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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

북한 지원 방법들

나는 여기서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하는 북녘 동포들에게 양식 지원을 하느라  많은 분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고들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사건들을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벌써 오래 전인 1997년 전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얼마의 사진들은 제공자가 없는 사이트에서 가져왔음을 알려둡니다. 고난의 행군은(1994-2005 추정) 기간은 거의 10여 년 간 온 나라에 몰아친 대 재앙으로 수십 만 명이 굶어 죽어나가면서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입니다. 

    

 

그 원인은 식량난이었고,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였다. 고난의 행군은 한국식 표현이고 조선에서는 대기근(大饑饉)이라한다. 이 기간 약 백만 또는 삼백만 명이 죽었다고들 하지만 다 추측이지 정확한 통계는 아무도 모른다. 조선은 1995년에 들어오면서 쌀과 옥수수 생산량이 절반 밑으로 떨어지게 되면서 2005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해방 이래 가장 참혹한 기근을 겪는다. 이 기간에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고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만세라는 표어가 전국을 두르고 있었다. 굶주림에 지친 인민들은 이제 2000년이 되면 형편이 좀 나아지려나. 하는 실낱같은 기대를 가지게 되었지만 2005년이 되기까지 처음 5년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정부는 2000년 1월 1일 노동신문 신년 사설을 통해서 경제건설의 강행군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하게 된다.     

이 기간 굶주림이 한계에 다다르자 자식을 잡아먹는 일들과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중국에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우리가 중국에 있을 때 탈북한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네 마을에서 그런 일이 있어서 안전국에 잡혀가는 사람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는데, 사람을 직접 잡아먹는 일을 보지는 못했어도 사실이라고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중국으로 탈출하는 민족 대 이동 같은 사건들이 터지면서, 우리 동포들은 아무 보호막이 없는 중국 땅에서 여성들은 성노예로 팔려나가는 마음 아픈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남자들은 값싼 노동에 시달리면서 숨죽이고 사는 신세들이 되었다. 중국에서의 조선 사람은 아무 가치가 없고 인권도 보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유리하는 백성이 되었다. 자기 백성을 거두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서 괄시받으면서 떠돌아다니게 하고 있는 그 나라 지도자는 어떤 사람인지 하늘이 무너질 통탄스러운 일이었다. 옥수수 한 자루, 감자 하나가 그토록 그리울 때였다.  

      

      

이 재앙으로 조선 인민공화국은 온 세계 구석구석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금수강산은 인민이 행복하게 사는 나라가 아니라, 인민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지옥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포악한 독재자가 다스리는 가장 불행한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민족의 절반은 세계가 놀랄 만큼  잘살고 발전해 가는데, 같은 민족의 절반은 어떻게 저렇게도 못살아 세계의 동정을 받아야 하는지 마음이 아프다. 세계는 조선의 정치와 이념은 거부하지만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려는 인도주의적 지원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지원들이 조선의 정치적 입장과 부딪히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지원하는 나라나 단체는 먹을 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직접 주기를 원하지만 조선정부가 허락하지 않아서 지원단체와 국가가 충돌하면서 지원단체들이 철수하거니 중단하는 일들이 생겨나면서, 조선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부정적인 여론이 온 세계에 퍼져 나갔다. 또 지원하는 자금은 통치자금이나 무기 생산에 쓰여진다든지, 굶주린 인민이 먹어야 하는 식량이 군량미로 둔갑하는 일들로 지원하는 손길들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러는 가운데 뜻있는 한국 사람들이 반쪽 조국에 있는 동포들을 돕고자 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개인이나 단체들은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았고 주로 외부의 지원을 환영하고 있는 라진 선봉 지역에 몰리게 되었다. 우선은 두만강을 끼고 있는 연변은 조선족들이 있어서 같은 말을 하는 동역 자를 구하기 쉽고, 조선족들이 라진선봉 지역을 지원하는 중계역할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큰 단체들은 중앙정부를 상대로 방법을 찾았다. 특별히 외국 지원 단체인 NGO 팀이나 자선단체들이 운영하는 육아원 고아원 유치원 등은 주로 황해도에 많이 몰려 있는 편이다. 이 가운데는 한국의 지원단체도 있다. 곤란에 처한 아이들이 이런 시설에 들어가 있는 것은  큰 행운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시설이 없는 곳에 있는 아이들은 그저 불행할 뿐이다.  

