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키 성지순례 여행 3. 11-18, 2013
터키 관광청에서 한 사람에게 $800씩 지원을 받는 여행으로 우리 일행은 모두 21명이었다. 우리는 뉴욕주 Newark 공항에서 이스탄불로 가는 날틀을 갈아타는 여정이다. 3월 11일 미국 시카고 o’hare 공항에서 떠나기로 되어 있는 날틀이갑작기 취소되는 바람에 다른 gate에서 가서 다시 탑승권을 받아 타느라 모두 마음이 바빴다. 우리 팀은 New York 주 Newark 공항에서도 쉴 겨를도 없이 서들러 이스탄불로 가는 날틀을 갈아 타느라 몹시 번거로웠다. Newark에서 18:15 우리를 태운 날틀(RA 904)은 하늘로 떠올라 구름바다를 저으며 지는 해님을 좇아가면서 깊은 어두움에 묻혔다. Newark에서 Istanbul까지는 8,022Km로 약 10시간이 걸렸다. 우리 날틀은 대서양을 건너서 영국 남해와 유럽을 가로질러 날고 있었다.
1. Istanbul Air Port 3.12 맑음
날이 밝아오면서 우리는 터키의 하늘을 날아 아침 10시가 지나면서 터키의 Istanbul 공항에 내렸다.
우리 팀은 현지에서 입국비자를 받는데, 미국 Passport는 비자 비용이 U$ 20이고 Canada는 U$ 60 이어서 놀라, 왜 캐나다는 비싸냐고 물으니 이민관이 캐나다가 터키 사람에게 비싸게 받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한국 passport는 Free이다. 이제 한국 Passport는 캐나다 미국 보다도 세계 여행에 더 편리하게 되었다. 모두 터키 여행의 기대를 하면서 가방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이 생겼다. 놀랍게도 우리 21명 가운데 10명의 가방이 나오지를 않는다. 우리는 사무실에 가서 알아보니 이게 웬일인가! Newark에서 짐을 싣는 사람들의 실수로 우리 짐들이 독일 Frankfurt로 갔다는 것이다. 각자 잃어버린 가방 신고서를 컴퓨터에 넣고 하느라 한 시간이 지나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현지 우리의 가이드가 들어왔다. 이 분은 한인 여행사 사장으로 장로님이셨다. 터키 말을 능통하게 하셔서 우리 일을 잘 도와주었다. 공항 측에서 우리 가방들을 우리가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한 시간 반이나 지나서야 시장하고 지친 몸들로 관광버스에 올랐다. 우리 가방들로 인하여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해서 오전에 예정된 두 곳 정도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이스탄불 도시의 이모저모를 보는데 저 멀리 이슬람교 사원의 상징인 미나렛(첨탑)을 보면서 모슬렘 나라 터키에 온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 이스탄불(Istanbul)
이스탄불은 B. C. 7세기 중엽 그리스의 식민도시로 세워져서 비잔티움이라 불렀다. 그 뒤 동로마 콘스탄틴 황제가 다스릴 때는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르다가, 1453년 술탄 메메트 2세가 정복한 뒤에는 이스탄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을 거치면서 찬란한 문화의 유적 도시가 되었다. 또한, 이스탄불은 유럽과 중동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다. 원래 터키의 서울이었지만, 1923년에 터키는 새 서울로 앙카라로 정하였다. 1985년 유네스코는 이스탄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라고 한다. 인구는 2015년의 통계로 1400만 명이 넘는다.
◈ 보스포루스(Bosphorus) 다리
이스탄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심거리는 두 대륙을 잇는 보스포루스(Bosphorus) 해협과 두 대륙을 이어주는 다리(현수교)이다. 보스포루스 다리 윗쪽으로는 흑해이며 아래쪽은 에게해와 이어지는 마르마라 바다로 이 두 바다를 이어주는 해협의 이름이 보스포루스이다. 다리 이쪽은 아시아이며 저쪽은 유럽이다. 이 두 지역을 보스포루스 다리가 이어주고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의 제일 큰 도시이며, 도시가 두 대륙에 나누어져 있는데, 바다를 사이에 두고 2/3는 유럽 쪽으로 붙어 있고, 1/3은 아시아 쪽에 붙어 있는 묘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역사와 상업 중심지는 유럽 쪽에 있다.
