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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

최상봉 부자와 찾은 라선시 5.31-6.3, 2002

혜성같이 나타난 지원자

조선 지원의 길이 열리다. 

그동안 조선에 길이 열려서 한 일 년 동안 밀가루를 보내어 빵을 만들어 먹이면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아가고 있었는데, 우리가 더는 지원할 형편이 되지를 않아서 손을 놓게 되어서 아쉬운 일이었다. 굶주린 동포들이 우리의 지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수년 동안 주님께 기도를 간절히 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후원자나 동역 자를 주시지 않았다. 특히 간접 선교는 물량 지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우리 같이 홀로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큰 선교 프로젝트를 이루어 나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에 무엇을 한다는 것은 조선 당국자가 인정하는 기관이나 단체가 아니면 쉽게 허락되는 나라가 아닌데, 아무 배경도 없고 단체도 없는 이 사람이 조선 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이런 일을 만들어 낸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이 일을 계속하도록 길을 열어주시지 않으시는 것 같이 느껴졌다. 우리가 하고 싶은 간절한 일들이, 때때로 주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

 

주님은 항상 당신의 일을 당신의 뜻대로 원하는 사람에게 맡겨서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목단강에서 하는 사역은 언제나 평안이요 앞이 밝게 보였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조선에 대한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는 연결고리로 삼으시려는 것 같았다. 지난번 방문으로 경로동 사업소와 선봉의 영예 군인 촌에 양식지원을 하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양식 지원을 그냥 무상으로 주기보다는 일을 하게 하면서 그 값으로 양식을 얻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수나 빵을 만들어서 일부 시장에 팔면서 그 이익금을 모아서 양식을 사거나 사업을 늘려가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제 선택해야 하는 일은 어느 정도 자립을 전제로 한 지원 사업이냐, 아니면 그냥 소모 지원으로 먹이기만 하던지 둘 가운데 하나이다.

 

무거운 짐들

새해가 지나면서 중국과 북한의 두 가지 사역은 우리에게는 몹시 무거운 짐이 되어가고 있어서 조선에 대한 짐을 내려놓아야겠다는 마음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자금이 많은 단체가 조선 정부를 상대로 무엇인가를 하고자 협상을 하고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은 이미 바닥을 닦아 놓았음에도 게임이 되지 않았다. 그저 당국자들이 내가 비록 큰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에서 양로원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좋게 보고 있었다. 또 고난 행군의 어려울 때 일 년 간 양식지원을 해준 성과를 인정하여 어찌하던지 정부 측에서는 나로 하여금 어느 단체나 어느 지역이라도 좋으니 적게라도 돕는 일을 계속해 달라고 격려해 주고 있어서 쉽게 손을 떼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명예 군인 촌은 신체장애자 분들과 그 가족들로 이루어진 촌을 도울 손길을 보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동안 어느덧 삼월을 맞이하고 있었다.

 

반가운 전화
조선 사역에 관하여 깊은 시름을 하고 있는 3월 어느 한 밤에 걸려온 전화는 시름을 반가움으로 바꾸어 주었다. 토론토에서 은퇴하신 목회자께서 아들과 함께 내가 전에 소개한바 있는 라선시를 가 보고자 한다고 하셨다.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 혹시 주님께서 저분을 통해서 내가 지금까지 준비한 일들을 계속하게 하시려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분은 내가 존경하며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다. 이분은 고향이 함경도로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월남하여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이 년 전 토론토를 방문했을 때 간접 사역의 하나로 양식 지원 문제를 의논드린 적이 있는데 이제 마음이 좀 움직이시는 것 같았다. 나는 라선시 정부에 이분은 기독교 목사라고 정식으로 소개하면서 방문의 뜻을 전했다. 며칠 뒤 라진시 당국에서 좋다고 방문을 허락하여 왔다.