                       

인터넷 자료

 

            

그리고 라선 시 안에서와 중국 쪽 두만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빵, 영양가루, 두유, 국수, 등을 만들어 조선족을 통해서 두만강을 건너 약속된 지역의 탁아소 학교 등지에 공급하기도 했다.

 

영주권제도
그리고 무역개방 지구인 라선 시 지구에 영주권 제도가 생겨서 국경선 출입을 자유롭게 그리고 라선 경내에 거주할 수 있도록 편리를 제공해 주게 되자, 중국 조선족과 해외 교포들이 이 곳에 와서 영주권을 얻어 살면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 지원사업을 하면서 밖에서 지원하려는 개인이나 단체들의 중계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중국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면서, 라선 시는 국제결혼을 허용하여 조선의 딸들과 결혼하여 살림을 꾸리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양식을 차량으로  보내기
그동안 뜻있는 종교 단체, 민간단체, 또는 독지가들이 단동, 연길, 도문에서 옥수수, 밀가루, 쌀들을 조선으로 보내는 일들이 유행처럼 한때 왕성했다. 이 양식들을 나르는 일들은 자연스럽게 조선족이 맡아하게 되었다. 시간이 가면서 이 일을 맡아하는 조선족들은 전문성을 띄게 되었다. 대량으로 양식 보내는 일들을 하는 한국 분들이 많아지면서 전문 중개인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국 분들은 이 조선 사람들에게 위탁하여서 조직적으로 양식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한국 분들은 양식들이 조선에 전달되었다는 확인을 위하여 양식을 실은 트럭이 두만강을 건너갈 떼 사진 찍는다. 그리고 양식 트럭을 가지고 간 사람이 조선에 건너가서 전해 주었다는 조선 쪽의 영수증을 받아다 준다. 양식을 보낸 한국 사람은 그때서야 잘 건너갔고 잘 전해 주었구나 하고 안심한다. 그러나 실제로 건너간 양식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처음에 양식을 보내는 한국 사람들은 가능한 집집마다 골고루 나누어 주기를 바라고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렇지만 저쪽에서는 일이 그렇게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나도 그렇게 해 보려고 한두 번 요구를 하였는데, 대답은 자기들에게 주면 자기들이 필요한 지역에 나누어 주겠다는 것이다. 내 나름대로 노력해 보았지만 무리할 수는 없었다.

 

누구든지 처음에는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나르는 조선족 일꾼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처음에는 그런 조건을 내 세우니까 그렇게 하도록 한 경우도 있었는데 포대를 열어서 배급소에서 주듯이 퍼 주는 것이 아니어서 한포 대씩을 주게 되는데. 그것을 개인이 자기 집에 가지고 간다는 아무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한 마을이나 직장을 대상으로 교섭하여 허락이 되면 한포 한포씩 주기도 해 보았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렇게 하는 일들이 번거로워져서 그냥 직장 단위나 마을에 부려놓고 영수증을 받고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의 사회조직을 잘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거짓말 오해도 생겨났다. 저곳은 외부에서 지원이 오면 절대로 자체에서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위에 보고하여 조치를 받아야 한다. 일단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얼마의 양식이 돌아온다. 그리고 정부에서 정식으로 양식이 내려올 때는 지금 받아먹은 분량만큼 빼고 주게 된다. 그래서 지금은 당장 어려워 받아먹어도 그때 가서 양식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게 그거라고 한다. 그러나 보내는 사람은 각 가정이나 개인의 손에 들려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심부름꾼은 본의 아니게 그렇게 했다는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보내는 사람은 사진을 찍어 오기를 바란다. 그러면 저쪽 당국이 사진을 못 찍게 한다고 하면 그만이다. 또 융통성이 있는 친구는 전달식 형식으로 한두 사람에게 한포씩 전달하는 식으로 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다 쇼를 하는 것이다. 조선은 양식만큼은 정부가 틀어쥐고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이 그렇게 쉬운 곳이 아니다.

