든 얼굴들을 말없이 인사하면서 헤어져야만 했다. 당 비서와 청년 동맹 비서 그리고 지배인 등 여러 사람이 나와서 우리를 전송하여 주었다. 모두와 마음을 열고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반가운 분들이었고, 내 민족의 형제자매였다. 이들을 도와주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깊어지고 있었다. 처음 찾아온 조국에서의 한 주간 동안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고 듣는 경험을 하였다. 반갑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모두 어물들을 사고 싶어 해서 자유 시장에 들렀다. 한분 은 특별한 부탁을 받아 온 꿩 두 마리 사서 좋아하고 있었다. 나는 나누어 줄 이면수(새치)를 좀 샀다. 촌에서 잡아 온 것을 자루에 감추어 놓고 우리가 지나가면 꿩 산토기 등을 사라고 하고 있었다. 모든 분들이 사고 싶은 것을 모두 사서 좋아하는 모습들을 보고 우리는 원정으로 떠났다. 올 때는 밤에 와서 주변을 잘 볼 수가 없었는데, 갈 때는 주위를 볼 수가 있어서 좋았다. 9월 23일 훈춘 두만강 개발 회의 후 라진을 방문하게 되는 외국인들을 위하여 길을 수리하고 있어서 올 때보다는 길 사정이 대단히 좋아져 있었다. (유엔의 후원으로 중국, 몽고, 조선, 소련, 일본, 그리고 한국이 참여하는 두만강 삼각지 개발 회의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회의만 하면 무엇하는가, 조선이 한국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는 한 이곳의 경제 발전은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골골이 농가들이 보였고 밭과 골짝 논에는 황금 색깔이 짙어 가고 있어서 거둘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소달구지를 동원하여 길을 닦고 있는데 마차 바퀴가 타이어가 아니고 쇠바퀴어서 조선의 소들이 무척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닦는 남녀들과 손을 흔들면서 검문소에 닿았다. 나에게 만들어 주었던 출입증은 조선 출입국 관리소에서 도로 가져갔다. 다시 한번 짐 검사를 받고 두만강 다리를 건너는데,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님이 잘 가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