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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중국알아보기

개방 뒤 중국의 흐름

 

 

1. 사회의 흐름
 터진 봇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듯이 개방과 더불어 중국 사회가 걷잡을 수 없이 변화되어 가고 있다.  중국 사람들의 성격을 만만디(慢慢的, 느리다는 뜻)라고 하지만 경제성장과 유행은 동남아 어느 나라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콰이콰이(快快)로 바꾸어지고 있다. 개방 뒤 중국에서 유행되었던 말 중에는 "쌍치엔칸"이라는 말이 있다.  발음은 같으나 뜻이 다른 이 두 단어를 가지고 개방 앞 중국과 개방 뒤 중국을 풍자하고 있다.

 

쌍치엔칸(向前看)

개방 전에는 인민들의 삶의 목표를 쌍치엔칸(向前看)에 두라고 했다. 즉 앞을 보고 나아가라는 것이다. 앞을 바라보는 그곳에는 공산주의의 이상인 계급의 차별이 없고 빈부의 차가 없이 다 잘 먹고 잘 사는 Utopia(지상천국)가 있다는 것이다. 모택동 영도자가 제시한 이 허황한 이상의 꿈을(북한도 마찬가지이지만) 쫓아 철없는 인민들은 너무 머나먼 길을 오다가 지쳐서 이상의 꿈에서 깨어보니 그 이상은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을 안겨다 주었을 뿐, 임은 말없이 떠나버리고 말았다. 꿈과 착각에서 깨어난 인민들은 이제 우리에겐 현실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때 그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과 꿈의 현실을 먹고살 때는 허리를 동이고라도 내일의 복락을 위하여 참을 수가 있었는데 내일의 이상이 없어진 이들에게는 현실은 고해(苦海)였다.

이데올로기의 변화는 중국 인민들의 정신세계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허탈감이었다. 그리고 방향감각을 상실한 세대에게 온 것은 정신적 진공상태였다. 이 정신적 공간을 메워 줄 무엇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이상을 대체해 줄 것으로 돈 그리고 종교라는 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압제가 끝났을 때 콘스탄틴 대제는 성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즉시 가지고 오라고 공포하자 해가 지기 전에 성경 세 권이 들어왔다고 한다. 문화혁명은 힘으로 종교의 뿌리를 뽑는 것이었다. 조우인라이( 周恩來, 주은래)는 “종교란 사회주의 사회에서 역사의 무대로부터 거부될 것이며 교육 과정에서 소멸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40년간의 사회주의 교육은 중국 땅에서 아무 종교도 없애지 못했다. 그 증거로는 개방과 동시에 중국의 토속 신앙과 미신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억눌려 있던 모든 종교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종교 부흥은 미미하나마 중국인들의 정신적 공백(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대한 회의와 절망)을 메워주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가 바로 이 방황하고 상실한 세대에게 유일한 희망의 등불이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쌍치엔칸(向錢看)

개방 뒤 중국인들의 생활의 목표는 쌍치엔칸(向錢看)으로 바꾸어졌다. 즉 돈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이다. 믿었던 것에 대한 절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상호불신 풍조를 가져왔다. 인민들은 서로가 믿을 수 없는 이 현실에서 내가 살길이 무엇이겠는가?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새로운 삶의 철학을 가지게 되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의식이 지금 중국 사회에 만연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다. 이러한 사고에서 비롯되는 도덕부재 현상의 심각성은 성적 타락, 각종 범죄, 부정과 비리가 전 사회영역에 걸쳐 파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던 중국이 개방과 함께 자본주의의 가장 나쁜 영향을 쉽게 받는 것이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또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등이 현재 당면한 중국 사회의 위기의식 중의 하나이다. 부정부패 척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 중국에 지금 유행되고 있는 시 한 편을 소개해 본다. 毛澤東的兵 兩袖淸風 鄧小平的兵 百萬富翁 ‘모택동의 병사들은 옷자락에 바람이 들락거릴 정도로 가난했지만 등소평의 군사들은 백만장자’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회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부재는 중국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믿음의 대상을 공산주의도, 이데올로기도 아닌 것을 마음에 얻기 위하여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고 있는데, 그 종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돈복을 받게 해 달라는 목적을 가진 사람들과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다. 약 3년 전부터 중국에는 많은 종류의 붐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기독교 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를 찾는 사람들로 넘치고 있다. 넘치고 있다고 해서 대단한 것은 아니다. 모일 장소를 허가한 곳이 몇 곳 밖에 없기 때문이다. 찾는 자들은 중년 이상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내일의 소망과 안식처가 없는 이 빈 마음들을 채워주는 역할에 교회는 시대적 사명을 다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면도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삼자교회는 사회주의를 수용하여 기독교를 재해석해야 하는 정치적 억압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가 자유롭게 드러나지 못하는 면이 있고, 성경의 진리를 자유롭게 선포하는 데는 정치적 제약을 받고 있어서 온전한 성령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중국에는 아직 성경 중심의 교회를 보기가 쉽지 않으며, 강한 복음주의 일꾼들이 귀하다. 모처럼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이들에게 복음과 성경 중심의 올바른 가르침이 너무 필요한 때라고 믿는다. 복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저들에게 나아가서 성령의 말씀을 전해야 할 것이다