 

그때는 양식을 가지고 들어가는 조선족의 하루 일당은 한 천오백(당시 환율 $1=8 이상) 정도였다. 몇 년이 흐르면서 이 일을 맡아하는 중개인들은 아파트를 사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거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연길에 삼공 자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중개인들을 통해 조선에 양식 보내는 일들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 쪽에서도 양식을 싣고 오는 일들을 무조건 환영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정보당국이 살피기 시작하기 하였다. 그것은 양식을 보내는 자본이 한국의 종교단체(기독교, 불교, 등)들이라고 의심하면서 조선족 운송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하는 일들이 생기면서 조선족들이 운송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손을 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부정적인 소문들로 인하여 한국 지원자들도 믿을 수 없게 되자 이런 지원들은 줄어들게 되었다.

 

         

                        김정일의 명령으로 조선을 드나드는 모든 트럭들은 이렇게 통을 만들어야만 했다

 

양식 운반의 두 가지 실례 들 (1997년의 이야기)  
실제로 미주 한인들의 지원으로 양식 나르는 일을 3년 이상해 본 경험이 있는 조선족의 이야기들을 들어 본다. 최 군은 연변 조선족 대학을 나온 교사 출신으로 도문 토박이로 나와는 가까운 사이다. 그동안 최 군과 그분의 장모는 한국의 불교, 기독교인들과 다른 단체들의 부탁으로 조선으로 양식 나르는 일들을 한 3년 이상 전문적으로 맡아하게 되었다. 한번 갔다가 오는데 일당을 중국 돈 천오백 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일을 하지 않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한 번은 자기 장모가 40톤 트럭에 밀가루를 싣고 건너갔는데 한 달이 넘도록 소식이 없어서 수소문해 보니 도문 건너편 남양 안전국에 연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답답해진 최 군이 두만강 중조 변경에서 중대장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의논하였는데, 그 친구가 돈을 준비하여 가지고 건너가서 그곳 안전국 수사과장 아무개를 만나라고 했단다. 그래서 그 양식을 지원하는 재미교포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미국에서 그분이 와서 장모를 빼내 오라고 최 선생에게 달러를 주었다고 한다. 최 군은 돈을 가지고 건너가서 안전국 수사과장 사무실에 들어가 그 사람 앞에 미화가 든 봉투를 내놓으니, 과장이 놀라면서 사무실 눈치를 살피더니 슬며시 봉투를 서랍에 넣고 오후에 오라고 하더란다. 오후에 장모를 데려 오는데 수갑을 채워서 두만강 다리 가운데 국경선에서 수갑을 풀어 주어서 풀려났다고 한다. 장모는 그 뒤로는 억만금을 주어도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최 군도 양식을 싣고 대개 직장으로 가지고 가서 주거나, 보는 데서 나누어 주고 확인서를 받아가지고 돌아오는 일을 하곤 했다고 한다. 최 군에 따르면 쌀을 갔다가 준 한 직장의 지배인은 이렇게 주면 먹는 동안은 좋지만 실은 자기들에게는 안 좋다고 하더란다. 왜냐하면 가끔 배급이 나올 때는 받은 만큼 빼기 때문에 그때엔 더 어려워진다고 하더란다. 그러다가 한 번은 양식을 전해주고 나오다가 안전국에 불려 가서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자기가 전직 교사였다는 것 등 자기에 대한 모든 조사를 이미 다 해 가지고 있는데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선생이 무슨 돈이 있어서 양식을 가져다주느냐?, 남조선 누구의 부탁을 받고 하느냐? 등 며칠간의 긴 조사를 받고 풀려난 뒤로는 양식 운반하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최 군은 지난해 김정일 지도자의 어머니 김정숙 장군의 생일날 평양에 참석해 달라는 조선 정부의 초청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조선에 양식 배달을 한 공로로 추천이 된 모양인데, 최 선생이 겁이 나서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단동에서 조선족 여성이 두 트럭의 양식을 싣고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 쪽으로 건너갔는데 6개월째 나오지 못하고 있어서 가족들과 관계자들이 애타 해 하고 있다는 소식을 도문에서 듣게 되었다.

