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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

어린이들을 위한 양식지원 5.31-6.1, 2013

★ 사진 날자는  미주 날짜를 아시아 시간으로 바꾸지 않아서 하루씩 늦게  나옴 

라선시 두만강 마을

여러 해 만에 다시 조선 라선 시를 찾게 되었다.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다. 이제 김정일 지도자의 시대가 지나가고 그 아들 젊은 김정은 위원장의 새로운 시대가(2011) 열린 지 3년째 뭔가 새로운 시대적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좀 가졌다.  이번 나의 조선 방문은 두만강 아래쪽 마을에 있는 어린이들(탁아소, 유치원)에게 양식을 가져다주려는 데 있었다. 몇 달에 걸쳐서 캐나다와 미국에서 쌀 6톤 정도 살 자금을 모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셨다. 얼마큼 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허락해 주시는 만큼 사리라 생각했다. 특별히 이번 나의 선교여행은 북한만을 위해서 가는 길이 아니고 17년간 살았던 우리의 선교지인 중국 목단강으로 가는 길에 계획된 일이다. 도문에는 우리가 목단강에서 중국인 선교를 하면서 조선족 형제를 세워서 개척한 조선족 교회가 있다. 나는 목단강 지역에서 여러 중국인 교회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두 주간 머문 뒤에 도문으로 내려왔다. 도문 조선족 교회에서 머물면서 우리말로 교제를 나누니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았다. 나는 북한에서 중국 돈으로 쌀을 사야 하므로 오늘 중국은행에 가서 캐나다 달러를 인민폐로 바꾸었다. 캐나다 현지에서는 캐나다 달러가 미국 달러보다 조금 위인데 중국에서는 미국 달러가 1:6.2 하는데 캐나다 달러는 1:5.7153 이어서 생각보다 낮았다. CN$ 6,000은 인민폐로 33,720원이었다. 한국 호남지역의 형제들과 조금씩 모은 것을 보태니 인민폐 9만 여원이 되어서 10돈의 쌀과 아이들을 위한 약품들을 좀 살 수 있게 되었다. 지난주일 알잔 중국 교회에서 내가 북한 양식 지원에 대한 교제의 시간을 가졌더니 모두 자원하여 모은 사랑의 선물이 810원이 되어서 약 사는데 보태기로 하였다.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축복해 주셨다. 훈춘에서 라선에 들어가려는 팀원들이 모였는데 모두 여섯 명이 되었다. 이번 조선 방문은 이틀간이다. 하루라도 더 있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가는 날은 이천십삼 년 오월 삼십일이다. 대북 사역에 종사하고 있는 두 사람의 차로 우리는 추웬허 두만강 해관을 지나 쭉 뻗은 두만강 다리를 달려서 북한 보세구역 안에 들어갔다.

 

 


나는 여러 해 만에 다시 건너보는 두만강이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안내원들이 오지 않아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보세구역 매점에 가서  여러 가지 기념품들과 약품들의 값을 물으면서 북한 여점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들에게 벽에 붙은 김정은 위원장 사진과 함께 붙은 화보들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찌그러지지 않게만 찍으면 된다고 한다. 전에 그 벽에는 김일성 부자가 서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이제는 김정은 사진과 여러 선전 화보들이 큰 한 장에 올려져 걸려 있었다. 나는 화보와 선물 가게도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찌그러지지 않게 잘 찍으라는 주의를 들음        

                                           

