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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여행기/일본교회방문기

일본 교회 방문 3

고지마 교회, 포화 교회, 도쿄교회

 

동경으로  6. 20. 월

우리가 어디를 방문해 보면 금방 떠나고 싶은 곳이 있는가 하면 좀 더 머무르고 싶은 곳이 있다. 삿포로 이곳 교회야말로 좀 더 머무르면서 주님을 더 배우고 싶은 곳이었다. 친절하고 사랑 많은 미츠하시 목회자 내외와 여러 형제자매님들과 아쉬운 손들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 6시 날틀로 떠나 8:25 동경에 도착했다. 동경 공항에서 아사까 형제가 우리를 데리고 지바에 가서 점심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고지마 교회
식사를 마치고 교제하는데 시모다떼 교회의 목회자인 가고지마 형제가 와서 우리를 고지마 교회로 데리고 갔다. 저녁 교제 시간에서는 내가 26세에 전심 사역자가 되었다니까 일본 형제들이 일본에서는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함께 간 여러 한국 목회자들의 말을 믿으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말씀이 성숙되어서 사역자로 나서는 분들과 아무것도 모르면서 주님의 은혜로 전도하여 교회를 이룬 내 처지와는 다를 수도 있었다. 나는 사람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은 다른 것이라고 전제하고 교제를 했다. 오다께 형제 집에서 샤워를 하고, 소아마비로 불구가 된 형제가 쓴 시집을 선물 받고 그 노래를 들었다. 여기 교회가 세워진 데는 아름다운 간증이 있었다. 동경에서 사시던 중년의 자매님이 고향인 이곳에 와서 주변의 아이들을 모아서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물론 이 자매님은 주일학교 교사로서 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그렇다고 설교자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자매님으로서 전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 어른들이 나오는 교회로 발전하면서 학교 선생님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자 사역자의 자리에 세우고 자기는 여전히 아이들을 전도하고 교제하는 일에 열중하고 계시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하는데 담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교회에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젊은 부부가 있어서 찬양에 열중하여 커다란 은혜가 되었다. 또 한 젊은 형제는 두 손이 없고 발도 풍으로 뒤틀리는 그 발로 글을 쓴다고 하였다. 그 형제가 쓴 시들이 모아져서 얇은 시집으로 나온 것을 기념으로 한 권씩 주기에 받아서 나는 그에게 책에다가 이름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발가락에 연필을 끼우고 한자 획 하나를 긋는데 온몸이 뒤틀리는 용트림을 한 후에야 획을 그을 수가 있었다. 이름 넉자를 쓰는데 그 형제는 크나큰 수고를 하여 주어서 고마웠다. 주님이 그 안에 계시니 자신을 절망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와 더불어 사는 것이 아름다웠다. 다음 날 이 교회에 나오시며, 홀로 사는 한국 부인이 점심시간에 나를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반가워했다. 내가 한국어 찬송 카세트 하나를 드렸더니, 10,000엔을 넣어 주면서 음료수라도 사 마시라고 부탁했다.

 

                

 

이즈미 그리스도 교회
오후에 우리는 고지마 교회 형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두 시간이나 달려서 포화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에 도착했다. 목회자인 스즈끼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영어도 기본상 할 줄 알고 성경학교도 다닌 진보적인 형제라 마음에 들었다. 한 형제가 나에게 일본 교회는 지적인 교회요, 대만(중국)은 찬송, 한국은 기도의 교회라고 말해서, 나는 그 형제의 말을 받아서, 찬미하는 교회는 고난을 아는 교회요, 기도 많이 하는 교회는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고, 유럽의 지적인 교회는 세속화되어가고 있다고 말하자 모두 놀래는 표정들이었다. 이곳 교회는 우리 각 사람에게 고맙게도 2만 엔씩의 선물을 주었다.

아침은 가락(가락국수) 국수를 만들어 차렸는데 입에 맞지 않았지만, 주님이 주시는 귀한 음식을 성의껏 먹으려고 노력했다. 이 교회의 한 형제가 우리를 데리고 동경에 갔다. 나는 기독교 서점에 가서 히브리 성경 한 권을 샀다. 그곳에서 부인들 성경 공부반이 있어서 참석하고 처음 왔던 혼죠로 돌아왔다. 우리가 홋카이도로 해서 동경 주변을 돌아 이제 제자리에 온 것이다. 마치 제 집에 온 듯이 마음이 편했다. 네기시 형제님 댁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받고 저녁 집회에서 여러 형제들이 말씀의 교제를 나누었다. 성도님들이 우리에게 옷 한 가지씩 하고 2만 엔씩을 선물로 나누어 주셨다. 우리 일행은 전자제품을 파는 이 교회 자매님 가게에 가서 10% 할인 가격으로 필요한 전자 제품들을 샀다. 나는 양복 깃에 다는 무선 마이크 하나를 샀다.

