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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여행기/일본교회방문기

일본 교회 방문 6

오사카,  이즈미

교토 교회 10. 6. 수

아침 다까스끼 형제의 운전으로 노형, 조, 이 자매가 있는 교토(京都)로 갔다. 이즈미의 오가야 형제가 시계가 달린 만년필을 하나씩 선물로 주고 갔다. 이즈미 모임에서 보낸 6만 원을 만원씩 나누고 만원은 공금으로 쓰기로 했다. 교토 모임에서 우리들의 시내 관광을 위해 나까히라 형제의 안내로 신궁을 보고,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살던 300년 전 저택을 돌아보았다. 막부시대 역사의 한 부분을 보았다. 

                          

 

豊橋(이즈미) 교회 
오후에 히까리 특급을 타고 豊橋에 내리니, 개인 병원을 하고 있는 오가와(小川)노형내외의 영접을 받았다. 우리를 식당으로 인도하여 푸짐한 저녁을 대접해 주셨다. 그리고 자매님은 먹고 남은 고기들을 챙겨서 싸 가시는 것이 마음이 들었다. 저녁 집회에는 내가 호세아 1:1-3로 설교했다. 수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식구들이 왔고 교제가 풍성했다. 일본 사회자가 한국 형제들에게 자기 민족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사과하는 말을 했다. 내 설교가 끝나고 자유로운 교제 시간에 한 일본 형제가 우리 정부가 전쟁 배상을 했는데 왜 한국 형제들이 올 때마다 사과를 해야 하느냐고, 항의 조로 말하는 모난 형제도 있었다. 오가와 노형은 작은 몸체에 조용하고 자상한데 비해 부인은 몸체가 크고 쾌활하고 활동적이었다. 이 분은 개인 병원을 이 동리에서 평생을 하고 있는데 동네에서는 이 분을 의인이라고 부른단다. 아무개 의사보다는 아무개 의인하면 더 잘들 안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는 되어야 하겠다.

 

 

水車風宮 남녀 혼탕 10. 7. 목

오늘은 흐리고 비가 내리는데 아무 계획이 없었다.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좁은 방에서 여섯 사람이 지내기에는 좀 답답하고 지루한 오전이었다. 노 자매님이 오후에 아무 계획은 없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느냐고 해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수영장이 가까이 있으면 갔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잠시 후 노 자매님과 한 형제가 소형 Van을 가지고 왔다. 그 차에 우리 모두는 타고 한참 가서 작은 산을 오르니 산 위에 水車風宮이란 Hotel이 나온다.

 

 

호텔 지하에 기가 막히게 꾸민 수영장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곳은 러브호텔이라 부르는 곳으로 일본의 전통을 따라 남녀혼탕을 하는 그런 곳이었다. 작년에 왔던 분이 나에게 지난해 왔을 때 그저 목욕하는 줄 알고 저녁에 따라왔는데, 젊은 남녀들이 벌거벗고 목욕과 수영을 하는데서 함께 했다고 하면서 저녁에 오면 요지경이란다. 오늘은 낯이어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들어가니 저 끝에 3-4명의 여자들이 막 목욕을 끝내고 있었다. 또 요지경을 보나 했더니 아니었다. 텅 빈 수영장은 길이가 한 50m 정도로 수영장 안에는 여기저기 애인들끼리 장난을 치고 물 데이트를 할 수 있도록 바위들로 숨을 자리들을 재미있게 만들어 놓았다. 목욕시설도 함께 잘 갖추어진 곳이었다. 나는 헤엄을 치면서 즐거운 물놀이를 즐겼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우리가 나오려고 하는데 한 떼의 여성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들어가는 길은 다르지만 들어가면 한 통이었다. 말로만 듣던 남녀혼탕을 가볍게 경험해 보았다. 일본은 원래 혼탕이 자연스러운 문화다. 이차대전이 끝나고, 일본도 세계화의 물결에 나아가면서, 이 혼탕 문제가 세계 여론에 떠오르게 되자, 법으로 못하도록 정해져 있지만, 지역마다 알아서 하고 있다고 한다. 저녁에는 밤거리를 돌아보도록 해 주어서 재미있었다. 모임에서 10,000엔씩을 선물로 주었다. 여기 머무는 동안 김종만 형제가 문 노형의 살피는 눈치가 있었다. 돈을 좀 따로 받지 않았겠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야 뭐 알겠느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었다. 오가와 부인의 암 수술 간증은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동을 받았다.