 

2. 정치적인 흐름
1978년 등소평은 중국을 세계에 개방하면서 4대 현대화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상 정치면에서 4가지 기본원칙을 견지(堅持, 굳게 지켜 나감)하여야 한다고 했다.
(1) 반드시 사회주의 길을 견지하며
(2) 무산 계급 독재를 견지하며
(3) 공산주의 영도를 견지하며
(4)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 사상을 견지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것들은 4대 현대화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전제로서, 인민들이 사회주의적 현대화 건설을 진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준행해야 할 지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천안문 민주항쟁

1989년 6월 4일 젊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 항쟁의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정치권은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자 개방적 정치성향에서 보수적 정치 성향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그리고 체제에 도전하는 민주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개방과 개혁은 잠시 주춤하게 된다. 1991년 8월에 일어난 소련정변을 통해 등소평은 소련이 무너진 이유가 “경제”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고 중국의 사회주의가 무너지지 않는 길은 빠른 시일 안에 경제 안정을 유지하여 사회의 불안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1992년 11월 제 14기 중국 공산당 전당 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시장 경제 체제”라는 새로운 정책을 출범시키게 된다. 그 결과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가져 왔다. 경제 발전은 정치, 사회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그 동안 중국의 경제발전은 어느 정도 사회발전을 가져왔지만, 정치발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로 인하여 정치가 경제와 사회발전을 따르지 못하는데서 오는 부작용과 모순이 생겨나게 됐다. 그래서 중국은 지금 정치발전의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지만, 중국의 보수 정치권은 정치적 발전이나, 개혁을 고려해 본적은 없다. 왜냐하면 “정. 경”분리 원칙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수천 명이 희생된 천안문 민주항쟁 

 

 

그들이 사회를 개방하고 경제개혁을 시도한 것은 경제적 안정을 통해서 사회주의 체제를 견고케 하려는 목적이지 어떤 정치적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는 강한 도전들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그 도전들은 개방과 개혁에 따라 생겨난 소산물로서 자연적인 현상들이었다. 즉 급속한 사회변화, 일반 인민들의 의식의 변화, 새로운 계층의 등장, 여러 가지 사회적 병폐들, 다시 정치 이데올로기화할 수 없는 문화 및 종교 사상의 확장 등은 중한 불신 불만이 팽배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정치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사회 저변에 깔려있는 분위기들이다. 그리고 기하  급수 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종교 세력이 조직화될 때 오는 정치적 위협과 특히 기존 사회주의와 사상대립이 되는 기독교의 신속한 부흥이 보수적인 정치 메커니즘(mechanism,구조)에 위협적인 잠정 요소가 되고 있다. 또 민주화 인사들은 조직적으로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기존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이 가장 위협적인 요소이다. 이로 인해 중국 당국은 근래 들어 그들의 정치적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여러 면에서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지금 중국은 개방, 개혁과 정치체제와의 불균형으로 정치권은 몹시 긴장하고 있다. 이러는 가운데 중국의 큰 별 등소평은  1997년 2월 19일 향년 92세로 홍콩의 귀환(97. 7.1)을 보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제 세계의 관심사는 등소평 사후에 중국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추측들을 낳고 있다. 어떻게 될 것인가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때에 등소평 사후의 중국의 대해서 몇 편의 논문이 발표된 적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편을 요약해 본다.