 

동경 관광 6. 23. 목

Sunshine 60(サンシャイン60) 전망대(Sky Circus) 

 

 

 

후지 산은 한국 사람들에게 백두산을 영산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이 일본인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일본의 영산은 한반도를 36년간 유린한 군국주의 나라, 왜구의 무자비한 정신이 저기에서 비롯되지 않았는지, 내 눈에는 악마의 산으로 보였다. 후지야마는 침략자 살인 백정 군국주의 상징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안고 사는 왜인이 자연만큼이나 아름다울 것 같은데, 어찌 그리도 잔인하고 악할 수가 있는지... 

 

 

우리가 시내에 나가서 일본형제들이 우리를 제법 큰 일본 신사로 데리고 갔다. 나는 일본의 귀신을 상징하는 붉은색을 칠한 신사를 볼 때 신앙과 민족의 절개를 지키다가 숨져간 선열들의 생각으로 가득 차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신사 참배 강요는 한민족의 정신을 빼버리려는 살인마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정책이었다. 이 일로 우리 믿음의 선열들이 얼마나 희생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치가 떨렸다. 개인이나 나라나 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Tokyo Tower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이 동경 타워는 파리의 Eiffel Tower를 본떠서 만들어 놓고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우에노 공원을 돌아보고 박물관을 보았는데 인상적이었다. 백제로부터 문화를 배우던 이 나라가 메이지유신을 통해 세계 문물을 받아들여서 산업국가가 되면서 동양에서는 감히 비길 수 없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는데, 이러는 동안 조선이나 청나라는 우물 안 개구리로 살다가 왜구에게 당한 치욕과 비통함은 천추의 한으로 남아있다. 이 박물관은 일본의 선진적인 과학발전의 모습들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가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는, 한국이 일어서려고 한창 발버둥 치고 있을 때였다. 

 

왕궁
오후에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허수아비의 후손 일본 왕이 산다는 왕궁을 구경시켜 주었다. 왕궁으로 건너가는 다리 이쪽 넓은 장소에서 궁을 건너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마침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저곳에는 소위 신민이라고 부르는 자기 백성들을 속이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허수아비 왕이 살고 있었다. 짧게 전쟁범 일왕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쇼와 왕은 전쟁광인 군국주의자들과 결탁하여 조선 침략, 동남아시아 침략 그리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이차 전쟁에서 일본의 연합국이던 독일이 패하고 미국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여 본토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미국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본토 여러 곳에 폭격을 하면서 일본에 무조건 항복하라고 압박하였다. 군국주의자들은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알고 있었고 항복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합국은 날 자를 정하여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왕이 전쟁 책임자로 몰릴까 봐 빨리 손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며칠 사이에 미국은 그동안 개발한 원자탄을 8월 6일 처음 히로시마에 떨어트린다. 왕의 체면 유지로 죄 없는 백성 10만 명 이상이 죽어나가고 시가지는 폐허가 되었다. 미국은 처음 만든 폭탄의 실험이 성공적이었다.

          

왕국의 해자와 건너가는 다리

 

일왕은 여전히 연합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자, 두 번째로 3일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또 하나를 떨어트려 8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왕은 군부로 하여금 전쟁 책임을 왕에게 묻지 않는다는 연합국의 보장을 받은 뒤에야, 왕은 순진한 백성들에게 우리가 더 싸울 수 있지만, 백성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연합국의 제의를 받아들인다고 하여서 전쟁은 끝나게 된다. 절묘한 술수가 있는 묘책이었다. 기나긴 전쟁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의 엄청난 생명을 희생시켜 왔는데, 이제 왕이 백성의 구주로 생색을 내며, 연합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러나 일왕은 연합국에 대해서는 항복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 그래서 일왕은 항복한 적이 없게 된 것이다.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속이며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일왕에 속아 사는 일본 사람들은 어리석은 백성들이며 바보들이다. 바로 이 왕궁은 백성의 피를 머금고 살고 있는 일왕의 별장인 것 같았다. 그동안 군국주의자들은 왕을 무능력하게 만들어 놓고 무지한 백성을 선동하는 허수아비로 써먹고 있었다. 그 뒤로 왕의 존엄을 보존하기 위해서 전쟁에 대한 뉘우침이나, 민족적 역사적 죄과에 대해서 책임을 피하기 위하여, 새 세대에게는 뒤틀린 거짓된 역사를 가르침으로 인하여 오늘날과 같이 역사 인식이 없는 국가지도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일본의 불행이다.”

 

긴자(銀座)
동경의 번화가 긴쟈에 기독교 박물관이 있어서 보러 갔더니 마침 문을 열지 않아서 섭섭하였다. 우리는 그냥 긴자(銀座) 거리를 돌아보는 것으로 동경 일정을 마치고 혼죠로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즐거운 하루였다. 모두 여행에 지루해하니까 내 옆에 앉으신 문 노형이 남녀관계에 대하여 진하게 농담을 하시어서 우리를 웃기기도 하셨는데, 뒤에 앉은 이 자매가 많이 쑥스러웠으리라 생각한다.  혼죠에서 루마다 오는 길에 Discount 상점에 들려주어서 목걸이와 삼단 접는 우산을 하나 샀다. 이단 접는 우산도 그리 흔하지 않던 그때 일본은 삼단 우산을 흔하게 만들어 내고 있었다. 돈이 되면 면도기와 카메라를 하나 사가고 싶은 마음이다. 오찌와이 형님 집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는 아끼꼬(치과의사 조수)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느라 잠시 시간을 보냈다.