 

최상봉 목사 아들 denny와 라진 가는 길 5.31 2002

     

 

북방의 긴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피어나는 5월이다가는 마지막 날 캐나다에서 오신 노 목회자와 아들 Denny를 만나 조선으로 가려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Denny가 연예인이어서 인지 머리가 여자 같이 길어 목을 덮고 있어서 북한에 들어가는 것이 마음에 좀 걸렸다. 우리는 조선이 건너다 보이는 경신 향 권하에 도착하여 두만강 가에 있는 조선 아주머니가 하는 밥집에서 하루 밤 쉬기로 하였다. 경신 향은 조선민족 향으로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었다. 

                 

                 

두만강 다리 건너편 북한 출입국 관리소

                                               

징씬전(敬信鎭,경신전)취엔허춘(權河村,권하촌)에서
이 지역은 두만강 하구의 북쪽 기슭 평야에 위치하여 중국, 조선, 소련의 3국 접경지대에 있는 삼각지대로 조선과 소련 사이에 끼인 독특한 지대로서 두만강 하류에는 중국과 소련 그리고 조선이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삼국이 만나지는 방천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경신은 이런 독특한 지리적 위치로 하여 19세기 중엽부터 조선 북부 이재민들이 연해주의 오지로 밀려 들어가는 길목이었고 1905년 섬나라 왜국이 조선의 국권을 찬탈하는 을사늑약 그 뒤로 조선에서 의병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에 참여했던 안중근, 이동휘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이 지역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항일투쟁 역사가 깊은 고장이 되었다. 1907년 안중근 의사와 뜻있는 동지들이 모여서 창설된 무장독립군이 경신을 근거지로 삼고 항일투쟁에 나서게 곳이다.

 

안중근 의사 유적지            

   

 

2000년 훈춘시 경신 전에서 안중근 의사 유적지가 발굴되었는데, 우리가 머무는 권하촌에서 가까워서 가보았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가기 전 마지막 3개월을 지냈던 초가집이라는데, 그 자리에 있는 이 중국인 집이 방문객들로부터 관람료를 5원씩을 받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1907년 두만강을 건너 첫발을 내디딘 곳(회룡 봉촌)이고 1909년 10월 하얼빈 의거 직전 마지막 발자국을 남긴 곳(금당촌)이라고 한다. 어려운 환경을 딛고 나라를 찾고자 고군분투하시던 모습들을 그려보았다. 안중근 의거에 대하여 주은래 총리는,“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중조 인민의 자랑이요 하얼빈의 자랑이며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라고 피력했다. 조선 아주머니 밥집에 가니 우리를 몹시 반가이 맞이하여 주었다. 내가 건너갈 때 들리곤 해서 잘 아는 사이다. 우리는 짐을 풀고 시간이 많아서 권하 조선족 가정 교회를 방문하려고 한 3Km 걸어갔다. 마침 사역하고 있는 책임 집사 자매가 없어서 남편만 만나보고 돌아왔다. 저녁 밥상에는 두만강에서 잡은 세치네라고 부르는 작은 물고기들로 끓인 된장국이 우리 입맛을 돋우었다. 그리고 두 분에게 조선에 들어가 사람들과 만날 때 말조심과 그리고 용어 사용에 대해서 할 말과 안 해야 할 말들을 대충 미리 교양했다. 때때로 손님을 모시고 가면 북한 사회가 너무 경직되어 있고 사람들이 답답하게 보이니까 자유롭게 말하여 순간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만강을 건너면서,  6.1
다음 날 두만강 다리의 국경선 문이 열리는 8:30분 중국 경비구역에서 수속을 마치고, 우리 셋은 배낭을 메고 강물과 함께 불어 내리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두만강 다리를 천천히 걸어서 건넜다.

