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탄불의 첫날 3.13
터키에서 첫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의 긴 여정을 위하여 우리 팀은 한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호텔의 뷔페 Break Fast는 먹을 거리가 많고, 커피 맛이 좋았다. 가이드로부터 여행 중에는 커피 사 먹기가 어렵다고 하여서, 온 종일 못 마실 것을 생각하고 2-3잔을 마셨다. 보온병을 가진 분들은 담기도 하였는데, 종업원들이 보고 담지못하게 하였다. 오늘부터 우리 팀은 날틀로 터키 중부인 카파도키아의 중심지 Kayseri(가이샤라)로 가서 기독교인들의 피난처였던 괴레메와 땅밑 도시인 데린쿠유와 자연의 신비를 담고 있는 파묵칼레를 돌아보고, 이스탄불로 돌아오면서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돌아보는 여정이다. 우리는 9:30 국내선 날틀로 한 시간 사십 분을 날아 Kayseri 공항에 11:10에 내렸다. 기다리던 리무진 버스로 먼저 괴레메와 데린쿠유를 보려고 떠났다.
◈ 카파도키아(Cappadocia)

이제 기독교의 유적지들을 돌아보기 전에 여러 날 머물게 될 카파도키아(가파도기아) 지방에 대해서 잠깐 알아본다. "카파도키아"는 터키 한가운데 있는 지방으로 한국의 1/4이나 되는 넓은 지역이다. 기원전 이지역에 있었던 카파도키아 왕국(B.C.257~64)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Kayseri(카이세리)는 사도행전 시대에 "가이샤라" 이다. 그리고 그 옛날 중국 장안에서 시작된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길목으로 다양한 지식과 문화 그리고 문물들의 영향을 받은 곳이다. 특히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많은 기암괴석의 신비스러운 자연환경은 화산 활동 때문이다. 가이샤라 가까이에 있는 에르지예스산(Erciyes 3,916m)과 하산산(Hasan 3268m)이 아주 오래전에 화산이 터져서(爆發) 용암이 흘러내리고 엄청난 화산재가 사방 백여 킬로를 날아가 쌓여지면서 새로운 지형과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을 가진 이곳에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기독교인들의 피난처로 2세기가 넘도록 살아남은 곳이다.

◈ 괴레메(Goreme)
괴레메는 카파도키아 지방의 네브세히르(Nevsehir) 주에 있는 작은 도시로 괴레메 국립공원이 있는 곳이다. 가이사라에서 괴레메까지는 약 72Km로 우리는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자연들을 보느라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동안 괴레메 마을에 들어섰다. 시내를 벗어나 회색빛의 황량한 들을 지나 골짜기를 오르는데 놀라운 자연경관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리 앞에 펼쳐진 자연경관은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곳이 세계적으로 단 한 곳 밖에 없다는 “괴레메”국립공원이다. 자연의 신기한 조화로 이루어진 기암괴석의 골짜기가 파노라마 같이 펼쳐져 있었다. 자연의 조화로 만들어진 걸작품들은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한다. 풀과 나무들이 없는 이 골짜기들은 사람이 살 수가 없어서 버려져 있다가 로마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바로 여기에 핍박받던 그리스도인들의 은신처로서 2세기가 넘도록 살던 곳이다. 우리는 혹독한 환난 시대에 믿음을 지키고자 세상의 안락을 버리고 황량한 이곳에서 숨어 살았던 선열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느껴 보려고 이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 버섯 모양의 돌기둥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괴레메는 앙증맞게 생긴 버섯 모양의 원뿔들은 현지어로 “패리바자, 즉 요정의 굴뚝”이라고 부르고 있다. 버섯모양의 돌 기둥들과 기암괴석들은 모두 "응회암"으로 되어 있다. 암석학에서 응회암은 화산재가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화산이 터질 때 뜨거운 화산재가 쌓이면서 열과 압력에 의하여 응결하여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쌓여 굳어진 응회암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이고 다듬어지면서 이러한 모양으로 만들어졌다고 지질학자들은 말한다. 또한 노아 홍수 때 소용돌이 치는 물의 힘에 연한 부분들이 깎아져 버리고 단단한 부분들이 남은 모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모양도 풍화작용으로 끊임없이 변하여 가고 있는 진행형이다.

