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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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번 조선 나들이는 1998년 가을이 깊어가는 때였다. 중국의 들에는 황금물결이 넘실거리고 있고, 키가 넘는 옥수수밭에는 황금알들이 가득히 담긴 넉넉하고 넘치는 수확의 계절이다. 산과 들의 자연 만물들은 아름다운 색깔의 옷들을 천천히 갈아입으며 한 해를 마무리해 가고 있었다. 나는 이때부터 여러 해에 걸쳐 조선을 드나들면서 개인적으로 조용히 그리고 아주 적은 일들로 도움을 주려고 애써 보았다. 나는 처음 찾아보게 되는 반쪽 조국, 우리가 만나게 될 분들을 위하여 수십 벌의 옷들과 겨울용 두꺼운 양말들을 많이 샀다. 그리고 한국에서 보내온 양복들을 천으로 된 중국 큰 배낭에 눌러 넣어 둘러메고 양손에 들고 도문으로 내려왔다. 염 사장과 허 군을 만나 이제 조선으로 건너가는 일을 의논하였다. 그때 중국에서 나선까지 다니는 정기 교통편이 없으므로 차를 준비해야 했다. 허 군은 나에게 캐나다 사장으로 소개한 체면도 있고 하니까 북경 지프차 정도를 빌려 갔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좋은 차를 빌리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나는 겉치레보다는 내용을 더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멀지도 않은 곳이니 싼 차를 빌리자고 했다. 그랬더니 우리가 지금 타고 있는 이 털털되는 택시 차밖에 없다고 했다. 이 차 운전사는 자기 집안 동생으로 하루에 300원 이상 버는 차인데 자기가 200원에 빌리도록 해 보겠다고 하였다. 차는 10년도 더 되는 낡은 차로 뒷문 하나도 고장이 나서 안 열리고 있었고 에어컨도 망가져 있었다. 현재는 이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되어 이 차를 쓰기로 하고 내일 아침 떠나기로 하였다.
아침 10시 회사에 모이니 원래 3명이 가기로 되어 있던 인원수가 5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특별히 가진 예산은 없었지만 나는 어려운 아이들을 주려고 시장에 가서 물건들을 사려고 하는데 말린다. 처음 가는 길이어서 우선은 잘 건너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지금 내가 준비한 것만 가지고 가자고 하여서 한 뭉치의 사탕을 샀다. 사진기도 가지고 가지 말자고 하면서 현지 직원에게 있는 것을 쓰면 된다고 하여 놔두고 가기로 했다. 도문을 떠나서 두만강 변을 따라 달리는데 두만강 건넛산 위로 횃불 모양의 탑이 보인다. 이 탑이 보이는 곳은 함경북도의 온성군 왕재산(239m)인데, 1933년 3월 11일 김일성 주석이 이 왕재산에서 조선 인민 혁명군의 한 부대를 데리고 와서 왕재산 회의를 소집한 그곳에 왕재산 항일혁명사적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훈춘에 도착하여 허 군은 건너가서 마실 물은 여기서 사 가는 것이 좋다고 하여 물 두 상자를 샀다. 그리고 저쪽 사람들과 교제를 위하여 담배와 맥주 그리고 백주를 얼마간 사 가는 것이 좋다고 하여서 그러라고 하였다. 회사 쪽에서는 우리가 조선에서 머무는 동안 먹어야 할 고기와 부식품들을 넉넉히 샀다. 훈춘에서 두만강 변경(국경선)까지는 도로 공사가 한창이어서 길이 나쁘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야 조선이 건너다 보이는 경신 향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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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하 촌 해관(출입국 관리소)
권하 촌 해관(출입국 관리소)에는 조선으로 건너가는 많은 중국 차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 같이 아직 길들이 아스팔트가 아니고, 출입국 건물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을 때여서 임시 건물에서 수속하느라 무질서하고 혼잡하였다.)
