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라선시에 있는 공장과 김일성 주석의 생신인 4월에 빵을 만들어 내기로 했지만, 우리 쪽이 재정이 준비되지 못하여서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6월에 들어서서야 자금이 허락되었다. 사실은 저쪽에서 빵 만들 준비를 하고 나는 밀가루만 사 보내면 좋겠는데, 저쪽 사정이 빵을 만들 수 있는 아무 준비도 없어서 내가 중국에서 모든 것을 사서 보내 주어야 할 형편이다. 우리도 이런 기구를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막연했지만, 시장에 나가서 알아보기 시작하여 2∼3일이 지나 서야 빵을 만들 기본 기구들인 밀가루 반 죽기, 자동 절단기를 살 수 있었다. 그리고 큰 가마(솥) 세 개, 찌는 틀 15개, 효모제(이스트)를 사서 이 기구들을 도문으로 내려보냈다.
라진으로 들어가는 날짜가 정해지자 나는 도문시 양식 공사에 가서 밀가루는 7톤을 샀다. 사실은 십 톤을 사야 했지만, 기구들을 함께 실어 보내야 해서 10톤 트럭에 맞게 조절해야만 했다. 그런데 라진으로 싫어 갈 트럭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조선 당국이 도둑 떼들로부터 모든 외국 화물차를 보호하기 위하여 조선에 들어오는 모든 화물차들은 컨테이너 식으로 만들도록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며칠을 기다려서야 트럭에 컨테이너 통을 얹은 10톤 트럭을 구할 수 있었다. 밀가루 7톤과 기구들을 싫으니 어지간히 10톤이 되었다. 이제 양식 지원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일 년 동안 우리는 때에 맞추어 밀가루를 보내 주어야만 한다.
입국이 거절된 밀가루
일 년 동안 밀가루를 보내는 가운데에도 몇 가지 일들이 생겼다. 한 번은 추운 겨울 밀가루 10톤을 실어 도문에서 가정 사역하는 윤 형제가 가지고 들어가도록 했다. 잘 떠나는 것을 보고 안심했는데 그 밤에 전화가 왔다. 두만강 건너 원정 조선 해관에서 입국 거절을 당하여 다시 중국 권하로 돌아왔다는 소식이다. 나는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이미 라선 당국과 전화 연락도 되어있고 사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 궁금하기만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나와 함께 일을 시작한 최 군을 보냈다. 최 군이 가서 일을 잘 해결하여 밀가루 트럭은 탈 없이 라진으로 잘 들어갔다. 최 군은 이미 조선 원정 출입국에 아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서 말이 통하였고, 이번 처음 보낸 윤 형제는 필요한 서류를 가지고 갔지만 조선 관리들을 대할 줄 모르는 경험 부족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왕복 출입국 경비와 하루 트럭 비용은 생각지도 않은 초과비용이 되었다,
벌레 먹었다는 10톤의 밀가루
몹시도 추웠던 겨울 밀가루 10톤을 보냈는데 며칠 뒤 라선 정부 협조 국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 보낸 밀가루에는 벌레들이 있어서 못 먹고 돼지 공장으로 보냈다고 하면서 다시 보내 주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참 놀랄 일이었다. 도문에 내려가서 밀가루를 산 정부 양식 국에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담당 직원은 추운 겨울에 밀가루를 쌓아 놓기 때문에 혹 어떤 포대에서 벌레가 생길 수 있어도 그렇게 사람이 먹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라고 하면서, 먹을 수 없다고 하면 가지고 오면 바꾸어 주거나 환불해 주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직원에게 창고에 가서 한번 확인해 보자고 하였다. 우리는 창고에 가서 밀가룰 몇 포대를 사기로 하고 일꾼들을 시켜서 속에 묻혀 있는 밀가룰 몇 포대를 꺼냈다. 그리고 칼로 포대를 찢어서 밀가루를 헤쳐서 여러 사람이 주의 깊게 보았지만, 어느 포대에서도 벌레는 나오지 않았다. 직원은 이 양식공사에서 매일 밀가루가 시장에 나가고 있는데 아직 이런 문제가 들어온 적이 없다고 하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저쪽에서 농간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모두에게 내 생각을 말했더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들 했다. 우리 양로원도 매일 한 번 이상 밀가루 음식을 먹는데 아직까지 밀가루 자루에서 벌레가 나온 적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었다. 몇 개의 자루에서 벌레가 나왔다면 이해가 될 수도 있는데, 10톤 모두를 먹을 수 없어서 돼지 먹이로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요구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밀가루를 다시 보내 주지 않았다.
