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에베소, Ephesus(Selcuk)
옛 에베소는 지금은 셀축(Selcuk)이라 부르며, 이즈미리 주 남서쪽 이오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로 에게해(Aegean Sea) 무역항을 끼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유물을 가득 가지고 있는 도시로 2015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B. C. 1500년경 그리스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와서 그리스 식민 도시를 건설하여 소아시아에서 번성하는 상업 도시가 되었다. B. C.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가 지배하다가, B. C. 4세기에 알렉산더 왕에 의해 새로운 도시로 만들어지면서 헬레니즘 도시로 부흥하였다. B. C. 2세기부터는 로마 제국의 제2의 도시로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문명의 공존 터이며, 기독교의 유적지이다. 기원전 6세기에 세워진 큰아데미((Artemis, Diana) 신전은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에베소를 포함하는 이 지방 사람들에게는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를 받아왔다. 에베소는 두 구역으로 나누는데 위쪽은 황제나 귀족들이 살던 곳이고 아래쪽은 일반 백성들이 살았다. 이렇게 번영하던 에베소는 말라리아 전염병에 시달리다가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오늘이 이르고 있다. 그 폐허의 크기가 엄청나서 에베소가 얼마나 번영한 도시였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에베소의 말뜻은 "인내"이다. 1세기에 에베소는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사도 바울의 소아시아 2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 교회를 세웠다(행 18:16). 3차 선교여행 때에는 침례를 주고 안수할 때 성령이 내려 방언과 예언을 하는 등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본 요술 객들이 은 5만 어치의 술객 책들을 불태워 버리고 개종을 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행 19:1-20). 사도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마케도니아에서 돌아갈 때 밀레도에 이르러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너희는 깨어 내가 3년이나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한 것을 기억하라고”권면하였다. (행 20:17-31).
에베소 유적지 돌아보기
우리 일행이 에베소 유적지에 왔을 때 엄청난 크기의 폐허를 보면서 나는 놀랐다. 지금까지 보아 온 어느 유적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 에베소의 공중화장실, 가까운 곳에 있는 대중목욕탕의 물이 흘러 씻겨 내려가도록 만들었다.
† 침례탕, 가톨릭도 약식세례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물 침례를 베풀었다.
도서관 가까이에 유흥업소들이 있는데 그 앞에 네모진 대리석에 발자국, 사각형, 여인의 얼굴이 있는데, 각각 다 뜻이 있는데, 발자국은 신분을 확인하는 것으로 내 발을 이 발 그림에 넣어봐서 이 그림보다 적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네로 시대에 재건된 큰 경기장으로 25,000명을 수용하는 큰 극장이다. 또 에베소 사람들이 아데미의 선동으로 소요를 일으킨 극장은(행19:23-41) 이 경기장에서 남쪽으로 800미터 지점에 있다.
†물고기 표시 ΙΧΘΥΣ(ιχθυs)
에베소 길바닥에 깔린 한쪽 돌에 풍차와 기독교의 상징인 물고기 그림과 글자를 볼 수 있다.
물고기 그림이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은 로마 제국의 핍박 때문이다. 그 증거들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1세기 로마의 카타콤(Catacombs)의 벽화에서 발견되며,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클레멘스(c.150-215)가 쓴 교사란 책(Pedagogues, III, xi)에 도 “그리스도인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고 쓰여 있다.
초대 교회시대에(64-250)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하여 숨어 살거나 신분을 감추고 살다 보니 모르는 그리스도인들끼리 만남과 신분확인, 그리고 알림을 위한 암호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물고기 그림과 조각이다.
쿼바디스 영화에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한 사람이 물고기의 반쪽을 그려 놓는다. 누군가가 물고기의 반쪽을 이어 그려 물고기를 만들면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물고기였을까? 어부였던 베드로와 물고기와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물고기 암호는 깊은 신학(신앙)적인 뜻이 있다. 그리스어 물고기는 “ΙΧΘΥΣ(ιχθυs)”이며 ‘잌투스’라고 읽는다. 그런데 물고기 글자가 다섯 자인데, 그 한 자 한 자는 한 단어의 첫 글자로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어서 도표로 만들어 보았다.