중국에서 조선을 잇는 낡은 다리가 길게 뻗어 있고 그 아래로 두만강은 소리 없이 흘러 동해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다리는 일본 군국 제국주의자들이 정복한 우리나라를 발판으로 중국을 집어삼키려고 놓은 군사 목적의 침략과 수탈의 다리였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라고 두 시 반까지는 쉰다고 했다. 무슨 나라가 점심시간을 이렇게 오래 가지고 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차가 줄을 이어 기다리고 있었다. 차들 대부분은 쌀, 밀가루, 옥수수들을 실어 나르는 6-10톤 트럭들이었고 자가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2시 반 국경선 철문이 다시 열리고 사무가 다시 시작되자 출국 신청을 하였는데 내 초청장에 문제가 생겼다. 여럿이 가는 초청장의 명단들은 중국 회사 직원들에게는 문제가 없는데 내 경우는 중국 쪽에서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내부용 초청장보다는 외부용 정식 초청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 방문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조선만큼은 그쪽의 초청장이 없는 경우에는 출국시키지 말아 달라는 요구 때문이라는 이유를 설명하여 주었다. 3시가 넘어서 허 군과 염 사장 두 분이 내 초청장을 만들어 오기 위하여 우리 일행을 놔둔 채 걸어서 두만강 다리를 건너갔다. 나는 저분들이 조선에 건너가서 내 일을 보고 돌아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 틀림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 시간 다른 볼일을 보기로 하였다. 1994년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여기 권하 촌에 와서 조선족 가정교회 처소에서 점심을 잘 대접받은 적이 있는 김 자매의 집을 방문하고자 두 여직원을 놔두고 떠나 자매의 집을 찾아가 보니 낯선 중국인이 살고 있었다. 김 자매 가정 소식을 물으니 2년 전 집을 팔고 훈춘으로 이사를 했다고 하여 섭섭했다. 신작로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다시 돌아와서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강을 건넜던 두 사람이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우리는 서둘러 국경선 두만강 다리에서 출국 도장을 찍고는 바로 차를 몰아 두만강 다리의 긴 대열 마지막에 섰다. 차들이 많아서 빨리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리 가운데서 나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여직원 하나를 남겨 놓고 먼저 가서 입국 절차를 밟는다고 세 사람은 걸어가고 내가 차를 운전하여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내가 건너가고 있는 다리는 나와 인연이 있는 다리였다. 이 다리는 일본 제국주의가 망한 1945년 8월 15일 뒤로는 쓰지 않고 있던 다리였다.
숨겨진 두만강 다리
3년 전으로 돌아간다. 1994년 중국에 처음 와서 권하 촌을 방문하였을 때 김 자매 집은 집회 장소였다. 교제 가운데 자매가 이곳 경비대에서 하루 세끼 밥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조선이 보이는 두만강을 보고 싶다고 하였더니, 우리를 데리고 자매가 일하는 부대로 갔다. 부대는 두만강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휴식하는 군인들이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놀다가 낯선 민간인들이 자가용을 타고 부대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모두 긴장하면서 우리에게로 온다. 군인들이 자기들에게 밥 해주는 자매가 내리는 것을 보더니 반가워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 일행은 셋이었는데 목단강에서 온 친척이라고 소개하여 부대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지금 우리가 건너고 있는 다리가 보였다. 나는 다리를 가보고 싶다고 하였더니 자매가 선임자와 의논하였는데 좋다고 하여 군인들의 안내로 다리 가운데까지 갔다. 가운데는 굵은 쇠사슬이 가로질러 매여 있었다. 군인들이 나보고 여기서부터는 더 못 간다고 앞에서 경계하고 있었다. 