며칠 뒤 조선 라선에서 언제 밀가루를 보내 주느냐고 묻는 전화가 왔다. 나는 여러분이 그 10톤의 밀가루 포대를 하나하나 다 조사를 해서 사람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벌레가 많다는 것을 확인했느냐고 묻자,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바꾸어 주겠다고 하니까 도로 가지고 나오겠다고 하자, 그들은 이미 돼지 공장에 보내어서 사료로 썼다고 둘러대고 있었다. 우리 확인 없이 마음대로 그렇게 하면 밀가루를 더 보내 줄 수가 없다고 대답해 주었다. 사실은 저들이 밀가루 10톤을 더 받아내려고 나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어서 더 보내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 더 재촉하는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다음 회분인 10톤을 석 달 뒤에 보내주었다.(이런 일이 있은 지 이 년 뒤 나는 벌레 먹었다는 밀가루 10톤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게 되었다. 양식 지원 문제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 친구는 우리 공화국은 양식 문제만큼은 정부가 틀어쥐고 있어서 어떻게 들어오던 그것을 사사로이 못 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보내었던 밀가루 가운데 10톤도 더 어려운 곳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듣고 보니 바로 그 10톤이었다. 그때 우리가 보낸 10톤을 빼앗기고 나서 억울하니까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더 받아내려고 했다.) 일 년 동안 밀가루를 보내는 일은 우리에게는 힘겨운 일이었다. 뒤에서 일해 주는 동역자들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먼 거리에서 글로서 몇몇 되지 않는 곳에 호소해 보았자 한두 번 이상 다시 부탁하기도 어려웠다. 계속 그들의 어려움을 도우면서 가까이 나아가고 싶으나 이 일이 우리들의 믿음과 사랑의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들을 돕는 일 년 동안 이 일에 뜻이 있는 후원자들의 지원을 연이어 받을 수 없어서 약속한 일 년을 돕고는 그만두어야만 했다. 우리로서는 굶주림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더 보살피지 못하는 것이 마음 아픈 일이었다.
사실 우리는 목단강에서 양로원을 꾸려서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을 모시고 사는 일과 선교사역만으로도 우리는 재정적으로 힘든 가운데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급자족하고자 이년에 걸쳐서 10,000㎡(삼천 평)가 넘는 땅을 개간하여 온갖 작물들과 과일나무를 심고 가축을 키우면서 이제 겨우 50% 이상 자립하여 가는 중이어서 조선의 어려움을 우리 자신이 돕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돕기로 약속한 일 년을 지키느라 우리는 애를 많이 썼다. 도움을 받는 저쪽에서는 지원 연장을 바라고 있었으나 내가 자신이 없었다. 연이어 양식지원을 해 줄 후원단체가 없는 나는 그들에게 막연하게 약속을 할 수는 없었다. 지난 한 해의 지원은 그때그때 기적적으로 가능하였다. 양식 후원 프로젝트는 폐쇄된 조선이 언젠가 문이 열리기를 바라면서 돕는 간접선교(indirect-mission)의 한 전략이다. 그 내용은 자선, 복지, 교육, 산업시설, 건축, 등 여러 가지 일일 수 있다. 목적과 내용은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후원 기관이 없어서 방법은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었다. 우리가 수년 동안 크고 작은 일들을 하는 동안 진정 우리 동포를 도우려는 독지가나 단체를 소개받았거나 만나 본 적이 없었던 것은 홀로 일하고 있는 자신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일이니 어찌하랴, 주시는 분량 이상은 우리에게는 무리이며 욕심일 뿐이었다. 그저 바라기는 우리는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더 넓은 손을 가진 분들을 많이 세워주셔서 굶주린 가운데 있는 북녘의 어린 영혼들을 돕는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도 기도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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