 

 

 

 

오사카 10. 8. 금
오늘은 오사카로 가는 날이다. 오가와 노 자매님이 역까지 나와서 표를 끊어주셨다. 자매님의 따뜻한 사랑의 돌봄에 고마움을 드리면서 헤어져야 했다. 열차에서 문 노형의 말씀은, 지금까지 방문할 때마다 교제를 제일 많이 해주는 곳인데 이번에는 모임에서 만원씩 준 것 외에는 없다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오사카에 도착하니 대학생인 고와 나쓰 두 형제가 학교를 결석해 가면서 우리를 맞이하여 전자제품 할인 상가로 안내해 주었다. 하나도 살 수는 없었다. 24000엔 하는 Type Writer를 샀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밖에 바람이 찬 기운을 느끼게 한다. 태풍 권에 있는 이곳은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오늘 東住居 교회에서 봉투 하나씩을 보내왔는데 한국 돈 30,000원씩이 들어 있었다.

 

이즈미 교회

우리가 방문한 교회들 가운데 이즈미 교회는 나에게 특별하고도 새로운 인상을 주었다. 그것은 이층 한 벽에 이미 주님께로 가신 노 자매님들의 사진이 여러 장 걸려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보자, 살아계시는 동안 교회에서 빛이 되신 노 자매님들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해서 머리 숙여지며 깨닫는 바가 컸다. 우리도 교회에 기리는 빛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말은 안 통해도 그런대로 젊은 형제자매들과 즐거운 교제를 가진 것 같다.  

                          

                   

                            