     

 

전쟁 때 고향을 떠난 지 수십 년 만에 다시 고향 땅을 밟게 되는 노 목회자에게는 감회가, 처음 방문하는 Denny는 신기함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민족의 애환과 한이 서려 있는 이 한 많은 두만강 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감개가 무량한 것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서 다리를 건너 원정 조선 경비구역에 들어갔다. 안내원이란 사람들이 언제나 미리와 있지 않고 이번에도 우리를 기다리게 하고 있었다. 우리는 관리소 대기실에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찍은 커다란 사진 앞에서 기념사진들을 찍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늘도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려서야 두 안내원이 나타났다. 나는 안내원들에게 팽 목사를 소개했다. 그들은 팽 선생이라고 불러서 그 뒤로는 팽 선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차를 타고 가면서 안내원 한분과 팽 선생은 본이 같은 종씨로 아저씨 조카 관계가 되어서 두 사람은 아주 반가워하고 있었다. 나진 가는 길에 안내원은 지난번 나에게 소개해 주었던 선봉에 있는 명예군인 마을을 다시 말하면서, 지금 수공업 공장이 아무것도 못 하고 멈추어 선지가 오래되어서 살기 어려운 형편을 말하면서 들려 보자고 청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명예 군인촌
선봉에 있는 명예 군인 공장에 들렸다. 공장 간부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공장 당 서기는 이 공장을 운영하여 얻어지는 수입으로 마을을 도와 왔는데 오래전 원자재도 없고 주문도 없어서 공장이 돌아가지를 않아서 이 공장을 의지하고 살던 가정들이 몹시 어려운 형편에 있다고 말하면서 양식 지원을 호소하였다. 공장장 안내로 공장을 돌아보았다. 그저 가내 수공업 정도의 공장이었다. 이 공장은 나라에서 명예 군인들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만들어 주고 지원하여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공장을 나와서 라진으로 들어와서 전에 머물렀던 남산 여관에 들었다.

       

 

시 정부 협조 국장과 만남 6.1
아침에 안내원은 우리에게 우산 조립공장보다는 감자녹말과 옥수수 그리고 밀가루를 섞어서 국수를 생산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나는 우산 조립하는 일을 밀고 나갔다. 안내원은 오후에 시 인민위원회 협조국 국장을 만나도록 준비해 놓았다고 하여 함께 시 정부에 들어갔다. 협조 국에서 국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지구 뒤편에서 온 손님에게 그 흔한 냉수 한 잔도 내놓지 않은 채 한 40여 분 우리를 대하고 있었는데, 지원하러 온 우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당당했다. 도와주려고 온 우리가 오히려 낮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시 정부를 나와서 안내원은 우리를 데리고 국수를 만드는 곳으로 갔다. 감자녹말, 옥수숫가루 그리고 밀가루를 적당히 섞어서 국수를 만들고 있었다. 지난해 미국에서 오신 손님과 같이 와서 이 국수 만드는 곳에 왔었는데, 그때와 똑같이 여기에 투자해 주기를 권하는 설명을 길게 하고 있었다. 상품성도 있고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감자와 옥수수가 많이 나는 곳으로 그럴듯한 사업이다. 그러나 그냥 만들어 양식 공급 차원에서 먹이기에는 너무 원가가 많이 드는 사업이었다. 그리고 팔아서 돌아오는 자금의 시간이 오래 걸려서 효과적이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팽 선생은 큰 것은 못하고 조그마한 지원을 하는 기대하고 계셨다. 그래서 나는 저녁에 팽 선생과 명예 군인 공장에다 우산 조립을 하게 하여 그 이익금으로 양식을 사 먹게 하자는데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2002 올림픽 축구


종일 나다녀서 몹시 피곤한 몸으로 내 방에 들어와서 이미 TV 시간이 끝난 줄 알고도 혹시 하고 켰는데, 이거 웬 말인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한국에서 하는 2002 올림픽 축구 중계가 나오고 있지 않은가!! 신나는 밤이 되었다. 조선도 많이 변하고 있었다. 남반부에서 하는 축구 경기를 중계해 주다니 정말 고맙고 반가웠다. 선명하지도 않은 화면에 매일 똑같은 논조의 소리만 나는 지겨운 TV는 그것도 10시만 되면 끝나버리는데, 오늘은 수지맞은 날이었다. 그런데 축구장 안의 경기만 보여 주느라 화면을 줄여서 색상과 분위기가 아주 어색했다. 관중을 보여 주지를 않아서 지금 경기를 일본에서 하고 있는지 한국에서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전체를 시원하게 보여 준다고 인민들에게 무슨 큰 영향이 간다고 축구 시합하나 마음 놓고 보여주지 못하고 이렇게 초라하게 국가 운영을 하는지 딱하고 딱하기만 했다.