두 대륙을 잇는 다리가 여러개가 있는데 제1큰 다리로 길이가 1560m이며 1973년 10월 30일에 개통되었다.
아래 다리는 현대 건설이 건설한 현수교(suspension)로 이스탄불에서 세 번째 큰 다리로 길이 2164m이며 2016년 8월 26일에 개통하였디. 이 현수교는 세계에 자랑할만한 현수교로 알려졌다.
▶ 케밥 점심
가이드는 우리에게 터키의 음식인 케밥을 먹게 해 주겠다고 선전을 하였다. 터키 말로 밥을 케밥이라고 한다. 우리를 태운 리무진 버스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는데 양쪽은 상가이고 차는 두 대 정도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다. 좁은 식당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리 팀은 3층에 자리를 잡았다. 가이드의 선전을 듣고 좀 고급스러운 쉬쉬 양고기의 케밥 정도를 기대했지만, 우리가 먹은 케밥은 바람 빵을 갈라서 채소 중심의 샐러드와 약간의 고기를 넣어 싸서 말아먹도록 한 것으로 싼 음식이었다. 북미에 사는 우리에게는 싸게 흔하게 먹을 수 있는 fast food이다. 케밥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와 아라비아 사막을 누비던 유목민들이 쉽고 간단하게 육류를 요리해 먹던 것이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터키 민족은 결혼, 생일, 출생 등과 같은 축제가 있을 때나 전쟁, 자연재해 등과 같은 국가적 어려움이 있을 때 다 함께 케밥을 먹으며 희로애락을 나누었다고 한다. 지금은 터키의 대표적인 음식이 되었다.
◈ 히포드롬 광장(hippodrome Square)
히포드롬이란 경마와 전차경주가 벌어졌던 고대 그리스의 U자 원형경기장'을 말하는 것인데, 바로 영화 '벤허'에서 보는 이륜마차 경기장을 말한다.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이 도시를 점령한 뒤(AD 203-AD 330, 5.11) 콘스탄틴 대제가 규모를 확장하여 완성하였다. 한 번에 10대의 전차가 경주한 히포드롬은 길이 480m에 넓이가 120m로 최대 100,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40줄의 계단식 좌석이 있었다. 이 광장에는 수많은 문화유산이 밀집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 역사지구” 안에는 톱카프 궁전, 성 소피아 성당, 그 맞은편에는 블루 모스크가 있고 바로 옆에는 히포드롬 광장이 있다. 바로 땅 아래는 지하 궁전이 있고(물 저장고), 조금 걸어가면 역사적인 그랜드 바자르 재래시장이 있다. 히포드롬 광장(술탄 아흐멧 광장)은 이스탄불의 중심이며 중국 당나라 장안에서 시작된 Silk Road의 종착지이다. 여기서 또 그리스와 유럽으로 뻗어 나갔다. 한 자리에서 터키의 역사적이고 뛰어난 고대 유적들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 경기장 중앙에 세워진 기념물 가운데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상형문자가 새겨진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3,500년 전에 이집트의 파라오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AD 390년, 비잔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집트 룩소르에 있는 카르나크의 아몬 신전에서 이 기둥을 가져와 지금 자리에 세웠다. 연한 분홍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오벨리스크의 무게는 약 300톤이고 높이가 원래는 32.5m이었는데 수송 과정에서 밑 부분의 40%가 깨어져 나가 현재 높이는 20m 정도이다.
◈ St. Sophia 로마 가톨릭 성당
“거룩한 지혜”라는 뜻을 가진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축되어 AD 538년에 동방정교회 성당으로 드려졌다. 이 건물은 비잔틴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터키가 동로마의 지배를 받던 1453년 5월 29일까지 약 900여 년 동안 비잔틴제국의 동방정교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건물 바깥벽이 붉은색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고 흘린 보혈을 뜻한다고 한다. 크기는 높이가 56m 길이가 31m 폭이 33m이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정복한 뒤에 모슬렘인 황제 Sultan 메멧은 알라 외에는 어떤 누구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성당 안의 모든 모자이크 성화를 파괴하기보다는 그 위에 석회를 덮는 회칠을 하게 했다. 그리고 건물 일부를 변형시키고 이슬람교 사원의 상징인 미나렛(첨탑)이라는 높은 4개의 기둥을 세우고 500여 년 동안 사원으로 사용했다. 1935년부터 현재까지 박물관으로 사용하면서 터키 정부는 성화를 덮은 석회를 벗겨내도록 하여서 드디어 500여 년 동안 가려져 있던 비잔틴 문화 예술이 빛을 보게 되었다. 우리가 돌아보는 중에도 벗기다 만 성화들과 아직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들은 기술문제로 빨리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 마리아 여신 숭배
가톨릭에서는 여신이 된 어머니 마리아의 보호를 받는 아기 예수로 언제나 그리고 있는데, 예수의 보호를 받는 마리아의 그림이 옳지 않을까?