 
또 버클리대학 정치학 교수 Dr. Hongyung Lee의 의견은, 등(鄧)사후 권력을 승계 받은 사람은 등과 같이 카리스마적이지 못하여 권력의 누수 현상으로 전임자만큼 권력을 행사할 수는 없으나
쟝쩌민(江澤民), 리펑(李鵬), 주룽지 (朱鎔基)는 Technocrat(공대 출신 관료)형의 지도자들로서 어떻게 중국이 당면한 여러 문제를 Ideology에 구애받지 않고 해결하느냐에 있다. 그들은 그들이 장악한 정치권력의 합법성과 정당성이 중국의 경제발전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등소평 사후 중국의 정치권은 대단히 안정되어 있으며 1997년 9월 전국 공산당 대회에서 당 총서기로 재 선출된 짱쩌민이 이제야 명실상부한 중국의 총통으로서 세계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미국 방문은 바로 중국 최고의 지도자로서 이미지를 세계에 주면서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면서 국제 사회에서의 중국을 심어가고 있었다. 지금 중국은 WTO 에 가입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인권 문제로 지금까지 보류된 상태로 중국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데 큰 지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4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도 애를 쓰고 있다. 이런 사태들이 정치적인 변화를 어느 정도 가져 오리라고 낙관하고 있다. 특히 민족적으로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역인 서장과 신강을 위해서 중앙 정부에서 많은 투자를 함으로서 정치적인 불안 요소를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서장 라마교의 정신적인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세계를 다니면서 독립 운동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보통 신경 쓰이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1998년 2월 하순 중앙 정부는 서장에 한해서 인권의 자유와 종교 자유를 허락한다고 발표했다. 중국 사회주의 몰락의 기대는 망상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만일 중국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게 될 때 일어날 소련 같은 국가분열을 가장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 분열의 가장 큰 잠재성은  일천만이 넘는 신강 위루 족 자치구와 티베트인의 서장 자치구, 몽고 자치구, 동북 삼성, 그리고 광동 여러 곳에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3) 중국 교회와 선교의 흐름

중국 교회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 가정교회의 뿌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950년 제3차 선교사 추방 운동과 더불어 중국대륙에 불어 닥친 시련으로 선교의 빛이 사라지게 되고 교회의 생명력이 꺼져가면서 신앙생활의 자유도 잃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중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스스로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진리를 지키는 길을 찾게 했다. 성령은 초대교회 같이 믿는 자의 가정에서 가족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작은 공동체의 길을 가게 했다. 환난과 시련은 헌신되지 못한 쭉정이 신자들을 다 떨어져 나가게 함으로서 가정교회는 정화되어 알곡들만 남게 되었다. 가정교회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되어 있는 가장 중심의 가족단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 서양 사람들이 입혀 주고 간 기독교의 문화와 형식 등의 옷을 벗어버리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단순하게 드리는 가족 중심의 예배였다. 성령님은 이들의 모임을 통하여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를 고치는 등의 역사로 복음이 전해지게 했다. 그리고 삶의 변화를 가진 성도들의 사랑과 헌신(구제, 돌봄, 나눔)들은 가정교회를 환난 속에서도 부흥하게 했다. 문화혁명이 끝나기까지 약 30년 동안 가정교회는 지하에서 번성하고 있었다. 개방 뒤 중국 전역에 요원의 불길 같이 퍼져나가는 복음 선교의 진원지는 환난을 이겨온 가정교회임을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중국 그리스도인의 대부분 이 가정교회 성도들로서 중국 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중국 가정교회의 강하고 놀랄만한 생명력을 볼 때 자기의 백성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된다. 문화혁명 고난의 세월을 견딘 성도들의 간증을 간추리면, 종교적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었던 그때 믿는 가정에서는 성경도 찬송가도 없이 그냥 식구끼리 앉아서 소리는 내지 못하고 응얼거리며 찬송을 하고 기억하고 아는 성경을 잠시 나누고 기도하는 것으로 마치곤 했다. 이웃에 어려움이 있으면 찾아가서 있는 것을 조금 나누며 위로하여 주었다. 병들과 아파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기도하여 주었는데 주님은 능력을 주셔서 병도 고쳐지는 놀라운 기적을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면서 믿는자가 생겨나고 영생의 소망으로 그 어려움들을 주님의 의지하면서 지내는 동안 지하교회는 놀랍게도 부흥하고 있었다. 마치 꽝꽝얼어 붙은 얼음 밑에도 생수는 흘러가듯이 주님은 이렇게 환난속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일으키시고 계셨다. 이렇게 10년동안 지하에서 자란 성도들이 개방된 중국 복음의 씨앗이 되었다. 사회주의가 자라면 종교는 사라진다던 사회주의 나라에 기독교의 꽃이 피어나게 되었다. 인생은 유한하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영원하시다. 이런 가정 교회의 주 무대는 한족(중국인)들의 가정 교회를 말하는 것이지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조선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 종교법