오사카 교회 10. 9. 토
오늘은 우노 형제가 목회하는 오사카 교회로 가는 날이다. 5:30부터 서두르니 마음이 바빴다. 교회에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교제하다가 오사카로 가는 특급을 탔다. 열차에서 성경도 보고 잠도 좀 잘 수가 있었다. 오사카 역에는 우리를 맞으러 온 두 형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많아서 두 형제 보고 따로 활동하다가 2시간 후에 만나자고 의논하자, 모임의 사역자가 잘 지켜드리라고 했다고 말을 듣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어서 떼어놓으려고 하다가 안 되어서 한 형제가 우리가 가고 싶은 대로 따라다녀 주었다. 우직하게 순종할 줄 아는 형제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나는 어저께 본 Type Writer 한 대를 28,000엔에 샀다. 시간이 되어서 오사까 교회에 왔다. 그 당시 우노 목회자는 중동문제를 종말론을 다루면서 인기를 얻어 방송에도 나가고 사업가들의 그룹에 강사로도 다니면서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한 서점에 가보니 우노 목회다가 쓴 중동문제에 대한 두번 째 책이 서점의 Best Corner에 올려져 있었다. 존경스러운 목회자의 책이 인기를 얻어서 자랑스럽기는 했지만, 결과는 허구라는 점에서 씁쓸한 마음이었다. 종말론에 너무 빠져서(심취) 그의 설교는 거의 중동의 시사적인 영향으로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강조점은 때가 가까웠으니, 주님의 오심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 자체는 맞는 말이고 구원받은 모든 형제자매들이 힘써야 할 일이다. 그런데 강조가 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일본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만일 주님 오셨을 때 내 통장에 돈이 많이 남아 있다면, 그때 안 믿는 사람들이 내 통장을 보고 주님 오심을 기다린다더니 실제는 아니었구먼, 하고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뭐 그런 이야기이다. 주님이 오실 때 남겨 놓지 말고 좋은 일을 위하여 다 쓰게 하려는 좋은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왠지 언젠가 종말론을 주장하던 이단파에서 하던 말과 같아서 갸우뚱해진다. 웃기는 일은 이런 가르침이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것은 절대로 먼저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시 지나고 나면 이 허구의 주장들은 거짓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속은 것에 마음 씁쓸해할 텐데, 저렇게 진리인양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이 딱했다. 이런 형제가 한국에 와서 인기리에 집회를 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 한국 형제교회의 지도자들의 영성과 신학적 결핍을 보여 주는 단면이었다. 친일적인 한국의 몇몇 형제들의 주도로 비판 없이 그의 종말론 집회는 허용되고 있었고 주체성이 없는 한국 모임을 뒤흔들고 있었다. 내가 친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 형제들에 대한 호감, 그것은 가난했던 그 시절에 자신을 알리고 경제적 후원을 기대하는 약간의 마음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교제하고 싶어서 난리였으니까! 한국 모임 전체가 미치광이 하나 때문에 속고 있는데도 아무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것은 친일적인 사람들의 감정과 사고가 성경 말씀의 깊은 진리의 중대성을 가볍게(간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에 나의 이런 조언은 일본과의 교제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몇몇 형제들에게 성가신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宇野正美(Unomasami, 우노마사미)이 분은 오사카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 선생으로 있으면서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하게 된다. 성령이 은혜를 주셔서 전도사로서 큰 은혜가 나타나 오사카에 복음교회를 세웠다. 예수 믿기 힘들어하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내가 방문했을 때 300여 명의 형제자매들이 모이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는 귀한 사역자로 존경받을 만한 분이었다. 그러다가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세계와의 6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주님의 오심, 그리고 세상 종말 신앙이 세계적으로 퍼지면서(擴散) 이 분이 종말 사상에 깊이 빠지게 된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는 중동의 긴박한 시사 환경의 변화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우노는 일본에서 이 방면에는 아주 전문가가 되다. 그는 이스라엘에 가서 베긴 수상을 여러 차례 만나 수상 직에서 사임하지 말 것을 권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당신이 사임하면 중동에 거짓 평화가 이루어져서 불행한 시대가 오게 된다는 논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주장은 부질없는 것이 되면서 같은 계통 교회에서 왕따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 뒤로 그는 유대인과 세계, 유대인과 일본 등 책을 내면서 지금까지 국제정세 전문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81년 제주도 캠프 때 우노는 여러 형제들을 데리고 왔었다. 그는 한국에 오면 귀빈 대접을 받고 있었다. 선동적인 거짓 설교와 일본 사람이라는 친근감 때문이었다. 내가 영국에 가기 전에 그는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키신저가 666일 것이라고 떠벌리고 있었다. 제주에서 나는 그에게 지금은 누가 666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좀 놀란 듯이 지금은!!? 하고 나에게 되묻더니, 지금은 오스트리아의 수상을 들먹였다. 나는 그때 왜 나는 그의 그릇된 망상을 좀 더 심하게 비판해 주지 못했는지 후회가 되었다. 그때 우리의 어려움은 말이 통하지  않아서 직접 의견을 나누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누가 통역하면 잘 번역해 줄 것 같지 않는 마음과 함께 외국 손님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저 참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그런 종말론에 미쳐 있는 우노 형제의 본집에 온 것이다. 그때 그는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이 물러나면 중동에 거짓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허황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어서 베긴 수상을 두 번이나 방문하여 사임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 후 그러나 베긴은 물러났고 우노가 우려하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앉게 되자 그의 인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일본 형제교회로부터 비판이 가해지면서 그는 자숙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 모임에서 그와 가까웠던 형제들은 한국 모임에서 어떤 충고와 비판이 있었는가? 허긴 그때 그렇게 말할만한 소양을 갖춘 인물이 한국에는 없었다. 나는 우노의 선동적인 말을 그의 모임에서 들으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일본 형제자매들 앞에서 그들의 지도자를 내가 비판적인 언사로 토론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한심한 일이었다. 그때 그의 모임은 우노의 사상으로 의식화되어 있어서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따라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이런 예도 있다, “휴거 때 우리 통장에 돈이 남아 있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하는 말을 한국에서 들은 적이 있다. 마치 이단들이 재물을 거두어들일 때 쓰는 말과 같았다. 문덕무 노형은 아들의 일로 네기시 형제와 나가셨고, 우리는 저녁을 식당에서 먹고 아꾸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모두 편안한 호텔에 들자 모두 좀 심란해지는 것 같았다. 나가서 밤거리를 돌아보았다. 와카야마 교회에서 10,000엔씩 선물을 보내왔다.