처음 북한에 들어가는 두 자매 분들에게 가게에 가서 물건 구경도 하고 그러라고 해도 겁이 나는지 그냥 자리에 앉아만 있어서 답답하게 보였다. 밖에 나가 두만강도 살펴보고 그러면 좋으련만... 반시간이 훨씬 지나서 두 지도원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함께 인사를 나누고 통과 절차를 밟았다. 지도원들이 우리 여권을 가지고 오자 우리는 X-ray 기계에 짐들을 통과 시키는 줄에 섰다. 주로 중국 사람들의 줄에 서는데 나는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좀 늦게 왔다. 그곳은 화장실이 밖에 나가 한참 걸어가야 하는 곳에 있어서 조금 시간이 걸렸다. 돌아와서 내 배낭을 통과하고 내 카메라 사진들을 모두 검색해 보고 내 지갑을 속속들이 뒤져 보고는 통과시켜서 들어왔는데  내 뒤에 따르던 김 자매의 가방이 X ray를 통과하자 검사관이 자매의 가방을 열어 뒤져 성경을 꺼내 들고는 왜 숨겨가지고 들어가느냐고 호통을 치기 시작한다. 성경이나 책을 가진 사람들은 미리 말하라고 했는데, 왜 신고하지 않고 숨겨가지고 들어가느냐고 큰 소리로 무슨 큰 죄를 지은 듯이 닦달 거리고 있었다. 자매는 모르고 그랬다고 하면서 초주검이 되어있는데, 김 자매를 데리고 들어가는 그 교회의 목회자도, 조선을 내 집처럼 드나드는 이해영이란 여성도 이 수모를 당하고 있는 자매를 위해서 말 한마디 거들지 못하고 그냥 지켜만 보고 있다. 보다 못해 내가 나서서 닦달 거리는 관리에게 처음 오는 길이라 모르고 그랬으니까 용서하시라고 몇 마디 거들었더니 성경을 들고 있던 손을 내리면서 안에 들어오라고 하여 신고서를 쓰고 보관증을 가지고 나왔다. 긴 중국 사람들 틈에 끼어서 저 앞에서 말하는 관리들의 말을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수도 있다. 평생 처음 좋은 마음으로 조선을 건너던 자매가 입국 신고를 톡톡히 했다. 지도자가 되어서 아랫사람이 무참히 당하고 있는데도 말 한마디 거들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 한심하게 보였다.

 

내가 다니던 그때 길은 흙먼지가 나는 신작로 이었는데, 지금은 중국이 아스팔트 길을 놓아주어서 이렇게 편하게 달리고 있었다. 라진시내에 들어와서 전에 내가 자주 머물렀던 남산 여관 광장에 가보니 전과 같지 않았다. “김일성 장군은 영원히 살아계신다” "20세의 태양 김정일 만세”등 크고 작은 포스터 간판들은 다 없어지고 그저 김정은 동지에 대한 간단한 것만 있어서 구세대는 가고 새 세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김정은과 비교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애고 오로지 한 사람 김정은만 내 세우는 것 같았다.

      

 

조선의 신인 김일성 주석의 동상이 전에는 홀로 있었는데, 이제는 김정일 위원장이 함께 있게 되어서 적적함이 덜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조선에는 두 신이 있는 나라가 되었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삼대세습의 신비로운 왕국을 이루고 있는 나라  조선에 머지않아 조선의 세 번째 신이 되실  삼 대 째 손자 김정은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중국 세계인물 잡지에 조선의 삼대 세습에 대한 신비로운 이야기를 싣고 있다. 

 

 

그리고 장애자 요양원이 있는 곳으로 갔다. 요양소는 산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서 시내와 바다가 바라 보이는 좋은 장소였다. 이 시설은 교포가 꾸려서 운영을 하고 있었다. 의사와 물리치료사들이 근무하면서 장단기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곳으로 우수한 시설이었다. 시설들을 돌아보며 이것저것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수고하는 직원들을 격려하였다. 탁구대도 있어서 직원들과 한참 탁구도 치면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요양원에서 준비한 점심을  나누면서 오래 만에 북한 여성들의 음식 솜씨를 맛볼 수 있었다.

                 

 

오후에 우리는 청계천을 거슬러 올라가서 미국교포가 하고 있는 신발공장에 갔다. 내일 찾아보게 되는 탁아소 아이들에게 줄 신발들을 사기 위해서이다. 바나바라는 상표를 단 어린이 신발들은 예쁘게 잘 만들어졌다. 나도 내 신발을 하나 사고자 했는데 내 발에 맞는 것은 없어서 섭섭했다. 내일 가져갈 신발들을 샀다.