우리 팀의 가이드인 현지 여행사 사장이며 이곳 한인교회의 장로이신데 천주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다. 가는 곳마다 우리 눈에 보는 건물들은 모두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사실은 가톨릭의 유물들이다. 나는 한 곳에서 가톨릭에서의 예수 님은 언제나 아기 예수로 마리아의 품에 안겨서 보호를 받는 신세라고 말하자, 장로는 아이고! 선교사님이 가톨릭에 대해서 잘 아시니, 이제부터 그 부분은 나보고 설명해 주기를 말한다. 이로 인하여 여러 사람과 가톨릭과 성경의 다른 점에 대해서 좋은 교제를 나누었다. 목회자와 교사들이 나의 teaching 자료를 메일로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로마가톨릭의 마리아 숭배는 비성서적이고 비기독교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영이신 우리 구주를 인간의 몸으로 오시는 예수 님을 낳으신 귀하고 존경할 어머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신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마리아를 어떻게 하나님과 버금가는 자리로 올렸는지 그 역사과정을 짧게 살펴본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이교 집단들이 기독교에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아무 형상도 없는 기독교의 예배가 그들에게는 몹시 허전하였을 것이다. 구주 예수를 낳으신 마리아는 하나님의 택하신 귀한 분을 우리가 어떻게 존숭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이교도들의 생각은 저들이 섬겼던 바벨론 종교의 여신 “세미라미스”를 마리아로 둔갑시켜 가톨릭 안에 들어와 있게 한 것이다. (바빌론의 신화 중 세미라미스와 담무스 참고)
로마가톨릭은 철저히 이교의 문화로 치장한 집단으로 심지어 교황의 모자까지도 다곤 신의 제사장 모자를 닮은 것을 본다. 수 세기에 걸친 작업 끝에 로마가톨릭은 마리아가 기도와 경배의 대상이 되도록 작업하여 마리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 하늘 황후(Queen of Heaven:천상모후)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 또는 공동-구속자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르게 된다. 그리고 마리아 숭배를 교리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거짓 교리(Dogma:교의)를 만들어 냈다.
1. 무염시태(Immaculate Conception)
마리아가 거룩한 존재로서 경배와 기도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마리아의 무죄 설을 만들어 냈는데, 마리아는 죄 없이 잉태되었으며(예수 님같이) 태어날 때 원죄 없이 태어났다는 날조된 허위 교리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 날조된 교리는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ent, 1957; Pius XII)에서 공인 되었다. 얼마나 황당한가, 아담의 씨가 원죄 없이 태어났다?!!
2. 성모승천(The Assumption)
로마가톨릭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마리아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부활 승천하였다는 것이다. 즉, "성모승천(The Assumption of Mary)"에 대한 허황한 교리는 1950년 교황 피우스 12세(Pius XII)가 만들어 변치 않는 교회법(Dogma)으로 확정했다.
3. 하늘 황후(The Queen of Heaven: 천상모후)
로마 가톨릭의 다음 단계는 그 마리아를 신성화하는 작업으로 마리아가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여 하늘에서 황후(the Queen)의 직위를 받았다고 주장했다(Pius XII, 1954). 가톨릭에서 말하는 하늘의 왕후는 예레미야 7:18에서 이스라엘 여인들이 숭배했던 하늘의 여왕을 연상케 한다. 이제 마리아는 삼위일체와 함께 동등한 신분으로 4위 1체가 된 셈이다. 이제 마리아는 드디어 로마가톨릭의 여신이 된 것이다. 가톨릭은 하나님도 못 만드시는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냈고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나은 말씀을 만들어 냈다.