 

주일 예배 10. 10 주일
오사카 모임의 예배는 감사로 넘쳤고 두 시간의 예배는 은혜로웠고 감동적이었다. 4층에서는 TV로 참여하고 있었다. 250여 명 되는 식구는 일본으로서는 큰 교회에 속한다. 점심 후에는 전도 집회인데 김종만 형제의 설교가 너무 길어서 모두 피곤해했다. 그리고 또 우노의 설교도 있었다. 오후 4시 반에 네 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국민 휴양소에 도착하여 휴일 수양회로 모여서 저녁에는 두 시간의 집회를 가졌다. 모두 말씀을 듣는 태도들이 너무 좋아서 아름다웠다.

 

다께시마(竹島) 섬 관광 10. 11. 월

森형제가 와서 우리를 태워 40Km나 되는 곳에 있는 섬을 관광시키기 위해서 수고를 했다. 배를 타고 한 4km를 건너 가는 동안 나는 영어와 몇 마디 일본 말로 선장과 대화가 통했다. 내가 선박 통신사 훈련을 받았다고 하니 조정간를 나로 하여금 잡게 하고 한 참을 가게 했다. 일직선으로 가고 있으니까 붙들고만 있는 것이었지만 재미도 있었고, 선장도 호감이 갔다. 다께시마란 섬에 내리니 이름 그대로 대나무가 섬을 덮고 있었다. 오래된 대단히 큰 돌부처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일본은 미신과 귀신의 나라였다. 집집마다 귀신 상자들이 가득하고 길모퉁이 현대식 건물 어디든지 작은 귀신 큰 귀신 상자들이 있었다. 대개 불교국가들이 못 사는데 일본만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일본은 한국을 직접적으로 수탈해 먹었고, 한국 전쟁으로 어부지리로 경제부흥을 할 기회를 얻은 운 좋은 나라였다.  악인이 형통하는 불의한 세상이 끔찍하다.  

 

수양관의 아침 10. 12. 화
나는 이른 아침 호수 가로 나가서 산책을 하면서 새 기운을 얻었고, 호수 가에서의 조용한 기도로 주님에게 여러 가지를 말씀드렸다. 오전 시간을 마치고 점심은 카레라이스로 먹는데 반찬은 가지 절인 것인데 조그마한 접시에 아주 잘게 썬 몇 개를 주었다. 한 젓가락으로 먹으면 될 양이었다. 한국 사람은 반찬을 많이 먹는 편이어서 너무 이상했다. 옆에 앉은 대학생들 형제들에게 카레라이스가 맛이 있다고 하고 반찬은 왜 이렇게 적게 주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이것도 남을 때가 있다고 해서, 나는 이 양은 한 젓가락에 먹을 양이라고 했더니 자기 것도 먹으라고 준다. 그리고 한 형제는 아예 부엌에 가서 많이 담아 가지고 와서 모두 한바탕 웃었다. 영국에 대해 물어서 내 경험들을 나누는 재미있는 교제의 시간이 되었다. 오후에는 휴일 수양회를 마치고 다시 예배당으로 돌아왔다.