 

쌀 10톤
내가 모금해 온 자금으로 쌀을 사려고 전에 우리가 거래하던 중국인 쌀집으로 가려고 하자, 호주 교포가 쌀가게와 약국을 한다기에 반가웠다. 나는 안내원들에게 쌀 10톤을 사서 몇 곳에 나누어 주려고 하는데 트럭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자. 여러분의 일정이 일박이일이어서 시간이 바쁘다고 우리가 가져다주겠다고 한다.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하는데 옆에 있던 현지 사역자 이해영 자매도 내가 책임지고 가져다주고 사진과 영수증을 보내 주겠다고 하므로 사도록 했다. 이 선교사는 미국인 남편과 훈춘서 커피 점을 운영하면서 대북 지원 선교를 하고 있는데 그이 말을 믿었는데, 영수증도 사진도 보내주지 않은 채 몇 년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섭섭했다.  

       

 

나는 쌀 10톤을 어디어디에 주어야 하는지를 지정하자, 안내원이 내가 3톤을 주라고 한 탁아소는 농사를 짓는 지역이라고 1톤만 주자고 제안해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쌀 10톤은 4곳에 나누어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오늘 조선 환율은 인민폐 1+1400원/ U$ 1=8200원이었다. 쌀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품질은 C급 정도인데 일 톤에 인민폐 4,400원으로 10톤에 44,000원에 샀다.

 

어린이들을 위한 약
내일 방문하게 될 두 곳의 어린이들을 위한 약을 좀 사고 싶어서 약국으로 가자고 하자, 안내원들은 우리를 자기네 약국으로 먼저 데리고 갔는데, 문이 닫혀 있어서 다른 약국으로 갔다. 이 약국은 쌀가게를 하고 있는 호주 교포가 하는 약국인데 좋은 약들이 있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소화제, 장염. 항생제 안약 들을 한 인민폐 2,000원 어치를 샀는데 양이 꽤 많았다.

        

 

영수증은 손으로 쓰고 계산을 해야 하므로 시간이 좀 걸렸다. 안내원 가운데 한 사람이 간이 좋지를 않아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는데 마침 약방 벽에 간에 좋다는 약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우리 팀원 가운데 미국서 오신 자매님이 그를 위해서 약을 사 주겠다고 하여서 분위기가 좋았다.    

 

쌀 영수증                                                                            약 영수증

    

물자 공급소
그리고 우리는 물자공급소에 갔다. 물자 공급소는 모든 인민의 생필품이 이곳을 통하여 공급되거나 팔고 있었다. 내일 가게 되는 탁아소 아이들에게 줄 운동복들을 함께 가는 팀이 샀다.

 

자유시장
자유시장은 전에 보다도 더 발전하여 시장 앞 길가에도 좌판이 길게 늘어서 있고 중국 시장을 방불케 했다. 시장 안에나 밖에서 파는 모든 상품은 중국산이다. 시장에서는 내일 가게 되는 두만강 유치원 선생들의 운동복을 샀다. 나는 저녁에 함께 먹을 해산물들을 좀 사려고 해산물 파는 쪽으로 갔다. 시장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어서 모두 좀 서들고 있었다.

         

 