◈ 그리스도 인들의 피난처
초기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핍박을 받게 되자 기독교인들이 황무지였던 이 지역으로 숨어들어 환난을 피하는 피난처가 되기 시작하였다. 응회암으로 된 이 바위들은 단단하지 못하여 파기 쉬워서 굴을 만들어 살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인 영향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이곳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느 정도 믿음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 수가 있었다. 로마가 망하고 이슬람이 기독교를 핍박하자 다시 이곳은 믿음의 깊은 피난처가 되었다. 괴레메는 환난 때에는 피난처로 평화로울 때에는 경건주의자들의 수도원으로 은둔자들의 처소로 삼았다. 이 척박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믿음으로 살던 그들의 삶의 터와 남겨진 성화나 유물들이 오늘날 터키의 문화유산이 되어서 관광수입을 올리는 자본이 되는 씁쓸한 현실을 본다.
◈ 괴레메 야외 박물관(Goreme Open Air Museum)
1985년 유네스코 복합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괴레메 골짜기 전체가 자연박물관이다. 버섯 모양의 원뿔과 바위굴들이 집중된 지역을 한정하여 박물관으로 정하여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마치 연립주택이 늘어선 것 같이 봉우리 하나씩을 가진 덩어리들이 늘어서 있는 마을이다. 면적이 넓고 큰 곳에는 연립주택 같이 여러 세대가 살 수 있고 이 안에 교회, 학교 부엌 식당 공공시설들이 있었다.
처음 초기 기독교인들의 은신처의 흔적을 기대했지만 그 바람은 사라졌다. 얼마의 동굴은 로마제국 시대의 초대 기독교인들이 피난처로 살았던 그곳에, 로마 기독교 자유화 이후에 세속으로부터 나와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은둔자들의 기도와 명상의 모습들로 덧씌워졌다. 핍박 시대에는 동굴들이 은폐되어서 밖에서 쉽게 입구를 볼 수 없도록 만든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그러다가 로마의 기독교 자유화의 황금기(312-로마 멸망까지)를 맞이하여 이곳은 은둔자들의 수도원 활동이 왕성하다가 이슬람의 핍박과 탄압으로 시련을 견디다가, 이제는 돈을 벌어들이는 관광상품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은둔자들의 유물들이지, 초대 기독교인이 남긴 모습은 아니다. 동굴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 성화들은 모두 비잔틴 미술들이다. 불그스레하거나 회백색 바위벽에 색깔을 입힌 성화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서 볼품없는 안은 밖과 또 다른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가이드가 안내하는 중요한 6곳 이상을 보면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주어진 자유시간에 여기저기 비어있는 곳들을 가 보면서 이 척박한 곳에서 2세기 동안 몇 대가 어떻게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상상이 되지를 않았다.
◈ 갑바도기아 출신의 세 신학자들
가이사랴의 바실(Basil the Great, 329-379) 은 수도원적 경건의 삶과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 구제하는 데 삶을 바쳤다.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0-395)는 바실의 동생이며 그의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30-389)와 삼위일체를 확립하였다. 초기 기독교에 온갖 이단들이 난립하는 혼란한 시대에 기독교 정통 신앙의 초석을 마련하는데 이바지한 분들이다.
◈ Dark Church(암흑 교회당)
암흑 교회당이라 부르는 곳은 창문이 하나밖에 없어서 안이 어두워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굴 안 벽에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과 생애를 그린 프레스코(벽화)화는 가장 선명하게 잘 보관된 걸작품이라고 한다. 주로 파란색 물감을 사용하여 그 화려함을 더해 주고 있다.
◈ 성 바르바라(Barbara) Chapel
이 동굴에 특별히 성화가 많은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 기독교 안에는 우상 적인 성화 성상 예배를 반대하는 파들이 있어서 종파 싸움으로 성화 파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와서 성화를 발전시켜 남겨 놓았다고 한다,
◈ 성화들의 파손
동굴 벽에 성화들이 세월 때문인지 색깔이 흐려져 있거나 벗겨져 있었다. 또는 눈이 파이고 코나 귀가 떨어져 나가서 흉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설명에 따르면 성화의 파손은 한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화 가운데는 특히 눈 부분이 많이 훼손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이슬람에서는 눈을 없애면 상대를 완전히 죽였다고 믿기 때문에 성화의 눈을 훼손하였다고 한다. 성화의 물감을 타 마시면 거룩하게(성스러움) 된다는 미신으로 벗겨져 있는 곳이 많았다. 또 성상 파괴자들이 그림의 얼굴을 긁어놓아 손상을 입었다. 그런가 하면 십자군 전쟁 당시에 성상을 갈아 마시면 전쟁에서 죽지 않는다고 하는 십자군 사이에 퍼져 있었던 미신 때문에 이곳을 점령한 십자군에 의해서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성화와 성상 숭배는 계속 논쟁하여 오다가 레오 3세와 5세는 성화를 불사르고 성상은 부숴버리라고 명령하였지만, 없어지지는 않았다. 드디어 787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로마 가톨릭은 성화 숭배를 허용하자 급격히 발전하였지만, 성화의 가장 큰 피해는 7세기에 생겨난 이슬람의 침략에 의해서이다.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으로 인하여 알게 모르게 훼손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이 버섯 바위 동굴에 살던 주민들이 떠난 자리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이나 식당들이 생겨났다. 지금도 여전히 사는 주민들이 있다.
◈ 일란르 교회당 (YılanlıKilisesi)
◈ 성경에 나타난 갑바도기아 출신 기독교인들
1. 행전 2:9 갑바도기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 오순절에 참여했다.
2. 벧전 1:1 베드로가 본도(흑해연안), 갈라디아(앙카라, 콘야 지역), 캅바도키아(네브쉐히르, 키이세리, 니데 지역), 소아시아, 등지에 흩어진 나그네 같은 성도들에게 문안과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보내며 말하고 있는 것은 로마 시대에 박해와 탄압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3. 히11:36-38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 갑바도기아 출신의 순교자들
▶ 성 조지- 로마 장교로 근무하면서 예수님을 믿다가 니케아(이즈밋)에서 황제 앞에 끌려 나갔다. 황제는 네가 만일 이 자리에서 예수를 안 믿겠다고 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다고 하여 순교 당하였다.
▶ 성 데오도르- 군인으로 열렬한 기독교인으로서 아마시아에 있는 아데미 신전에 불을 질렀다가 잡혀서 그 죄로 끓는 가마솥에 던져져서 순교를 당했다.
★ 1980년 Chicago를 방문했을 때 “Star's War”를 보았는데, 그 영화에 이상하게 생긴 외계의 마을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 연립주택 단지
◈ 공동식당 자리
◈ Buckle Chapel 천정 그림
◈ Sandal Chapel
프레스코(Fresco)는 벽화의 대표적 기법으로 벽에 그린 벽화를 말하는데, 비잔틴 시대에 많이 그려졌다
은
◈ 맡아 놓고 온 빈집
여기저기 다니며 돌아보다가 빈 집을 찾았다. 누군가가 살다가 떠나간 빈 집이 마음에 들었다. 한동안 이곳에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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