저 건너 조선 쪽에 몇 사람들이 보이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다리 가운데까지 와서 더 갈 수 없는 조국의 저 건너편을 한 참 바라보면서 이 쇠사슬이 언제나 풀려서 저리로 건너갈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쏟아 놓던 다리, 왕래가 끊어진 지 오래되어 주변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져 가고 있던 이 다리를 나는 그때 “숨겨진 다리”라고 이름 지었다. 이쪽 군인들은 공도 차고 뛰고 노는 데, 저쪽은 어찌 그리 조용하기만 한지 신기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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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조선은 라진과 선봉을 합하여 라선시라고 이름하여 외부세계를 향하여 처음 문을 연 무역 개방 구를 만들었다. 중국 등 외부세계와 조선의 무역을 위하여 이 다리의 쇠사슬이 풀리게 된 것은 실로 반세기만의 일이었다. 라선의 개방은 장차 조선의 중국식 개방을 위한 시작이라고 생각해 보지만,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지금 이 시점에서 볼 때 아득하기만 할 뿐이다. 9월의 해가 서산에 가까이 가면서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은 양안(兩岸)의 물들어 가는 가을을 재촉하는 듯했다. 입국 수속을 마친 허 군이 돌아와서 줄지어서 기다리고 있는 차들을 지나서 조선 경비대의 검문소에 이르자, 사람은 내려서 저쪽으로 걸어가라고 지시해서 우리는 내려서 경비병에게 한 사람씩 여권을 확인하고 보세구역으로 들여보냈다. 내 여권을 보던 경비병이 어느 나라에서 오느냐고 물어서 캐나다에서 온다고 했더니 나를 올려다보면서 차렷 자세를 하고 경례를 올려붙인다. 그리고 조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네다, 하고 반가운 말을 해주어서 나는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사탕 한 움큼을 주었더니 고맙다고 했다. 처음 조선 군인들을 보는 나는 그들의 키가 너무 작은데 놀랐다. 그곳에 있는 동안 조선 청년들의 키가 생각보다 작았다. 어렸을 때 음식을 충분히 먹지 못하여 몸들이 자라지 않아서였다. 이 사실은 UN에서도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북한의 현실이었다. 조선 원정 국경 관리소 건물 위에는 붉은 글씨로 쓴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구호가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이 표어를 읽을수록 조선이란 나라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을 이처럼 도탄에 빠트려 사경을 헤매게 한 김정일 장군이 어떻게 21세기의 태양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21세기에는 그분이 인민들을 굶주림과 가난에서 해방해준다는 뜻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되었다. 아마 주체사상의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이 글 뜻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 군이 해관에서 차 검사를 하러 오니까 차에 타고 있으라고 한다. 우리 일행이 차에 타자 바로 제복을 입은 해관 검사관 세 사람이 와서 차의 짐들을 검사를 한다. 염사장과 허 군은 차 밖에 있고 앞에 나는 앞자리에 않았고 뒷자리에 두 여직원이 내일 김일성 초상화에 바칠 꽃다발을 무릎에 놓고 앉아 있었다. 세관원이 차 문을 열고 안을 휘둘러보면서 꽃다발을 가지고 가는 구 먼 하고는 차 뒤로 간다. 그러자 뒷자리에 앉은 여직원이 한숨을 내 쉰다. 사실 그 여직원은 돼지고기 한 덩어리를 깔고 앉아서 꽃다발을 무릎 위에 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다른 중국 차에서는 돼지고기가 나와서 통행증을 빼앗기는 소동도 있었다. 돼지고기가 금지 품목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 중국 사람들이 여러 날 있으려면 고기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라선에서는 고기를 살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트렁크 검사를 하는데 내 짐에서 양말이 많이 나오자, 캐나다 사장이 가지고 가는 예물(선물)이라고 말하면서 익살 좋은 허 군이 허허 웃으면서 양말 두 켤레씩 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짐 검사는 끝났다. 다시 보세구역의 마지막 경비병의 여권 검사를 마치고 보세구역을 벗어나서 나진으로 가는 언덕길을 돌아 고개를 올라오는데, 바로 앞에 올라가던 쌀 차에 십 대 소년들이 메어 달려 칼로 자루를 찢는다. 