Ι Χ Θ Υ Σ-물고기
머리글자 | 읽는 법 | 기호 | 그리스어 | 한국어 |
Ι | 이오타 ἰῶτα | 이, I | Ιησoυs 예수스 | 예수 |
Χ | 키 χῖ | ㅋ, k | χριστοs 크리스토스 | 그리스도 |
Θ | 쎄타 θῆτα | ㅌ, t | Θεοs 데오스 | 하나님 |
Υ | 윕실론 ὔψιλον | ㅜ, u | Υιοs 휘오스 | 아들 |
Σ | 시그마 σίγμα | ㅅ, s | Σωτηριαs 소테리아스 |
구주 |
‘ΙΧΘΥΣ’ (대문자) 'ιχθυs' (소문자)
머리글자 다섯 단어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주”다. 문장을 만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구주시다."
오늘날은 이 ‘물고기’를 상징학이나 기호학적으로 응용하여 만들어 그리스도인들의 상징물이나 액세서리로 만들어 쓰고 있다.
▶ 아데미 여신
복음이 다른 문화권에 전해질 때 부딪히는 것은 그 지방 종교문화이다. 특히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면서 바로 이 아데미 여신 숭배자들과의 부딪힘은 사도행전 19:23-44에서 그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말씀을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아데미 여신이라는 이름만 아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데미 여신의 정체와 그 시대에 끼쳤던 영향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 아데미 신전
아데미 신전의 원조는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으로 웅장하고 대단한 건축물이어서 칠 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렀다. 에베소 신전은 아야술루크 언덕에 세워졌는데 사진에서 보는 대로 127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된 대단히 큰 건축물이었다.
이 웅장하고 화려한 신전은 십자군에 의해 부서지고 다시 무슬림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대리석 석재들은 로마 가톨릭 성당과 이슬람 사원을 짓는 건축 재료로 쓰는 바람에 그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가, 1927년 버려진 기둥의 돌 짝들을 모아서 신전 터에 원래 높이대로 기둥 하나를 세워 놓았다고 한다.
▶ 아데미(Artemis) 여신
'아데미 여신'은 아나톨리 반도에서 가장 신성시하면서 추앙을 받았다. 아데미 라는 발음은 한국식이며, 그리스어로는 '아르테미스(Artemis, 사냥의 여신)라고 부른다. 아데미 여신은 중근동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끼쳐서 로마와 메소포타미아 및 아라비아에서도 섬기었다. 아랍인은 '라트'로, 이집트인은 '이시스'로, 로마인은 "Diana( 다이애나)"로 불렀으며 이오니아 인들이 '아데미'라 불렀다. 아데미를 처음 이곳에서는 목신상(나무신)을 키벨레 (Kylbele)라 부르다가 아나톨리 서부 이오니아 문명과 함께 아데미로 이름이 바뀌면서 땅과 다산의 신이 되었다. 에베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숭배했던 아데미 여신은 가슴에 유방이 24개나 달린 풍요의 여신으로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바빌론을 상징하는 성(castle)이 있고, 몸에는 특이한 사냥꾼 니므롯을 상징하는 사자, 호랑이, 사슴 등의 다양한 짐승들의 모양을 도드라지게 조각해 놓았다.
▶ 아데미 여신의 축제
매년 5월 아데미 여신의 축젯날에는 젖가슴의 수 만큼 스물네 명의 흰옷을 입은 여자 사제들이 앞에 서고, 뒤에는 자신의 고환을 아데미 여신에게 바친 남자 사제들이 여신의 호위병처럼 뒤따른다. 아데미 여신의 신상을 앞세운 축제의 행렬은 아데미 신전에서부터 시작하여 에베소 시의 동쪽에 있는 마그네시아 문으로 들어와서 거리를 지나 에베소 시청에 이른다. 에베소 시청 앞에는 또 하나의 아데미 여신상이 밖을 향하여 서 있는데 두 개의 여신상이 만나게 되면 군중들의 열광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때 에베소의 총독은 아데미 여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총독의 인사를 받은 아데미 여신상은 크레테 도로를 지나 켈수스 도서관을 거쳐 에베소 광장을 지나 부두에 이르게 된다. 부두에 이르면, 드디어 소들을 바치는 희생 제사가 드려진다. 남자 사제들이 24마리의 황소 고환을 잘라 아데미 여신의 목에 걸어 주면, 군중들이 함성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무용수들은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도살된 소들이 제단에 올려지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데미 축제가 무르익게 된다.
