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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

우산 만들기

우산 재료 보내기 

조선에 우산 재료를 보내 조립하여 팔아서 그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도록 계약을 하게 되어 마음에

그리던 일이 실제가 되어서 기쁘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우산 재료를 살 수 있는 공장을 찾아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다행하게도 지난해에 이런 마음이 있어서 이미 조사를 해 놓아서 이 일을 시작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지난해 나는 우산 생산 공장을 찾으면서 놀라움을 경험하였다. 일억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는 이 넓은 동북 삼성(흑룡강, 길림, 요녕성)에 우산 공장 하나가 없다는 것이 정말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모든 우산은 저장성 항조 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쪽에서 우산 사업이 발달해서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2600Km가 넘는 길을 오가며 들어가는 시간과 경비도 적지 않았다. 우리의 수고와 투자가 어려움 가운데 있는 동포들을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기쁠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도울 자를 보내 주셨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는 전에 가 본 적이 있는 저장성 항조(杭州) 소산에 있는 쟈루 우산 공장을 찾아갔다. 사장은 반갑게 맞이하여 주면서 부품을 사는 일을 의논하였다. 우리는 북한에 보낼 우산 재료와 천까지 전부 합쳐서 중국 돈 10원이 넘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생산하는 쟈루 우산은 중국에서도 중간 정도 이상 속하는 것으로 최소 20원은 되어야 한다고 하여서 마음에 부담이 되고 있었다. 다음 날 사장은 나에게 이우(义乌)에서 우산 사업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나를 전화로 소개했다면서, 가면 10원 정도의 물건을 사도록 준비를 해 줄 것이라고 안내를 해 주어서 고마웠다. 나는 길에 나와서 이우로 가는 버스를 타고 한두 시간 달려서  중국에서 생필품의 제일 큰 도매시장이 있는 이우라고 하는 도시에 내렸다. 없는 것이 없는 소상품 도매시장 이우는 도시 자체가 도매시장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곳에서 물건들이 온 세계로 나가고 있었다.

      


내가 가자 우상 사업을 하는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가격이 다른 십여 종류의 재료들을 보여 주었다. 전체 재료가 8원 정도에 천 값을 보태면 10원정도 되고 열차로 연길까지 보내는 화물비, 연길서 북한 라진까지 가는 차 대절비 등을 다 합해서 우산 한 개당 13원 정도가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 정도면 제일 낮은 가격이고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기로 하였다. 앞으로도 주문 내용을 Fax로 보내고 물건 값을 통장으로 보내면 확인하는 대로 물건을 보내 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시험 삼아 우산 500개분의 부속과 천을 사서 열차 화물에 가서 연길로 부쳤다. 열차 수송로가 좋지 않았다. 이우에서 연길로 바로 가는 화물 수송편이 없어서 선양(심양)에서 물건을 한번 옮겨 싣게 된다고 하여서 시간이 며칠 더 걸린다고 하였다. 이제 물건을 부치고 나니까 조선을 지원하는 일이 실감이 나는 듯했다.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는 저 백성들이 일이 이렇게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들이 있는지를 알고나 하고 있는지... 조선을 돕는 일을 시작하면서 조선 관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볼수록 정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계가 도와주겠다고 가져다 바치는 현실을 보면 북한 인민들이 말하듯이 김정일은 영명한 지도자라는 말이 무색하지는 않은 것 같다. 조선은 국가 지도자가 인민을 먹여 살리려고 도와 달라고 세계에 구걸하지 않는 자존심이 센 나라다. 그저 얻어먹으면서도 우리 식대로 산다는 자기 최면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다. 가져와도 제일 좋은 것으로 가져오기를 요구하고 가져다주고도 잡히고 쫓겨나는 나라, 조선은 재미있는 나라다. 목단강에 돌아와 연길 북한 대표부에 우산 재료가 다음 주쯤에 도착할 테니까 받아서 나진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니 고맙다고 하면서 잘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조선대표의 경비 요구
연길에 있는 조선 대표부에서 전화가 왔다. 우산 재료와 천을 찾아서 라선으로 보냈는데 차량비와 상차 비 인건비가 들었다고 돈을 보내 달라고 한다. 내가 9월에 나진에 들어가니까 그때 주겠다고 하자, 지금 우리가 예산이 넉넉지 않아서 바로 주셨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래서 우체국 통장이 있으면 번호를 주면 통장으로 바로 보내겠다고 하니까 우체국 통장은 없단다. 그러면 어느 은행 통장이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하니 나중에 연락하여 주겠다고 하였다. 외국에 나와 있는 공관이 인민폐 3,000 여원이 없다고 이렇게 재촉 질인지 알다가도 모를 나라였다. 한 가지 답답한 것은 우리가 직접 명예군인 공장 간부에게 전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고자 하면 라선시 협조 국에 연락하여 알고 싶은 내용을 전하고 그다음 날 다시 전화해서 그쪽의 내용을 들을 수 있는데, 어떤 때 우리 담당이 자리에 없거나 출장을 가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여서 전화료가 많이 들기도 했다. 그 공장에도 전화는 있지만 국제 전화는 암 되어 있어서 우리가 필요한 일들을 직접 연락할 수가 없어서 아주 불편했다.