쌀은 줄줄 흘러 길바닥에 떨어진다. 신작로 바닥에 흐트러진 쌀을 소년 소녀들이 20여 명이 풀비로 쌀과 흙과 그리고 자갈들을 함께 쓸어 모아 자루에 담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이러한 작은 사고라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화주들은 보세구역에서 사람을 사서 차 위에 태워서 나선까지 가고 있었다. 함경도 태백산맥의 어두워진 밤길은 험하기만 했다. 비가 많이 내린 길은 큰 트럭들이 다녀서 인지 길이 패어서 작은 택시가 가는 길은 험했다. 어떤 산길에서는 내려서 한 참은 걷거나 차를 밀어야 만 했다. 그런데 저 건너편 산에 세워진 큰 글씨의 표지판이 내 눈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것은 큰 글씨로 “쌀은 곧 공산주의 다”라고” 쓴 표어였다. 라진으로 가는 동안 그 표어가 무슨 뜻일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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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은 곧 공산주의다"라는 표어는 북한 사회주의 목표요 이상을 뜻한다. 김일성은 1962년 천리마 운동 당시 선언한 구호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그 날에, "모두가 이팝(이밥,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입고 사는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날은 어두워졌고 그리 높지 않은 산이기는 하지만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골들에는 마을들도 있겠는데 불빛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간혹 보이는 한 두 집의 희미한 불빛은 전깃불이 아니었다. 어두워진 길에 차 불이 비치면 드문드문 아이들이 길가에 서서 무엇인가를 달라고 손들을 벌리고 있었다. 아기를 업은 부인은 잣을 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달리는 차 때문에 사 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지나가는 밤거리의 길목은 배고픈 나라라는 느낌을 세게 받게 하고 있었다. 40㎞를 달려서 불빛이 많이 보이는 선봉에 들어섰다. 선봉에서 라진까지 가는 14㎞ 길가에는 옥수수밭이 줄을 잇고 있었다. 그리고 규모가 크게 보이는 정유 공장이 보였다. 전에는 소련에서 들어오는 원유를 정유 하다가 지금은 미국서 들어오는 원조 원유가 들어오면 일하고 안 들어오면 쉰다고 하였다. 정유 공장을 지나 언덕에 오르니 저 아래 불빛이 환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로 저기가 라진이라고 했다. 허 군은 자기가 여기 온 뒤로 지금까지 밤에 불이 켜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했다. 이유는 내일이 9월 9일 9.9절로 조선 인민 공화국 창건 기념일이어서 이틀이나 쉬는 큰 경축 절이라고 한다. 모두 나에게 좋을 때 조선에 왔다고 복이 많다고 했다.
가로 등이 환한 시내를 지나서 한 곳에 자리 잡은 공장에 도착하여 현지에 있는 우경리(중국 회사 현지 사장)의 영접을 받았다. 공장의 당 비서와 지배인이 정장하고 나를 맞이할 것이라고 기다리다가 너무 늦어서 돌아갔다고 한다. 함께 간 여직원 둘이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가 도착한 지 30분이 되었을까 어떻게 알았는지 안전원(경찰관)이 공장 경비를 데리고 나타났다. 새로 온 사람들을 조사하고 나의 머물 곳을 묻기에 허 군이 저녁을 먹고 호텔에 갈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도착하면 한 시간 내에 도착 증명을 안전국에 가서 받지 않은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하자, 염 경리가 이 밤에 어디 가서 증명을 받느냐고 내일 아침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역정을 내고 있었다. 여기 법이 제삼 국인인 나는 이 공장에서 쉴 수 없어서 저녁을 먹은 뒤 나를 시내 가운데 있는 남산 여관에 데려다주었다. 하루에 중국 돈으로 280원에 들었다. 함께 온 사람들이 방에는 도청 장치가 되어 있을 것이라느니 아니라느니 하는 말들을 하였다. 우 경리도 이 방에서 처음에 머물렀다고 하면서 외국 사람들이 오면 꼭 이 방에만 들게 한다고 불평스러워하면서 말조심하자고 했다. 수도꼭지가 마사 져서(망가져서) 말을 잘 듣지 않았고 더운물이 나오는 시간이 지나서 보온병 물로 몸을 대충 씻고 피로한 몸을 누이면서 북녘땅 반쪽 조국에서 첫 밤을 맞이했다.