 

오사카 나베(오사카 냄비가락국수)

저녁 식사는 오사카에서 유명하다는 오사카 나베 전문식당으로 초청해 주었는데, 우리와 자리를 함께한 기업을 하는 사장이란 분이 초청한 것을 알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모임 자매들이 우리 형제들 곁에 한 사람씩 앉아서 마치 기생들 같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나는 일어 기초가 조금 있어서 일본에 도착하면서 여행 중 차에서 매일매일 일어를 공부해서 많은 토막말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그것을 무기로 웃기며 교제하고 있었다. 식탁에서도 모두 어색한 감정이었다. 언어가 안 통하니 유모아도 못하고 그저 웃는 얼굴 모습으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그저 아는 단어들을 겨우 엮어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본 자매들에게는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처음 먹어보는 오사카 나베는 그렇게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한 사람이 한 그릇씩 먹도록 된 것이 아니고, 큰 냄비에 끓는 물에 가락국수 국수와 배추 부스러기들을 끓여서 여럿이 작은 자기 그릇에 퍼먹는 것인데, 국수와 배추 부스러기들이 떠다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무엇이 맛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를 시중드는 자매는 가끔 배추 부스러기를 건져서 내 접시에 놓으면서 도죠, 도죠 하면서 먹으라고 권한다. 나는 왜 이 자매가 먹기 싫은 그 배추 쪼가리를 그렇게 권하는 것인지 받아먹느라 애를 썼다. 그러면서 웃고 웃는 즐거운 교제의 시간이 되었다. 수고 많았던 자매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30,000엔이 든 봉투 하나씩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와 쉬고 있을 때, 전화가 왔는데 우리 비행기 표 값을 내라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표도 선물인 줄 알았었는데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노형께서 잘 의논을 하여서 해결된 모양이다.

 

일본을 떠나면서... 10. 13. 수
오늘이 우리가 일본에 온 지 꼭 한 달이 되는 날이다. 홋카이도에서부터 후쿠오카까지 일본 전국을 대충 돌아본 셈이다. 이렇게 여행을 하면서 교회들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해 준 일본 교회의 형제자매들의 따뜻한 사랑의 교제에 고마운 마음이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 주로 믿는 형제자매들이기는 해도 일본 사람 하나하나는 다 순진하고 착하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아시아에 그렇게 흉악한 짓들을 행했을까, 나는 한참 일본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신도라는 태양신의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숙명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고, 국가를 지배하는 소수 국수주의(國粹主義) 자들의 선동에 이 섬나라 백성은 본의 아니게 침략 제국주의 집단이 되어서 악의 힘에 놀아나는 흉악한 백성들이 되었던 것이다. 선량한 이 백성들이 또다시 이런 국수주의자들에게 휘둘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오전에 우리 모두는 한국으로 돌아갈 짐들을 챙겼다. 우산을 하나씩 선물로 주었다. 森자매는 맛있는 과자를 한 상자씩 주었다. 12시가 되어서 공항으로 나왔다. 몇몇 형제자매들이 따라 나와서 우리를 Check in 하게 한 다음에 공항 식당에서 점심을 대접해 주어서 한바탕 또 교제의 즐거움을 나누었다. 오사카 형제자매들도 우리를 위하여 수고 많아했고, 따뜻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 주어서 고마웠다. 14시 25분 KAL은 우리를 싣고 한국으로 떠올랐다. 즐거웠고 사연 많던 그리고 배운 것도 많은 한 달간의 여행을 기억 속에 간직하면서 잠을 청했다. 잠시 뒤 김포공항에서 일본에서 사 오는 내 Type Writer에 세금을 내라고 해서 좀 실랑이를 하다가, 39,000원을 내고 늦게 나오는 바람에 모두 갔다고 생각하고 나오자, 송찬호, 지복흥. 김정곤, 그리고 노량진 자매님들과 불광동 몇몇 식구들이 기다리고 계셔서 반갑고 고마웠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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