 

명예군인 공장 우산조립 사업 지원 계약  6.29(주일)

이른 아침 우리는 아침 운동 삼아 여기저기 돌아왔다. 여관에 들어오니까 안내원이 라운지에서 우리를 보고 어디에 갔다 오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아침에 산책하는 습관이 있어서 동리를 한 바퀴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어디 어디를 갔다가 오느냐고 캐묻는다. 나는 여관 앞 큰길로 죽 갔다가 돌아왔다고 했다. 내일부터는 자기하고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한다. 젊은 분들이 잠도 많을 텐데 아침에 푹 쉬시오. 우리끼리 잠깐 이렇게 바람이나 쏘이고 오면 됩니다. 하고는 그들의 의도를 모른 체하였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어젯밤 축구 이야기를 했더니, 최 선생은 왜 말을 해 주지 않았냐고 모두 아쉬워했다. 오늘 저녁을 기대해 보시라고 위로해 드렸다. 오전 명예 군인 공장에 가서 공장 안과 주위를 다시 둘러보고 공장 간부들과 사무실에서 앉아 여기서 우산 조립 사업을 하도록 지원하는 문제를 의논하였다. 우리 측에서는 우산 재료와 수송 경비를 중국에서 보내 주기로 하고 조선 쪽에서는 화물의 국경선 통과를 책임지라고 했더니 안내원은 그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시 정부에서 지원물자로 처리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생산과정에 필요한 인력, 전력, 양식, 등은 공장에서 부담하라고 했더니 안내원은 전기료는 우리 보고 내어달라고 요구하였다. 나는 모든 것을 무상으로 공급하는데 전기는 자체에서 해결하라고 하였더니 받아 주었다. 안내원은 이왕 도움받는 김에 다 맡기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조건을 넣었다. 생산하여 판 이익금 가운데 1/3은 우리 몫으로 달라고 하였다. 그것으로 양식을 사서 우리가 직접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한다고 하자, 모두 좋다고 받아들였다. 이런 조건들에 합의하여 지원 계약서를 만들어 이쪽에서는 팽 선생과 나 그리고 공장 측에서는 당 서기와 공장장이 서명함으로써 지원 사업이 결정되었다. 이날은 유월 초이틀이었다.


이제야 작으나마 동포를 도울 수 있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조선에 대한 먼 앞날을 내다보는 눈이 조금 밝아졌지만, 그동안 뜻을 함께하는 동역자를 만나지는 못하였다. 그동안 여러분들을 모시고 두만강 다리를 건너가 북한의 현실을 보여드리고 나의 간접 사역의 프로젝트를 설명해 드렸지만 내가 보는 앞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신 분들은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만 더해 가는 가운데 주님께서 나의 이런 뜻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최 선생을 보내 주셔서 선봉의 한 변두리 조그마한 명예 군인 촌에 우산 조립하는 일이라도 하게 하면서 그들의 배고픔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도록 해 주셨다. 비록 보잘것없는 조그마한 지원이지만 한 지점에 근거지를 마련했다는데 큰 뜻을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고맙고 놀라울 뿐이었다. 간접 선교는 어려운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바로 이런 일일 것이다. 팽 선생은 원하는 조선 고향에 후원하는 길이 열려서 바라는 것이 이루어져서 기뻐하셨다. 그토록 기도한 우리의 뜻을 이 분이 이루어주고 있어서 그동안 길을 닦느라 수고한 보람을 느꼈다. 명예 군인은 우리말로 하면 상이군인이다. 이곳에 장애인들이 된 6-70이 넘은 분들에게 어느 전쟁에서 부상을 입었느냐고 물으면 남조선 해방 전쟁, 낙동강 등지에서 다쳤다고들 해서 기분이 묘했다. 화해시키시는 주님의 사랑이 이분들의 손을 잡게 하고 있었다.