9.9절
몸은 대단히 피곤하지만 잠은 일찍 깨었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오늘은 9월 9일 조선 인민 공화국이 창건된 국경절이다. 6시가 되자 학생 밴드부가 광장에 와서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거리는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깨끗한 옷차림에 넥타이를 맨 남자들과 여자들이 드문드문 꽃송이들을 들고 김일성 초상화가 있는 단에 바치려고 가고 있었는데, 시간이 감에 따라 꽃 행렬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7시 30분에 호텔 식당에 가서 명탯국으로 된 아침 밥상은 고향에 왔다는 느낌을 받게 해 주었다. 나는 처음 온 이곳을 돌아보려고 밖으로 나갔다. 호텔 앞은 시가지 중심을 이루는 큰 마당(광장)이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학교와 직장에서 9.9절을 축하하는 그림을 그린 대형 그림판들을 일 열로 10여 개가 넘게 세워 놓았다. 나로서는 처음 대하는 그림들이고 거기에 쓰여 있는 수많은 표어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하던 낯선 것들이어서 신기하여 자세히 보느라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 그림들과 표어들에서 느끼는 공통점 한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조선인민공화국에는 위대한 장군 세 분(김일성, 김정숙 그리고 김정일)이 계신 나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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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가운데 높이 솟은 대리석 탑에는 붉은 글씨로 “위대하신 수령 김일성 동지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김일성 주석님은 몸은 죽어서 한 폭의 그림으로 벽에 남으면서 조선 사람들의 신이 되었다. 탑 주위는 잔디와 꽃들로 단장되어 있었고 그 옆에서는 돈을 받고 아이들을 태워 주는 당나귀가 있는데,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그 옆길 건너편에 있는 직사각형의 대리석 판에는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고 붉은색 큰 글씨로 새겨져 있는데, 그 밑에서 학생 밴드부가 국경절을 축하하는 경쾌한 노래들을 연주하고 있어서 자나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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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들어오면서 느끼는 것은 조선은 표어의 나라라고 말할 정도로 가는 곳마다 모퉁이마다 표어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새로 보는 표어를 적어 보기 시작하였다. 김일성 초상화로 가는 길모퉁이에는 조그마한 꽃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꽃을 사려는 학생들과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꽃 한 송이에 조선 돈으로 5원이었다. 싸늘한 이 아침에 양말을 신지 못한 학생들이 위대한 수령님께 꽃 한 송이를 드리려고 5원을 쓰는 그 마음에는 수령에 대한 존경과 충성심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나는 돈을 가지고 있지를 않아서 다시 호텔 방에 가서 돈을 가지고 꽃을 사려고 왔을 때는 이미 꽃은 다 팔려서 살 수가 없었다. 일 년에 몇 번이고 꽃을 드려야 하는 명절 때문에 꽃 장사가 재미를 보는 듯하였다. 호텔에 돌아와서 남자 종업원에게 내래 캐나다에서 와서 수령님께 꽃 한 송이도 못 바치고 가게 되었다고 푸념을 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여섯 송이의 예쁜 꽃묶음을 구해 가지고 왔다. 돈을 주려고 하였지만 받지를 않았다. 중국 돈으로 280원인 이 호텔은 시설이 나빠서 일단 체크아웃을 했다. 8시가 되자 공장에서 사람들이 왔다. 그리고 나에게 조선 지배인(공장장)을 소개해 주어서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일행은 길 끝쪽에 있는 김일성의 초상화 단으로 갔다.