 

친척 방문으로 양식 보내기
조선에 친척을 두고 있는 연변 지구 조선족들을 통해서 양식 보내기 운동도 한 동안 활발하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이 직접 들어갈 수 없으므로 조선족들을 통해서 양식 지원을 하고 있었다. 조선 안전국은 시간을 두고 값없이 양식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에 대해 관찰하면서 그들의 뒷조사를 한 뒤에 잡아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질문은, 왜 양식을 그냥 주는가? 당신 개인이 주는 것인가, 한국 목사 누가 시킨 것인가? 조선 정보 당국도 한국 기독교인들과 다른 종교단체들이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저들도 다 짐작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짧게는 한주 길게는 한 달 이상 만에 나오기도 하면서 이런 일들은 주춤하게 되면서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친척을 통한 이웃에게로의 전달이 말 같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그러한 일은 정보망에 걸리기 마련이어서 실제로 친척 방문을 통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도 허울 좋은 이름뿐이며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해 본 셈이다. 또 이렇게 조용히 알게 모르게 해야 하는 일들을 산통 깨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에서의 문제이다. 자금지원을 하는 분들이 북한 지하교회 또는 친척 양식 지원을 통한 선교 등 제목으로 모금을 하기 위하여 선교집회 소식을 여러 기독교신문에 그리고 교회 주보에 광고를 하는 것이 바로 문제이다. 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기본정보는 한국교회의 기관지에서 제공하는 셈이다. 금지된 나라에 조용히 소리 없이 사업을 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들 소란스럽게 하는지... 

 

다른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본다,
신의주가 마주 보이는 중국 쪽에서 매년 가축을 키워서 평안도 당국에 지원하고 있는 호주 교포가 있다. 나는 이분과 며칠 머물면서 조건 없이 평안도 고향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분이 한 번은 물자를 싣고 들어가니까 도 당국 고위간부가 한국 모 기독교신문에 난 광고를 보여주면서 이 목사가 우리 공화국을 돕겠다고 일억 원을 모금한다고 하는데 이 돈이 언제 우리 조선에 오느냐고 물어서 당황하였다고 한다.(그때는 모든 언론의 정보가 일본 조총련을 거쳐서 Fax로 보내지고 있던 때였다. 지금이야 얼마나 빠를 것인가!)  

 

중국 지하 신학교의 발각
중국의 어떤 도시에서 여러 해 지하 신학교를 운영하던 한국 목사들이 일망타진된 적이 있다. 이 신학교에 대한 정보도 지원하는 교회의 주보에 실은 광고 때문이었다. 한국의 언론은 대북 관계에서도 너무 떠벌리고 있듯이, 선교를 하는 사람들도 너무 떠벌리는 일로 망하기도 한다.
 
선교 자금을 모으기 위한 과대선전들은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과시와 성과주의 등이 큰일을 망치기도 하고 있었다. 떠도는 말 들 가운데는 중국 선교와 북한 선교 제목으로 사기 치는 일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마음 아픈 일이다. 내가 중국에서 한국에 나올 때 기독교신문들을 보면 중국 북한 선교를 위한 집회 광고가 많기도 했었다. 지금 이 시간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조용히 숨죽이고 사회주의 나라와 모슬렘 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귀한 일꾼들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삼가고 조심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다. 조선은 가정단위로 그리고 공동체의 작은 단위로 감시 체제가 엄중한 그곳은 무슨 공작을 하던지 간에 보이지 않는 눈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폐쇄와 감시가 철저한 사회에 외부에서 들어가 감히 선교 일을 한다는 것을 그렇게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꽁꽁 얼어붙은 강 그 밑에도 물은 흘러가듯이 하나님의 일도 그렇다. 

 

강변에 양식 던지기   
어찌하던지 굶주리고 있는 조선에 먹을 것을 주고자 애틋한 노력을 하는 분들 가운데 내가 잘 아는 한분은  70이 넘으신 분으로 미국에서 와서 목단강에 살고 있었다. 이 분이 처음 시작한 일은 양식을 작은 자루에 담아 두만강이나 압록강에 가서 삯 배를 내서 조선 땅 가까이 지나가면서 건너편에 던지는 일들을 했다. 이러한 일은 중국 정부도 원하지 않는 일로서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도문의 강변 공원에서도 배로 던지기를 여러 차례 중국 공안의 저지로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 또 단동에서 압록강을 따라 얼마큼 올라가면 압록강 폭이 좁아지는 곳이 있다. 여기서 양식 자루 던지는 일들이 성행하고 있었다. 얼마 뒤 그 지역도 단동 공안국의 감시 밑에 놓이게 되면서 더 이상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일들은 한동안 선풍적으로 일어나다가 식어져 버렸다.