 

다시 요구하는 우산재료
몇 주 뒤 협조국에서 우산을 다 만들었다고 재료를 더 보내 달라는 전화가 왔다. 만들어서 어떻게 하였느냐고 물으니 시장에 가서 도매로 넘기기도 하고 팔고 있다고 하였다. 조선 돈으로 600원 정도에 판다고 하였다. 우산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분들인데 견본을 보고 만들어 낸 것을 보면 손재간들은 있었다. 우리는 이번에는 양을 늘려서 우산 2,000개의 재료를 사서 보냈다. 우리는 일 년에 15,000개 정도의 우산 재료를 지원하도록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8월 하순에는 3,000개의 우산 재료를 보냈다. 그동안 그분들의 기술이 발전하여서 만드는 속도가 빨라졌다.
  

선봉 우산공장 방문
가을이 오자 그동안 보낸 우산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잘 만들고 있는지 판매 형편 등을 살펴보기 위하여 라진에 들어가려고 권하 중국 해관에서 출국 수속을 하고 나가보니 몇 달 사이에 제도가 바뀌어져 있었다. 이제는 두만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가지 못하게 하고 버스를 타고 두만강 다리를 건너가도록 하고 있었다. 차 삯은 중국 돈 5원이었다. 세 사람이 타자 버스는 떠났는데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자주 다닌다고 한다. 

    

 

돈 버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한 많은 두만강 다리를 걸어서 걷는 일은 추억이 되고 있었다.  선봉에 있는 공장에 도착하자 간부들이 반가이 맞이하여 주었다. 우산 조립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잘 만들었다. 특히 우산 천 재단이 쉽지 않았을 텐데 견본만 보고 잘 만들어서 반갑고 마음 놓고 재료를 보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 올 때 저들이 만든 우산 여러 개를 기념으로 가지고 나왔다. 두 밤을 선봉에서 보내고 나올 때 안내원이 나에게 부탁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 부서에 복사지가 딸린다고 다음에 들어오실 때에 A4 복사지를 좀 갔다 달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기로 하였지만, 무슨 나라가 국가 기관에서 쓰는 종이도 제대로 대 주지 못하고 이렇게 개인에게 구걸하여 나라를 운영하며 살고 있는지 한심하기도 하였다. 

 

팽 선생과 함께 라선으로
우산 만들어 내기 시작한지 몇 달 뒤 팽 선생이 선봉 우산 생산을 돌아보시고자 먼 길을 오셨다. 우리는 함께 훈춘으로 가서 호텔에서 쉬면서 앞으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의논하였다. 전에 안내원이 부탁한 A4 복사지 500장들이 몇 통 샀다. 팽 선생은 복사지는 왜 사느냐고 물어서 이야기를 드리니, 종이까지 부탁하느냐고 하셨다. 나는 팽 선생에게 두고 보시라고요, 이제 더 나가면 별별 것을 다 갔다 달라고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나에게 영한사전, 고대 교수 쓴 경영학. 서울 대 교수가 쓴 마케팅, 등 여러 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마침 그때 미국에서 들어오는 선생이 계셔서 그분에게 부탁을 하였더니 생각보다 여러 권의 책을 더 가져와서 전해 준 적이 있는 데 계속해서 부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런 자료 소재들은 환하게 파악하고 있는데 놀랐다. 전에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나자, 안내원은 나에게 다음에 들어올 때에 WTO에 대한 책들을(한국어와 중국어) 가져다 달라고 주문을 Fax로 보내온 적도 있었다. 의례 그들의 주문은 우리가 그냥 갔다가 주는 줄로 알지 책값을 주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뭐든지 공짜로만 알고 있고, 어떤 때는 우리가 자기들의 봉인 줄로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침 일찍 중국 해관에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원정 북한 해관에서 안내원을 만났다. 선봉으로 들어오는 차에서 안내원은 우리에게 우산 조립을 위하여 20명이 붙어서 일을 하는데 그동안 일거리가 없어서 오래 동안 놀던 공원들이 좋아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주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선봉 공장에 도착하니 우산들을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몸이 불구인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고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팽 선생은 가방을 열더니 조그마한 통에 든 바셀린을 꺼내서 일하고 있는 공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씩 나누어주면서 겨울에 손 트거나 거칠 때 쓰면 좋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참 이 사람들은 복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이 좋은 바셀린을 받게 되다니... 다 나누어 주고 나에게로 오시기에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으니 아직 10통이 남았다고 한다. 안내원들도 하나씩 주어야 하고 오늘 여기 없는 지배인과 간부들도 하나씩 주어야 한다고 말씀드리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다. 팽 선생은 오후에 밀가루나 곡식을 사서 당신 손으로 직접 전해 주겠다고 하시기에, 그렇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아직 사업을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되니까 그런 일은 자세히 알아보고 다음번에 하도록 준비해 보자고 말씀드렸다.  