나는 한 아주머니에게서 8마리 남은 꽃게를 떨이로 150원에 샀다. 해삼 몇 마리와 백합조개들도 조금 샀다. 안내원들이 저녁 먹을 곳으로 우리를 바다 가에 있는 조선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안내원들이 말할 때 wife라든지 영어 단어도 가끔 쓰고 하면서 전에 보다는 좀 부드러운 분위기를 느꼈다. 안내원들이 내가 이미 이곳을 여러 번 드나들면서 양식 지원한 것을 알고 고마워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우리의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해가 져 가고 있어서 모두 바다를 보려고 나가고 한 안내원과 나만 식당 안에 남았다. 나는 안내원에게 결혼했느냐고 물으니, 했단다. 애기는? 하니까, 이제 석 달 되었다고 한다, 내가 애기 옷을 한 벌 사주겠다고 하면서 인민폐 100원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더니 고맙다고 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저녁상이 차려졌다. 안내원들이 맥주를 먹고 싶다고 하여서 조선맥주를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다 떨어졌다고 하면서 중국서 생산하는 미국 버드바이저를 두병 가져왔다. 나는 지도원들에게 공화국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의 술을 먹어도 되느냐고 하였더니, 술이야 어떻습니까, 하면서 웃어넘겼다. 나는 아하 술과 이념과는 별개란 말이 군 하자. 안내원이 모두에게 맥주를 권하는데 모두 사양하고 권하려는 번거로움이 일어났다. 나는 안내원을 말리면서 모두 술을 못하니 내가 대표로 하겠다고 하면서 어울려주었다. 이곳에서 사업을 하는 교포가 생선회를 내어 주어서 고마웠다.

 

동해의 일품인 털게  호텔 

                                                         

안내원들은 우리에게 바닷물을 끌어드려 만든 수영장이 있는 호텔이 생겼다고 소개하여 거기서 쉬기로 하였다. 전에 내가 자주 머물렀던 라진호텔이 그리 멀지 않았다. 호텔은 아주 깨끗하고 좋았다. 수영하러 갔는데 물이 너무 차서 잠시하고 따뜻한 방이 있어서 들어가니 호텔 종업원 두 사람이 물에서 나와 쉬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니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고 물어서, 캐나다에서 왔다고 하니 아주 멀리서 오셨습니다. 캐나다도 이런 바닷물 수영장이 있겠지요, 하고 묻는다. 바닷물 수영장보다는 도시마다 수영장이 잘 발달되어있고, 한국에는 이런 바닷물 수영장이 많다고 하였다. 그들은 자기네 시설이 한국과 비교해서 어떠냐고 묻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좋은지 잠시 생각하게 해 주었다. 나는 그저 비슷하다고 하면서 한국은 물이 온 냉탕과 사우나 시설도 있고 모든 시설이 함께 붙어 있어서 사용에 편하다고 설명하여 주었다. 한 사람이 여기도 사람이 많으면 물을 데운다고 하였다. 여기는 수영장과 민물로 몸을 씻는 데가 두 층이나 지하로 내려가게 되어 있어서 몹시 불편하였다. 목욕탕 관리하는 청년은 DVD Player로 한국영화를 보고 있으면서 내가 들어가니 조심하는 눈치였다. 아마 자기들끼리는 주고받고 편하게 보는 것 같았다. 이만큼 사회 환경이 부드러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하여 라진에서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아동 절(6.1)
오늘은 6월 1일 아동 절이다. 사회주의 나라 중국과 조선은 어린이날을 아동 절이라고 부른다. 해가 떠오르는 동해바다를 바라보면서 아침을 맞이하였다. 아침 햇빛을 쏘이며 몸을 풀고 있는데 안내원이 나와서 아침 인사를 한다. 나는 그와 그의 건강과 그의 가정에 대해서 묻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실크 스카프에 시계 하나를 싸서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부인에게 전해 주라고 하니 고맙다고 했다. 라진 앞바다에 떠 있는 대초도와 소초도가 짝을 이루면서 그 사이로 떠오르는 붉은 해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호텔의 아침상에 나온 차는 처음 먹어보는 것인데 순하고 좋아서, 복무원에게 무슨 차냐고 물으니 쑥차라고 한다. 쑥차를 어떻게 만들었느냐고 물으니 매점에서 판다고 한다. 조선은 들에 흔한 쑥에서 진액을 뽑아 차로 먹도록 생산하고 있었다. 매점에 나와 있는 조선 먹을거리들을 돌이보고 쑥 액 몇 봉을 샀다.