 

어린이 양식 지원 사역
우리는 여러 해 소외된 지역(산골 농촌)에 있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얼마 전까지도 들어가서 양식 지원을 하고 왔다. 황해도 같이 해외 지원단체들의 지원을 받는 곳에 있는 아이들은 그래도 복을 받고 있는 아이들이다. 전혀 외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아이들의 처지는 매우 어렵다. 이런 지역의 농촌 탁아소(대개 5세 밑의 아이들)나 유치원이나 학교와 계약을 하고 정기적으로 지원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느 정도 안정된 도시나 시내의 이런 기관들을 지원하는 것은 별 뜻이 없다. 그러나 원치 않아도 조선이라는 곳에 사업을 펼치기 위해서는 당국의 요청을 거절만 할 수 없다는 현실도 있다. 그동안 대북 지원 사업 자금 모금을 위해서 조선의 흉한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노력들을 해 온 것은 사실이다. 자금 모금을 위하여 보여주고 있는 조선의 처참한 현실들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유독 조선에만 있는 일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도 흔하게 있는 일로 내전이 있는 나라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나라들, 독재자가 있는 나라들에서 희생되는 어린아이들은 많다. 조선이 우리와 같은 민족이지만 적대국가여서 비판 의식이 강하고 갑자기 당한 기아 현상 때문에 도와야 한다는 바쁜 마음들이 지원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비참한 그림들만 보여주고 강조하는 무리를 가져오기도 했다. 참고로 북한과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비참 상을 몇 장의 사진으로 비교해 보고자 한다.

 

 

조선은 사회주의가 실현되면 이밥에 소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임은(김일성 주석) 말없이 떠나가고, 유토피아의 꿈이 깨어진 조선은 극심한 가난과 죽음만이 그들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1970년대까지 북한의 경제사정은 한국보다 더 낳아서 사회주의 나라가 더 살기 좋은 나라라고 선전할 만도 했지만, 1990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식량부족으로 굶어 죽는 전대미문의 재앙을 만나게 되어 조선 안의 처참한 실정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려는 노력들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한국 종교단체 가운데 기독교계에서 뜻있는 많은 분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돕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나는 성인들보다는 앞으로 우리 민족의 희망이 될 어린아이들을 건강하게 잘 크도록 돕는 일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마음대로 도울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 저 안쪽은 쉽게 열지 않고 있어서 그곳을 돕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실은 우리는 바로 그런 곳을 돕고 싶지만 허락을 받을 수가 없었다. 나라의 지원을 받는 특별한 기구(NGO, 기아, 복지, 의료, 등) 들은 조선 정부가 인정하는 지역에 있는 기관들에게 지원사업을 허가해 주는 편이다.

 

한국 사람들은 왜 라진선봉에 많이 몰리고 있을까?

그것은 쉽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라진 시는 조선 중앙정부에서 무역 개방구로 떼어내어서 알아서 살아가도록 한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교포들이 대체적으로 드나들기가 편한 지역이다. 그리고 라진 정부는 자기네 지역을 지원하는 일 밖에는 다른 곳을 소개하거나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한 번 다른 지역을 돕겠다는 요청을 했는데 아주 부정적이었다. 대개 교포들이 북한을 갔다가 왔다고 하면 라선 시를 가서 보고 온 것이다. 그것도 라선시 안에서도 극히 제한된 일부 지역을 보았을 뿐이다.  

 