▶ 누가의 묘
누가는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출생한 그리스 사람으로 의사(골 4:14)로 교육을 잘 받은 형제였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이다. 제2차 전도 여행 중의 바울과 드로아에서 함께 하면서 빌립보 전도사역을 하면서 계속 빌립보에 머무르고 있다가 제3차 전도여행 중의 바울과 다시 빌립보에서 함께하여 예루살렘-가이사랴-로마까지 줄곧 동역하는 선교의 동반자였다(행 16: 10~11). 누가는 또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마지막 여행에서 바울과 함께 빌립보에 있었으며(행 20:6), 그 두 사람은 로마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있었다. 누가는 또한 바울의 두 번째 로마 투옥 기간에도 함께 있었다(딤후 4:11).
구전에 따르면 누가는 바울과 함께 고난 많은 전도자의 삶을 살다가 84세 일기로 에베소 또는 비두니아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누가 무덤이 에베소 여기에 있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지 시신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비잔틴 시대에 로마 가톨릭의 성자 유물 숭배의 일환으로 역사적인 자료가 없는데도 누가의 무덤을 상징적으로 만들었는데, 세월이 가면서 진짜로 착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 Celsus Library (켈수스) 도서관
에베소 폐허를 돌아보는 가운데 나의 눈길을 끈 것은 Celsus Library이다. 역사 기록에 보면 그때 에베소의 인구는 약 25만 명으로 서기 135년, 이 지역의 총독 Celsus Aquila에 의해 이 지역의 통치자였던 그의 아버지, Celsus Polemaeanus를 기리기 위하여 A. D. 117년 지었다고 한다. 높은 초석 위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넓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당시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버가몬 도서관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컸던 켈수스 도서관이다. 건축물은 웅장하고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웅장하다. 이 도서관에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각 문 사이사이에 지혜, 행운, 지식, 선행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여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도서관 입구에 있는 세 개의 기둥은 각각 다른 문화를 상징하는, 1. 이오니아 양식(기둥의 받침이 양머리처럼 생긴 것), 2 도리아 양식 3. 코린트 양식으로 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 양식은 여성스럽고 우아함과 경쾌함이 특징인데 비해 고린트식 기둥은 남성적이고 장엄함을 나타낸다. 기둥들에는 화려한 문양들이 가득하다. 또 입구에는 지혜, 지식, 지능, 덕망을 상징하는 4개의 석상이 있었는데, 불행한 것은 이 석상의 진품은 침략자 오스트리아가 가져가서 비엔나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고, 여기는 복제품을 만들어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원래 도서관 중앙에는 아데미 여신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로마가 아나톨리아를 정복한 뒤 이 도서관을 통해 로마의 군사, 문화 지식의 대국임을 세계에 나타내려 했다. 로마는 실제로 문화의 꽃을 피웠다.
▶ 침례 요한의 묘
이제 계시록을 열어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신 말씀들을 살펴보자. 계시록 2:8-11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칭찬과 책망을 함께 하신다. 주님은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을 위하여 참고 견디며 게으르지 아니하였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과 니골라당의 사상과 행위를 경계하여 배척하는 일에 대해서 칭찬을 하시면서, “첫사랑을 버렸다”라고 책망하셨다. 강압적인 황제숭배와 핍박과 이교도의 유혹들로 순수한 믿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니골라당의 사상과 행위는 기독교와 이교 그리고 세속의 불의와 타협하여 진리를 흐리게 하는 것들이었다.