 

 곤약(蒟蒻 구약; コンニャク)

저녁 음식 가운데 우무로 만든 묵을 내 왔는데 맛이 있었다. 일본 형제들로부터 곤약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들었지만 우리는 이 음식의 재료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일본을 여행하면서 가끔 밭에 무성하게 자라는 식물을 보면서 궁금하게 여기던 식물을 그림으로 그리니까 일본 형제들이 맞는다고 했다. 곤약은 흔히 일본 감자라고 부른다. 감자를 갈아서 말린 전분가루로 묵이나 국수, 등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든다. 이 때는 아직 한국에서는 아직 곤야이 일반화 되지 않아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마크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곤약(蒻)-천남성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중국과 일본 남쪽에서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이르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따뜻한 아열대 지역까지 재배된다.

                    

곤약 줄기와 뿌리 감자

저녁 교제 시간에 내가 한 15분 간증 겸 말씀을 보았다. 야마다 형제 댁에서 쉬었다. 형제 가정에서 잠시 쉬면서 책꽂이에 “아시아 일본 식민지”란 제목의 책이 여러 권 있어서 '조선 편'을 꺼내 보았다. 선량한 농민을 나무 기둥에 묶어 놓고 사격 연습을 하고 있는 왜놈들의 사진들은 마음을 언짢게 했다. 그리고 이런 책을 보고 있는 일본 형제들이 가지는 한국관은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제” 6. 25 토.
오전은 비가 와서 음대를 나온 오찌와이  딸에게 피아노를 한 곡 쳐 달라고 부탁하여서 감상하였다. 점심을 하고 우리는 이곳 시장 통에 나가서 산책을 하면서 돌아보고 왔다. 교회에서 우리들을 위하여 10만 엔을 내놓았다. 또 오찌와이 형님이 10만 엔을 내놓아서 풍성한 사랑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나는 히 2:12-13로 설교를 하는 가운데, 예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조선 침략에 대해서, 고니시 유끼나(少西行長)가 한양으로 진격하는 길목에 있는 상주 산성의 성주로 있는 우리 집안의 조상이 성민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온 가족과 성민들이 전멸했다는 내용을 말하면서 이런 피맺힌, 한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서로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끝나고 나서 그들은 왜 자기네 조상들이 그런 짓을 하였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면서 나의 간증이 좋았다고들 말해 주었다. 미국 Bacon 형님의 수고와 기도로 이루어진 교회였다. 이곳에 있는 기독교 서점에서 나의 일본 방문을 위해서 선물들을 주신 분들을 위해서 4000엔어치의 조그마한 액세서리들을 샀다.

 

그리고 장소와 형제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고등학교 선생님이신 가정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우리가 그 가정을 찾았을 때 주인 자매님이 일본 전통 옷을 입고 마루 끝에 앉아서 무릎을 꿇고 '이럇샤이맛쇼', '이랏샤이맛쇼'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라고 하면서 허리를 굽혀서 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이어 '도죠', '도죠'(Please)라고 하면서 두 손으로 안으로 들라고 청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방문 옆에 무릎을 꿇고 또 앉아서 '도죠 이랏사이맛쇼' 라고 하면서 방으로 들기를 청하는데 우리는 갑자기 여자가 무릎을 꿇고 난리를 치니 어리벙벙하여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지 어쩔 줄 몰랐다. 그 자매님이 우리를 귀한 손님이라고 대접하여 일본 전통 식으로 우리를 영접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마웠고 일본 여성의 싹싹하고 애교 있는 면을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가 방문하던 기간은 일본 교과서 왜곡 사건으로 한일관계가 불편한 때였고, 일본 국내에서도 시끄러울 때였다. 일본 형제가 신문을 보여주면서, 걱정스러운 말을 하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나는 일본에 양심을 가진 지성인들을 믿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니 그 형제가 고마워했다. 일본에서도 역사 왜곡에 대해서 일본 역사를 바로 잡아야 된다고 행동에 나서는 분들이야말로 역사인식을 바로 가신 분들이지만,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내 일이 아니라고 그냥 방관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안타까운 일이다.   

              

주일 예배  6. 26 주일  
이곳 교회의 일본 형제자매들과 함께 드리는 성찬예배는 참으로 감동적이고 은혜로웠다. 그리고 오후 복음 메시지는 나에게 부탁하여서 내가 전했다. 집회가 끝나고 복음을 전한 유순남이란 젊은 교포 여자는 일본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데 재미없고 친척도 없고, 그래서 고국에 나가서 취직해서 살고 싶다고 하면서 10월에 한국에 나온다고 하였다. 좀 측은하게 보였다. 문노형과 김종만 형제는 혼죠로 가고 나머지 우리는 도끼 의사 노형 집으로 왔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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