조선 선교의 전략

라선은 조선이 세계를 향하여 열어 놓은 유일한 개방 도시이다. 경제 무역 개방 구는 아직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정치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특히 가장 가까운 이웃 한국에게 문을 열지 않아서, 이곳은 중국 사람들 세상이 되었다. 선교적인 면에서는 침묵 선교(Silent Mission) 또는 간접 선교(Indirect Mission)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곳이다. 현재 Silent Mission 전략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열매를 거두고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실례들은 모슬렘 나라들에서 볼 수 있다. 투자에 비하면 미미한 소득이지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대단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 한 영혼이 자기 민족을 위하여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때 일어나는 결과를 상상해 보면 가슴 설레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조선을 지원하는 것은 김정일과 집권자들의 배만 불린다는 말을 하면서 돕는 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종북주의 자들은 조선은 우리 민족이기 때문에 인도주의 차원에서라도 무조건 지원해야 한다고 떠벌려왔다. 종교인들 가운데서도 혹 자기 이름을 내려고 조선의 고위 당국자들을 만나는 대가로 많은 물자를 정부 당국에 주었지만 그것은 배고픈 인민들의 차지가 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집권자들에게 주는 방법보다는 지금 먹어야 하는 인민들에게 직접 줄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은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어떤 여성분은 나에게 자기는 평양 봉수교회를 찾아서 설교를 한다고 한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빈손으로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뇌물을 주고 얻는 특혜일 것이다. 배부른 자에게 더 주는 것보다는 배고픈 자에게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크게 많은 것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적은 것으로 적은 무리들을 돕는 손길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은 사실 많이 있다. 지금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렇게 일하고 있는 사역자들을 돕거나 소개를 받아서 필요한 곳에 필요한 어린 영혼들을 위하여 우리 손으로 직접 도울 수 있다. 조선은 이름 없이 알게 모르게 조용히 신음하고 있는 어린 영혼들을 돕는 것이 가장 바쁜 일이라고 믿는다. 특히 조선은 아이들이 영양 부족으로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서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가 만일 앞을 내다보는 선교전략을 가지고 있다면 기성세대보다는 자라는 조선의 새싹들을 잘 먹이고 키워야 한다. 이들이 곧 우리가 기대하는 장래의 선교 자원들이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캄캄한 바다를 비추고 있는 등대 같이, 사랑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필요한 것들을 도우면서 조용히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 지원의 대상은 조선 정부나 권력자들이 아니라 배고픈 어린 영혼 내지는 인민들이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살고 있는 반쪽 조국 조선은 정말 헐벗고 굶주리고 있다. 멀리서 조선의 정치나 이데올로기를 비판만 하지 말고, 본의 아니게 고난 받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직접 돕는 일에 우리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조선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는(마 6:3) 손길들을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도우면 좋을까?
조선에 굶주린 아이들을 위하여 도울 수 있는 길은 활짝 열려있다. 특히 개인이 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공신력이 있는 NGO나 비영리 단체들에게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캐나다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북한 어린이들을 위하여 양식 지원을 하고 있는 단체가 있어서 소개해 본다. 이 단체를 세우고 이끌고 있는 회장 Susan Ritchie 자매는 아버지가 한국 선교사로 서울에 살면서 여러 해 동안 선교사로서 일하였다. 딸 Susan은 한국에서 중학교? 까지 공부하여서 한국어가 능통하다. 캐나다에서 대학을 나오고 연방직원으로 있을 때 통역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받은 충격과 감동으로 “Fist Steps”라는 비영리 대북 지원단체를 만들어 지금까지 해주 등지에 있는 어린이 시설들을 지원해 오고 있는 귀한 단체이다. 정부에 등록된 단체로서 Income Tax Receipt을 만들어 주며, 지원하는 자금이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지를 언제든지 Home Page에서 볼 수 있도록 투명하게 조선 지원사업을 하는 단체로서 권할만하다. 더 관심 있는 분들은 google에서 “First Steps"를 치시면 이 단체가 하는 일들을 자세히 알 수 있다.

 

First Steps의 Home Page에서 옮겨 본다.


First Steps is a Christian organization committed to preventing child malnutrition in North Korea through programs that provide essential nutrients to young children. We exist to practically demonstrate the love of Christ in North Korea by providing sustainable, progressive, and life-enhancing nutritional relief. 

 

SUSAN RITCHIE
FOUNDER, EXECUTIVE DIRECTOR/ susan.ritchie@firststepscanada.org

In 2000, Susan Ritchie travelled to North Korea as an interpreter with a Canadian fact-finding delegation. on her trip, she encountered a nursing mother Kim Soon Nyo, who didn’t have enough food to feed her twins. As a mother with an infant son herself, Susan was deeply moved and made a commitment in her heart to serve the Lord in North Korea. on her return to Vancouver, she along with a few volunteers, launched First Steps and have been helping mothers in North Korea ever s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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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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