          

 

안내원들은 우리를 데리고 시내에 있는 출입국 사무소에 가서 오늘 떠난다는 신고를 하고 여권에 도장을 받았다. 북한은 들어올 때 국경선에서 또 시내에서 24시간 안에 도착신고를 하고 나갈 때 또 도장을 받고 국경선에서 다시 도장을 받으므로 여권에는 도장이 네 번 찍히게 되어 번거로웠다. 우리는 어저께 주문한 신발을 가지러 신발공장으로 갔다. 마침 사장이 있어서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연세가 많아진 지금 모든 것을 정리하여 자본과 기술을 이곳에 가지고 와서 남은 삶을 그리스도의 빛이 되려고 노력하고 계신 장로님이셨다. 지난번 신발을 미국에 한 컨테이너 실어 보냈는데 화물선이 태평양 바다 중간에 갈 때 북한에 대한 유엔 제재가 내려져 샌프란시스코 항에 내려놓고 통관이 안 되어 변호사까지 내 세웠지만 통관이 안 되어 선적비만 매일매일 물다가 부득이 중국 천진으로 가지고 와서 다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다른 교포가 하고 있는 두유공장으로 갔다. 여기는 콩으로 만든 콩물을 작은 종이 팩에 담아서 탁아소 유치원으로 배달을 하는데 시정부에서 더 많이 요구하고 있어서 새 설비를 들여 놓았는데 자금 사정으로 요구하는 만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아침에 만든 두부와 두유를 맛보도록 내놓아서 우리 모두는 콩 냄새 물씬 풍기는 신선한 두유와 바닷물로 만든 두부를 맛보았다. 이제 라진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두만강 마을로 갔다. 그동안 내가 라선에 드나드는 날 동안 시밖에는 허가를 주지 않아서 못가 보다가 이제 함경북도 최북단에 있는 국경선 마을을 가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민통선 지역 같아서 아무나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다. 허가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넓은 골짜기들에는 논들이 두만강까지 가득히 펼쳐져 있어서 풍요롭게 보였다. 여기 농사만 잘 되어도 이 지역 주민들의 양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평안리
골짜기 어구에 있는 작은 농촌마을이다. 집들은 집집마다 긴 굴뚝들이 높이 솟아 있고 집들이 너무 오래되어서 낡고 낡은 그대로였다.

         


함께 가는 팀의 단체가 3만 불을 드려서 북한 사람들이 지었다는 탁아소는 원체 허술하게 지어서 헐어버리고 다시 지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탁아소 여자 소장은 만나자마자 페인트칠도 해야 하고 뒤에 무엇을 지어야 한다고 필요한 경비를 요구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하여 푸짐한 선물들과 약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아동 절이라 아이들에게 나름대로 새 옷을 입히고 탁아소가 끝나자 밖에는 카메라 한 대를 가진 아저씨에게 엄마들이 아이들 기념사진을 찍게 하고 있었다.

 

아동절 기념사진 찍는 사진사 
                                                        

두만강 유치원  운동회

신발과 옷가지들을 주고 우리는 이제 두만강 동 유치원으로 가게 되었다. 유치원은 마침 운동회를 하고 있었다. 오색종이 줄들을 늘어 매 놓고 학부형들이 가득모여 열띤 응원들을 하고 있었다. 한국 같으면 먹 거리 장사들이 많을 텐데 아주머니 두 분이 긴 비닐 주머니에 색 물을 타서 넣은 주스 같은 것을 열어놓지도 못하고 덮어놓고 팔고 있었는데 아무리 지켜보아도 사 먹는 아이들이 없는 것 같았다. 볼거리가 흔하지 않은 이런 곳에서는 자녀들의 운동회는 온 가족과 함께 즐기는 마을 잔치다. 운동회를 지켜보면서 우리 초등학교 그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1등 2등 3등 상품들

  

               

                

사진을 찍다가 검은 교복에 빨강 목도리를 한 여학생들을 찍었는데 깜짝 놀라 모두 달아난다. 남자 아이들이 그 옆에 있어서 사진을 찍고 몇 학년이냐고 물었더니 중학교 2학년이라고 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남자나 여자 아이들의 몸체가 초등학교 4-5학년 정도이기 때문이다. 만성 영양 결핍으로 키가 자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이렇게 가까이 말도 해 보니 맑고 순진한 이 아이들의 장래가 걱정스럽다.   