중국 국무원은 지난 2005년 3월 1일부로, 헌법에 근거하여 국무원 제426호령으로 <종교사무조례>를 시행시켰다. <종교사무조례> 중 정상적인 종교 활동에 대해서는 법에 의거하여 관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종교활동에 대해서는 법에 의거하여 제재한다는 것이다. 이 법은 이전보다는 아주 융통성 있는 법으로 닦아 오는 베이징 올림픽을 의식하여 중국에도 인권과 종교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우한 제스처다. 특히 이전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연합집회나 수양회도 할 수 있다는 대목 이다. 그러나 공산당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인민이 집단으로 모이는 것이다. 법조문에는 그렇게 써 놓았더라도 현실이 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법이 나온 뒤로 음성적이던 가정교회를 합법화하려고 그 지도지들을 중심교회에 모아서 한달 정도 훈련하여 설교증을 내어 주어서 종교 활동을 공식화하였다. 그리고 이 법을 따르지 않는 자국 내 수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올림픽이 지나면서 외국인으로 중국 경내에서 음성적으로 활동하는 외국인 소위 선교사들을 구금 체포 추방을 시키고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여러 사람들도 추방되었다. 한번 추방되면 5년이 지나야 중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중국 인민들을 위하여 도움이 되는 일을 계획하여 정식으로 거주권을 얻어서 선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생각한다.

 

 

새 종교법에서 다음 네 가지 조항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종교 활동(즉, 종교에 관련된 모든 집회나 모임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활동)은 반드시 해당지역 종교사무관리부서에 등록한 후 지정된 종교 활동장소 내에서만 진행하여야 한다.’
만일 등록되지 않은 장소 내에서 종교 활동을 진행할 시에는 법적 제재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러한 장소에서 어떠한 모임이나 행사를 진행할 시에는 종교법이 준하는 종교활동 범위에 저촉되지 않는 다른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면에 등록된 장소라면 해당 교회와의 협의 가운데 적절한 프로그램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때론 일방적 준비사항이 상대적 필요에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에 보다 더 장기적이며 구체적인 동역관계 속의 활동이 필요하다.

 

 

둘째, ‘종교 활동에 종사하는 종교인은 종교단체의 인준을 받은 사람으로서 해당지역 종교사무관리부서에 등록한 후 종교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마찬가지 종교 활동에는 반드시 등록된 종교단체의 종교인, 즉 종교 국에 등록된 사람만이 해당 종교 활동을 인도하거나 주관할 수 있다. 결국 ‘종교활동’이라는 정의가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해당 활동은 등록된 종교인이 필요할 수도 있고,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중국교회에서의 종교 활동은 활동내용이 무엇이든, 인도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즉 삼자교회든 가정교회든, 혹은 삼자에 등록된 종교인이거나 가정교회의 지도자이거나 누가 되든지 원칙은 해당 종교국의 인준을 통해 진행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원칙은 언제나 지혜를 앞설 수 없는 법이다. 문제는 어떠한 목적과 무엇을 위한 사역이 계획되느냐에 따라 결과는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셋째, ‘비 종교단체와 비 종교 활동장소에서는 조직을 구성하거나, 종교 활동을 행하여서도 안 되며, 종교적 기금이나 후원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

 

 