 

조선의 영주권 제도
라진 정부 당국에서 지난해부터 외국인들이 편하게 드나들면서 공화국에 살면서 사업을 하도록 영주권 제도가 생겼다고 나에게 영주권을 만들어 줄 수 있으니 신청하라고 알려주었다. 이 영주권을 가지면 조선을 드나들 때마다 안내원의 인도를 받을 필요가 없고 간단한 출입국의 편의가 있었고, 개인 생활에 대한 간섭이 없이 좀 자유롭다는 것이다. 특히 차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편리한 점이 많을 것 같다.

 

영하의 바다 수영
우리는 선봉 부두를 들러보고, 비파를 보러 가다가 비파 해수욕장에서 차를 세우고 바다로 갔는데 날은 흐리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북방의 6월은 아직도 봄의 끝자락에 있었다. 어저께 Danny와 비가 와도 수영하기로 해서 내가 먼저 벗고 바다에 들어가니 뼈를 에는 듯 물이 찼다. 한 5분 지나면서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괜찮아졌다. Danny가 들어오고 팽 선생도 머뭇거리다가 들어와서 한 동안 차가운 바닷물에서 모래 바닥에 조개를 쓰고 사는 게들을 잡으면서 한 30분 재미있게 즐겼다. 지도원들은 추워서 저쪽 한옥 식당에 들어가서 우리를 바라보며 구경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나와 식당에 들어가 방금 나온 추운 바다를 내다보면서 마시는 따끈한 커피 한잔은 조국의 포근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비파의 식당

                                                          

비파의 포장마차
김일성 주석의 낚시터가 있는 비파에서 섭 죽과 조개들을 먹으면서 반쪽 조국의 정취를 즐겼다. 라진에 오는 모든 사람은 여기서 전복과 섭죽, 멍게, 조개, 오징어, 등을 먹을 수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곳이다.    


바다 게들로 이루어진 저녁 만찬
오후 늦게 시장에 가서 큰 바다 게들을 사서 호텔 식당에 주어서 삶아 오게 했다. 두 안내원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안내원들에게 우리 기독교인들은 식사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하는데, 마침 기독교 목사님이신 팽 선생이 오셨으니까 감사 기도하고 식사를 하자고 안내원들에게 권했더니 좋다고 하여서, 그 뒤로는 항상 기도하면서 음식을 나누었다. 식사 기도하는 가운데 안내원들은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수를 놓은 주의 만찬 그림
내가 외국인들을 위한 선물 가게에 대해 이야기들을 하는데 안내원이 거기에 예수님의 만찬 그림을 수를 놓아서 파는데 무슨 뜻이냐고 물어서 최 선생이 재미있게 자상하게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들려줄 수 있었던 자연스러운 시간이 되어서 좋았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팽 선생이 지금 세계는 한 가족같이 지내는데 조선의 청년들도 여러 나라에 나가서 교류하도록 해야 국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듣는 안내원들의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안내원들이 지하 노래방에 가자고 청하여 갔더니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지도원들이 Danny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해서 영어 노래를 한 곡 불렀다. 우리는 노래방 기계와 함께 고향의 봄, 등을 함께 부르면서 고국의 밤은 깊어갔다. 안내원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았지만, 저들의 속 깊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아서 그들과의 대화는 늘 단편적이었다. 여관방에 돌아와 TV를 트니, 이 늦은 밤에 또 월드컵 축구 중계가 나와서 적막한 북한의 밤을 심심치 않게 보냈다.