           

          

그리고 유치원 교장 아버지라는 분이 내게 와서 부탁한 돼지를 사왔다고 하여서 뒤에 가 보았다. 함께 가는 교회에서 아침에 $60을 주고 한 마리를 사서 동리 잔치에 쓰라고 한 모양이다. 한참 뒤 내가 교문 밖에 나가 보니, 그 돼지를 보여 준 뒤에 싣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잡으러 가느냐고 묻고 나도 가볼까요 하고 몇 걸음 따라가다가 돌아왔다. 내 생각으로는 잡으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돌려주려고 가는 것 같았다. 나 같으면 잡은 돼지를 내 앞에 가져오라고 했을 것이다.

 

 

운동장에는 같은 유치원 또래의 꽤 재재한 아이들이 구경을 하고 있는데 선생들이 그들을 밖으로 내 쫒는다. 이 애들은 누군가? 왜 이 애들은 이 유치원에 다니지 못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김 사장에게 물으니 부모들이 없거나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는 집의 아이들일 수도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학부형들은 나름대로 중국서 건너 온 옷들을 입고들 있어서 사는 것이 조금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학교 한쪽 나무 그늘에 얼굴이 꽤 재재한 4-5명의 여인들이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서 구경을 하고 있어서 이들은 누구인지 궁금하였지만 안내원 하나가 저쪽에서 나를 살피고 있기 때문에 가까이 가서 말을 건네지 못하였다. 몹시 지치고 시장한 듯 보였다. 무엇이든지고 좀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한 시간 정도 머물고  이제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하여 두만강 역으로 나왔다. 이 두만강 역은 북한의 북쪽 마지막 역으로 소련으로 건너가는 역이기도 하다. 새로 역 건물을 짓고 있었다. 오는 10월에 소련과 중국이 철로 개통식을 하기위해서이다. 중국과 소련은 이미 라진 항에 투자하여서 자기네들만의 선착장을 마련하여 해외 무역을 계획하고 있었다.    

 

                                                                              소련과 철도 연결을 위해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는 두만강 역

  

 두만강 역 맞은편에는 김일성 장군의 빨치산 항일 투쟁의 벽화가 무게 있게 그려져 있다.

             

숭전 대
현지에서 사업하시는 분은 나에게 이순신 장군의 기념비가 있는 숭전 대가 가까운 곳에 있다고 알려주어서 내가 가보자고 청하였더니 안내원들도 좋다고 하여 식당에 우리 점심을 주문해 놓고 우리는 숭전 대로 갔다.  숭전 대에 오르자 시원한 동서남북으로 툭 터진 들과 하늘이 우리의 맞아주었다. 백두산(白頭山, 2744m)의 동남쪽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동쪽 기슭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두만강은 521Km를 달려서 이제 동해로 들어가면서 그의 길을 다하고 있었다.
두만강 건너 소련 핫산이 보이는 높은 언덕에 아름다운 누각들을 지어 숭전 대라 이름 하여 이순신장군을 기리고 있었다. 이곳에는 이순신 장군의 4대와 7대 후손들이 만든 기념비도 보관하고 있었다.  중국 관광객들이 많이 들른다고 한다. 여기에서 잠깐 숭전 대와 이순신 장군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이 한목숨을 내어 놓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활동했던 무대를 돌아보게 되어서 기뻤다. 