넷째, 이상 3가지 사항에 저촉되었을 때 중국 종교법에 의해 이러한 법적 제재를 받게 된다. ‘종교인을 빙자하거나 현급 이상의 인민정부 종교사무관리부서의 허락 없이 종교 활동을 행하거나 허가된 지역을 벗어난 전도활동은 금지한다. 또한 치안관리에 위반되는 행위는 치안관리법에 의거하여 처벌한다. 범법행위에 대해서는 법에 의거하여 형사 처벌토록 한다. 또한 종교를 빙자하거나 사이비 종교를 퍼뜨리고, 인심을 혼란시키며, 공민의 심신 건강을 해치는 행위는 단호히 단속하고 제재토록 한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 광장의 평화로운 학생들의 시위운동은 잔인한 무력 진압으로 일만 명 이상의 희생으로 끝나버린 뒤 많은 젊은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의 도덕성에 대한 환멸 때문이라고 한다. 북경의 한 소식통에 의하면 공산당 회원으로 가입하려고 신청하는 수보다 교회에 등록하는 수가 더 많다는 자료가 발표된 적도 있다. 현재 중국 전역에 확산되고 있는 부흥의 불길은 그 예를 일일이 다 들 수는 없다. 홍콩과 대만 그리스도인들의 본토 선교는 대단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중국에서의 기독교회는 국민생활과 정신 형성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기관으로 실리도 명분도 없다. 그러므로 국가 기관에서나 언론에서 전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고 있는 대상이다. 중국에서의 종교자유란 서방세계의 자본 유입을 겨냥한 제스처요 선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 성취를 위하여 중국 애국 종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모든 나라 종교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도록 장려하고 있다. 그 동안 중국 교회와 접촉하는 쪽은 자유주의 신학노선 쪽이었는데 지금 그들은 복음주의 쪽에도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1988년 4월 빌리그래함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방을 향한 제스처가 중국 내에서의 기독교 활동이 이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부흥한데 대해서 중국 공산당 관리들은 놀래고 있다. 그들은 교회성장의 원인을 문화혁명으로 파괴된 사상의 공백,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환멸감, 농촌생활의 권태감 그리고 사상적 통제의 완화 등의 사회학적 요인들을 제시하고 있다. 80년 종교자유를 명분상 허용하면서 종교 활동을 통제하는 문건이 82년 제1호로부터 시작하면서 94년까지 145호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졌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사실은 중국에서의 종교정책이나 규정은 법을 운용하는 정치가나 지도자의 재량권과 문화 교육의 정도에 따라 그 적용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삼자교회의 지도자가 영적인 사람이냐 정치적인 사람이냐 또는 그 지방 종교 지도자가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과 문화 교육 수준에 따라 그 지방의 활동에 영향을 주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 삼자 교회 목회자와 종교 담당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세계관을 넓혀 주는 것도 복음 선교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어떤 지방에는 상당한 자유와 재량권을 가지고 신앙 활동을 허락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개방 전처럼 통제하고 감시하기 때문에 종교 활동이 활기를 띠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은 중앙 정부의 정책이 서면 지방은 거기에 따른 대책이 서기 때문이다. 본인도 이 두 가지 상황을 경험할 수가 있었다. 중국 당국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발전한 종교계를 당국이 앞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본인은 이렇게 본다. 방법은 두 가지이다. 정면충돌이냐 아니면 수용할 것이야 이다. 정면충돌은 당국이 피할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개방을 통해서 국가 경제가 성장하고 있는 이 시기에 종교를 탄압하므로 서 공든 탑을 무너지게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종교 활동은 등록을 하게 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이다. 정치 메커니즘(Mechanism,구조)이 바뀌어 지지 않는 한 종교 활동의 완전한 자유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서 외국인 종교 활동의 자유는 국내 종교 자유와는 상관없는 별개의 항목으로 다루어지게 될 것으로 본다. 즉 국내 종교 활동이 자유로워지더라도 외국인의 선교 활동은 계속 허용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나는 중국 선교의 장래를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데 지금보다는 더 완화될 것이며 융통성이 더 많아지리라고 믿는다. 나의 이런 바람은 2013년 시진핑 등장으로 아직은 아니다하는 현실을 느끼게되었다.
☛ 위에 글들은 1994년 중국 선교를 시작하면서 2010년까지 여러 자료들과 개인의 경험과 관찰에 의하여 만들어 진 것으로 시간이 좀 지난 자료임.  다음 부터 싣게 되는 우리의 선교일기에서 많은 일들을 다루게 됨.
김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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