양가죽 제품과 올리브 제픔 판매장
오늘 하루를 마치기 전에 양가죽 제품과 올리브 기름 제품을 판매장을 들렸다. 양가죽으로 옷과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드는 공장과 판매장은 흥미 있는 곳이었다. 우리를 위하여 즉석 패션쇼도 열어 주어서 재미있었다.
그리고 Olive로 만든 제품들을 파는 판매장에 갔다. 각종 좋은 올리브 기름과 그 기름으로 만든 여러 모양의 비누들이 인기가 있었다. 서양과 중동에서는 올리브 기름을 우리나라 참기름만큼이나 귀하게 여기는 기름이다. 한국 분들은 사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아마 참기름이나 들기름이었다면 모두 샀을 것일 것이다. 나는 그곳의 직원에게 올리브 기름 종류와 사용 방법들을 물어서 들었고, 자기네는 매일 아침 한숟가락 씩 먹는다고 했다, 건강에 좋다고 나에게 Extra Virgin Oil을 한 숟가락을 주어서 먹어보았다. 나는 이곳에서 어떤 올리브 기름이 좋은 기름인지를 아는 지식을 얻게 되었다.
Olive Oil
Olive Oil의 역사는 B. C. 1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식용보다는 의약품으로 사용되었고, 또 정제한 올리브유는 발화점이 낮아 등불을 밝히는 용도로도 쓰였다. 그리고 집을 지키기 위해 켜놓은 올리브 기름의 등불은 부자의 상징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는 기름 생산량이 적고 값이 비싸서 가난한 일반 서민들은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행사 전날 밤에 등불을 켜기 위한 용도로 쓸 정도였다고 한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많이 말씀하시는 기름은 올리브 기름이다. 한국에서 들기름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지중해지방에서도 가구 등 목제품에 광을 내거나 색깔을 입히기 위한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터키 성지탐방 소감
나는 사도 바울의 땀과 피가 서려져 있는 현장을 찾아가면서 사도행전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실제로 돌아본 일곱 교회는 나의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이 걷던 흔적들은 다 흙 속에 묻혀버려 그 어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지역은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하면서 로마 기독교는 200년이 지나면서 초대교회의 순수성이 사라지고 바빌론과 가나안 그리고 이집트 등의 이방 종교와 혼합되면서 바빌론의 여신 세미라미스 대신 여신 마리아를 받드는 로마 가톨릭이 생겨났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지면서 로마 가톨릭도 나누어지게 되었다. 터키 쪽은 모습이 좀 다른 동방정교회로 변화하였다. 비잔틴 건축문화의 양식에 이교의 우상의 요소가 가득 담긴 교회당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초대시대 형제자매들의 교제 중심의 교회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다스리는 의식 중심의 교회가 되어 버렸다. 이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교당들마저도 무슬림의 침략으로 파괴되거나 지진으로 부서진 상처들의 흔적들만 남아 있었다. 사도행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부서진 로마 가톨릭이나 정교회의 부서진 건물 역사의 설명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또 우리 자신들도 바쁜 일정으로 어디 한 곳에 조용히 마음을 집중하여 이곳에서 일어났던 지난날의 일들을 오늘로 떠올려 생각할 틈도 없이 서둘러 옮겨 다니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부서지고 폐허가 된 그 조각들 사이에는 그때 그 시절을 느낄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것들을 보려고 여기에 온 것은 아니었는데, 마음이 허전해 짐을 느꼈다. 그저 사도행전 역사 현장과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이 걸었을 발자취를 따라 보았다는 것으로 위안으로 삼으며, 영적으로 Time-machine을 타려고 노력했다. 다시 터키를 찾을 기회가 있다면 다른 곳은 다 그만두고 데린쿠유, 파묵칼레와 에베소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다.
♣ 사도 바울은 2, 3차 선교여행에서는 소아시아를 넘어 유럽(그리스)까지 선교지를 넓이고 있었다.
♥ 자료들은 사이트에서 제공 받음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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