4. 중보자(Mediatrix)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1883년 그는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중보자이며, 하늘의 은총의 중보자인 동정녀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구속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된다고 하였다. 이로써 로마가톨릭은 드디어 마리아를 신격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 지금 동방정교회도 로마가톨릭과 크게 다른 바가 없다. 내가 1995년 소련 하바로프스키를 방문하였을 때 소련 정교회를 가 보았는데 안에 선물 가게가 있어서 구경하는데 소련 수녀가 가까이 와서 나에게 마리아 그림을 사도록 권하면서 마리아 그림을 집에 걸어두면 질병이 떠나가고 도둑도 안 든다면서 선전하고 있어서 참으로 한심한 적이 있었다.
◈ Blue Mosque
서로마에 St. Sophia가 있었다면 오스만제국에는 Blue Mosque가 있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그 안은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멀리서 푸른색을 띠고 있는 웅장한 사원을 볼 수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황제 Sultan Ahmet은 1609년 성 소피아를 능가하는 더 크고 웅장한 이슬람교 모스크를 소피아 성당 맞은편에 짓도록 명령하여 7년의 공사 끝에 1616년에 완공하였다. 오스만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며 푸른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서 Blue Mosque라 부르고 있다.
◈ Grand Bazaar(그랜드 바자르) 시장
이 시장은 재래시장으로 4000여 개의 점포가 들어 있는 거대한 Shopping Mall이었다. 특히 터키의 다양한 특산품들을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어서 터키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꼭 들리는 코스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크고 작은 카펫(양탄자)을 산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일행 가운데는 작은 카펫들을 사고 있었다. 터키 카펫이 질이 좋다고 한다.
이 시장은 1455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 (Mehmed II)에 의해서 건설된 세계 최초의 쇼핑센터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건물이라는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의류 시장으로 시작하였으나 오스만 제국의 번성과 함께 중세시대에는 중국의 비단과 보석들,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페르시아의 양탄자, 유럽산 장신구와 그릇 등 동서양 문물이 유통되며 최대 국제시장으로 커왔다고 한다. 이 시장은 한마디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살 수 있는 곳이다.
◈ Eyro Plaza Hotel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가까이 가자 우리 팀은 호텔에 들었다. 가방이 오지 않은 10여 명은 당장 필요한 일용품들을 사야했다. 호텔에 서 가까운 곳에 있는 슈퍼를 가르쳐 주면서 어두운 길로 가는 곳이라고 외국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혼자 못 가게 하여 우리 가이드와 함께 여러 사람이 슈퍼로 갔다. 나는 물을 여러 병 샀다. 오늘 하루 지나 보니 이곳에서 제일 먼저 겪는 어려움은 물이었다. 버스에도 물은 있는데 병당 U$ 1을 받고 있어서 시내보다 두 배는 더 비싸게 받고 있었다. 관광회사에서 물을 제공하지 않고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버스의 물을 사서 마시려고 들 하지 않고 있었다. 이 나라도 물이 흔하지 않은 나라 같았다. 나는 광장에서 짬을 내어서 가게로 뛰어가서 일 불에 물 두 병을 샀다. 따라다니다 보면 물을 쉽게 살 수도 없었다. 커피는 전혀 사 마실 곳은 없었다. 가이드는 우리에게 호텔에 비치된 물이 비싸다고 알려 주었다. 터키도 안전한 나라는 아니었다. 전 국민 99%의 모슬렘들이 사는 이 나라의 사회가 왜 이렇게 안전하지 못한 지 몹시 궁금하다. 호텔 저녁은 뷔페식인데 새로운 음식들과 열매들을 맛보면서 이스탄불의 밤은 깊어갔다.
김제화
'성지 순례(Holy Land Tour) > 터키성지순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튀르키예(Türkiye) 7교회 순례 (0) | 2018.09.25 |
---|---|
2. 이스탄불 (0) | 2016.08.09 |
카파도키아(Cappadocia) (0) | 2016.08.09 |
땅 밑 도시 Derinkuyu(데린쿠유) (0) | 2016.08.09 |
파묵칼레, 히에라폴리스 (0) | 2016.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