      

 

오늘도 아침 5:30경 일어나 방문을 나오니 복도 저 끝에 한 안내원이 의자에 앉아 있지 않는가! 인사를 나누고 온종일 우리 때문에 피곤하실 텐데 좀 더 쉬지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하니 선생님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어서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시내 높은 지대를 돌아왔다. 팽 선생에게 어젯밤 축구 이야기를 하였더니 자기들도 보았다고 좋아하셨다. 아침상에는 안내원들도 함께했다. 최 선생이 어젯밤 축구 중계를 말씀하시면서 이왕 보여 줄 것이면 청중도 보여 주어야지 화면을 줄여서 한국에서 하는지 일본서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안내원들은 못 들은 척하고 아무 반응도 없었다. 조선에서 서로 말할 때 바로 이런 점들을 조심해야 하는데 아직 분위기 잘 파악이 안 되시는 것 같았다. 식사 뒤 안내원 한 사람이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에 팽 안내원이 나에게 팽 선생이 어제저녁에 국제교류 같은 그러한 발언은 다시는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여기서는 길게 가려면 자유로운 사상, 정치 이야기는 잊어버리고 말조심을 해야 한다. 이분들이 조선에 들어올 때 내가 이미 교양을 했는데도 분위기가 좋다 싶으면 편하게 생각하여 여기 분위기에 안 맞는 말을 하곤 했다.

 

유치원 운동회
안내원은 나에게 우산 만들 부품은 언제쯤 보내 줄 수 있느냐고 물어서 돌아가 자금이 준비되는 대로 곧 보내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안내원은 오늘 연길 과학기술대학에서 지은 유치원에서 운동회가 있다고 가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가보기로 하였다. 운동장에는 이미 학부형들과 구경꾼들이 많이 와 있었다. 여자 같이 긴 머리를 한 Danny의 모습이 나타나자 모두 신기한지 가는 곳마다 눈총을 받고 있어서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듯해서 재미있기도 하면서 조심스럽기도 하였다. 3박 4일 동안 Danny는 북한 사람들에게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어 주었다. 조선의 남자 머리는 귀를 가리지 못하며 여자는 목을 덮어서는 안 된다. 긴 머리는 “부르주아”라고 해서 비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두만강 건너서.. 6.3
9시경 차를 대절하여 지도원들과 원정에 도착하였다. 김일성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한 보조 안내원이 전에 내가 지도원에게 사다준 사전을 보고 자기도 영한사전을 한 권 갔다 달라고 청하였다. 이번에는 경영관계 책들을 주문했다. 그만큼 자료가 부족해 목말라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우리는 출국 수속을 마치고 그동안 수고한 안내원들과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우리는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면서 두만강 다리를 걸어서 중국으로 건너왔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들어갈 때 약속한 택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서 반가웠다. 유리는 목단강으로 올라가는 길에 왕청현 춘양전에서 하루 쉬기로 하였다. 그곳에 있는 조선족 교회에서 저녁 집회를 가졌다. 저녁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니 조선족 형제가 잠시 뒤에 한국 축구 중계가 나온다고 알려주어서 TV 앞에 모두 모였다. 오늘 밤은 중국 땅 춘양 깊은 산골에서 월드컵 축구 시합을 본다는 것이 꿈만 같은 일이다. 시합에서 한국이 이기자 방안이 떠나가도록 함성을 지르는 신나는 밤이었다.

 

6월 한달 2002년 월드컵 축구는 중국 대륙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비록 중국은 참여하지 못했지만, 축구 열기는 대단하였다. 한동안 중국 중앙 TV는 한국 팀의 경기를 중계하지 않았다. 그러자 중국은 술렁이고 있었다. 분노한 네티즌들과 여론이 방송국과 정부를 압박하고 나섰다. 결국은 한국 팀 시합 중계를 하게 되었는데,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은 한국 편이었고 응원 열기도 대단했다. 한국 축구 중계방송이 나오는 시간에는 관공서는 물로닝고 모든  모든 일을 멈추고 TV 앞에 모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초여름의 한 달간은 대륙은 축구의 열기로 시름을 잊고 사는 듯싶었다.

 

다음 날 오전에 조선족 교회에서 팽 선생에게 두 시간 성경 학습을 하도록 하고, 나는 Danny를 데리고 춘양 조선족 소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두 시간 가르치도록 했다. 두 시간 영어 시간을 마치자 교장 선생과 모든 선생이 와서 우리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다음에 꼭 와달라는 부탁을 거듭거듭 하였다.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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