다음 날 우리는 공장 사무실에서 간부들과 만나서 회의를 하였다. 우리는 공장서기에게 그동안 팔아서 모은 우리 몫을 달라고 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고 묻는다. 우리가 알아서 쓰겠다고 했더니 회계에게 돈을 가져오라고 하다 그는 돈을 가지러 나갔다. 당 비서는 우리 마을에도 양식과 식품 여러 가지를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많다고 자기 마을을 위하여 써 주기를 바라는 말들을 하였다. 나는 우리 둘이 있는 시간에 팽 선생에게 이번에는 돈을 그냥 맡겨 놓으셨다가 다음에 오실 때 사용하도록 해 보자고 말씀을 드렸는데 대답이 없으셨다. 그러는 사이에 회계 직원이 낡은 돈뭉치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조선 돈 만 육천 원 정도라고 했다.

 

도와주러 나가기

우리는 돈을 받아 가지고 안내원들과 선봉 시내로 들어와서 팽 선생은 안내원들에게 이 돈으로 양식을 사서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가서 얼마라도 나누어 주고 싶다고 의논하자, 안내원들은 그렇게 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고 난색을 나타냈다. 그러자 팽 선생은 병원으로 가보기를 원하여 선봉 병원에 가서 병원장을 만났다. 안내원들이 우리를 잘 소개해 주었다. 팽 선생은 원장에게 혹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거나 약을 못 사 먹는 사람이 있으면 좀 도와주고 싶다는 뜻을 말을 하자, 병원장은 말씀은 고마우나, 치료와 약은 나라에서 다 지원하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실제로는 약도 없고 형편없이 어려우면서도 간부들은 체면을 세우면서 겉치레 인사만 하고 있었다. 외부 사람이 좀 도와주려고 가까이하면 이 사람들은 항상 원칙대로 말한다. 그것은 국가와 김정일 동지의 자존심 문제도 있고 자신이 정치적인 비판을 받지 않으려는 방어적이고도 훈련된 능숙한 모습들이었다. 외국의 후원을 개인적인 신분으로 받았다가는 무슨 비판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정부 요원인 우리의 안내원 두 사람이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돕는 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계통을 통해서 또는 조직을 통해서 해야 하는 곳인데 팽 선생은 아직 조선의 생리를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계셨다. 우리가 안내원에게 우리의 도울 뜻을 의논하여 그들이 준비한 곳으로 가서 돕는 일은 가능해도, 이렇게 무턱대고 돈만 가지고 나서서 되는 일이 아닌 나라인지를 모르고 무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병원을 나섰다. 나는 처음부터 이 분이 여기 실정에 맞지 않은 일을 하려고 하여서 처음에는 말렸는데, 당신 생각대로 하고 싶어 하셔서 어쩔 수가 없었다. 자기 식 대로 사는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하려다가는 낭패를 보는 수도 있다. 양식 나누어 주는 일은 지도원들이 반대하고 병원은 나라에서 다 한다니까 손에 가지고 있는 조선 돈 두 뭉치는 쓸데가 없었다. 서로 다 미안하게 된 것이다. 팽 선생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서 이제 떠나야 할 시간도 가깝고 아까 공장 당 비서가 말한 대로 그 촌에도 도울 사람이 많다고 하니까 거기에 돈을 도로 주어서 양식을 사서 나누어 주라고 하자고 권하니 그러자고 하여 다시 공장으로 가서 당 서기와 지배인과 직원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돈을 내놓으면서 팽 선생이 그들에게 이 마을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양식을 사주는데 쓰라고 하셨다. 그러자 모두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반가워하였다. 우리는 그 좋아하는 모습들을 뒤로하면서 떠났다. 어떤 노동자는 선생님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노동자를 사랑하시는 분들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가 다 말은 않지만 기독교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안다고도 말한다.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가끔 한 마디씩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특권이었다. 어려움을 겪는 동포들을 돕다가 보면 어느 날 민족 대 통합의 날이 올 것이다.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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