            

           

            

 

만호 이순신
년(선조9년) 32살의 나이에 무관에 급제한다. 1586년(선조 19년) 함경도 조산보 만호(지금의 대령)로 근무하면서 두만강 하구 녹둔도(鹿屯島) 둔전관을 겸하고 있었다. 이 녹둔도는 그 당시 두만강 하구에 떠 있는 섬으로 곡창지대였다. 강 건너편에 있는 여진족의 침입과 약탈로부터 녹둔도를 지키기에 병력의 역부족임을 알고 수차례에 걸쳐 직속상관인 함경도 북병사 이일(李鎰)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1587년 8월 오랑캐가 녹둔도를 기습해 10여 명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났다. 이순신은 곧바로 반격을 시도해 다수의 오랑캐를 사살하고 또 포로로 잡혀가던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러나 북병사 이 일은 병력 증원 요청을 무시한 자신의 과오를 숨길 목적으로 이순신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패전한 장수는 아니니 백의종군하라”는 처분을 내린다. 이순신은 백의종군(白衣從軍)하다가 1588년 1월 시전부락 전투에 우화 열장(右火烈將)이란 지휘관 직책으로 참전해 싸우면서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고 전투에서 승리한다. 이 공로로 백의종군 처분에서 벗어나 복직하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이에 북한에서는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하구가 보이는 이 언덕 위에 장군을 기념하기 위하여 “숭전 대”를 지었다.

 

녹둔 도(鹿屯島)   
녹둔 도는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으로 조선과 소련 사이에 있는 섬이었다. 세종 때 6진 개척으로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두만강에서 흘러내려 오는 퇴적물이 연해주와 녹둔도 사이에 쌓이면서 소련 쪽으로 붙어버렸다. 1860년 청나라와 소련이 베이징 조약에서 국경선을 정할 때 녹둔 도가 소련으로 넘어가 버리므로 조선의 관할에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1990년 북한과 소련이 국경선 조약을 맺을 때 북경조약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19세기 중엽에 그린 심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녹둔 도가 따로 떨어져 그려져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관광안내원으로부터 이순신장군의 기념지 숭전 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순신 장군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장군을 그려보는 타임머신을 타보기도 했다. 나는 한 많은 사연을 안고 흘러 흘러 동해로 들어가는 두만강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기념사진을 찍어보았다.   

 

그리고 기념사진들을 두루두루 찍고 두만강 식당으로 돌아오자 따끈한 점심상이 차려져 있었다. 두만강 물고기들로 만들어진 요리들은 맛이 좋았다. 점심을 마친 우리는 청학 동으로 왔다. 청학동 물은 북한에서 가장 좋은 물로 소문난 미네랄 물이라고 한다. 우리는 땅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을 마셔보았다. 내 느낌으로는 물이 담백하고 보통 물보다는 무게를 좀 느끼는 듯했다. 나무들이 우거진 개울가에 늘어선 농가들이 평화롭게는 보이는데 삶이 넉넉지 않음이 풍겨 나고 있었다. 여기에 어떤 교포가 투자하여 3층 요양원을 짓고 있었다. 청학동 부근의 40-50호의 작은 자연부락들이 골짜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한 마을에 탁아소 건물이 없다고 지어주기를 청해 왔다.

 

원정 해관
이 지역을 돌아보면서 도울 일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원정해관에 왔다. 들어갈 때 같이 가방을 다시 X-Ray 검사대를 통과시키고 나서 내 가방을 뒤져서 종이쪽지 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 종이에는 쌀과 약을 살 때 값을 적고 내 나름대로 계산하느라 어지럽게 낙서한 것이어서 이렇게 저렇게 보아야만 했다. 한참을 보더니 주고는 나의 카메라에 무엇이 찍혀있는지를 조사하고 있었다. 얼마를 보다가 중국 쪽에서 찍은 것이 나오니 시작하니까 카메라를 건네준다. 한국계 미국인이 이 카메라 검사에 걸려 억류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다시 또 와 달라는 안내원들의 간곡한 부탁을 뒤로하고 그동안 나의 7번째의 조선 방문을 마치고 있었다.
언젠가 이 다리는 누구든지 마음대로 건너다니는 자유와 평화의 다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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