김일성 초상화 참배
북한은 국경절에는 지역마다 있는 김일성 초상화를 경배하고 있었다. 개인 직장 그리고 친구들로 이루어진 무리가 초상화 앞에 줄지어 있다가 한패 한패 질서 있게 초상화 앞에 일단 섰다가 초상화 앞으로 지나면서 꽃을 드리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서 절을 하고는 돌아간다. 직장에서 온 여성들은 예쁜 한복들을 차려입고 경건한 마음으로 직장을 대표하는 꽃다발을 드리고 물러가면 기다리고 있던 다른 패들이 같은 방법으로 움직이면서 차례차례 질서 있게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모두 오랫동안 훈련된 행동이었다. 우리 공장 패의 차례가 되자 도문서 사 온 꽃다발을 세워 놓은 뒤 초상화를 돌 때 나는 들고 있던 여섯 꽃송이 묶음을 가운데쯤에다 놓았다. 다시 돌아와서 일렬로 정렬한 다음 절을 할 때 나는 그저 지그시 눈을 감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카메라 셔터를 여러 번 눌렀다. 자리를 옮기자 라진시 부위원장(부시장)과 국장이란 분들의 소개를 받았다. 그리고 돌아서자 박 대표가 내 손을 잡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보위부 둘이 떴으니까 자기 옆을 떠나지 말라고 하면서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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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 정연하게 김일성 초상 화단을 참배하고 있는 모습
공장 운동회
오늘은 국경절이면서 이틀을 쉬는 날이다. 지배인은 이 즐거운 국경절에 공장에서는 운동회를 한다고 나에게 알려주면서 꼭 참석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10시경 옷 공장 넓은 마당에서는 종업원들과 깨끗한 옷들을 입은 가족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가지고 간 선물들을 어떻게 전해 줄 것인가를 의논하였더니 운동장에서 공개적으로 내놓는 것이 좋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다. 가지고 온 것들은 사실 아주 곤란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기를 바랐지만 짧은 시간에 주민 접촉이 쉽지 않아서 공장 직원들에게 주기로 하였다. 모든 직원들이(약 350여 명) 그런대로 운동복들을 입고 운동장에 모였다. 우리를 본부석 한편에 앉도록 해 주었다. 이 자리에서 캐나다 사장이 가지고 온 선물이라면서 책상 위에 여직원이 내놓았다. 당 비서가 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는, 마이크에 대고 캐나다 김 사장이 우리 공원들을 생각하여 선물을 가지고 왔다고 알렸다. 이어 지배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은 위대하신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조선 인민 공화국을 창립한 기쁜 경축 절에 본 공장 직원들의 운동회를 열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면서 운동회 시작을 알리는 선언을 하자, 이어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모두 무도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운동회의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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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종목들을 보면 공놀이, 병 뀌어 달리기, 발 묶어 달리기, 징검다리 건너기 그리고 줄다리기 등을 두 패로 나누어 겨루면서 응원하는 노래와 춤이 하루를 흥겹게 하고 있었다. 노는 모습들이 남쪽이나 하나도 다르지 않아서 분단 반세기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역시 같은 민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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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때 매년 운동회에서 하던 놀이여서 마치 고향 시골 학교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본부석 위에는 포장을 치기는 했는데 내가 앉은자리에는 해가 들어서 앉아 있기가 불편도 했고, 모처럼 찾은 이곳에서 그냥 앉아만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경기가 시작되자 본부석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으로 가서 사진을 찍는 일로 여러 사람과 얼굴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마침 흰색 한복을 곱게 입으신 할머니가 예쁜 때때옷을 입은 아기들을 데리고 있어서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데, 뒤에서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난다. 뒤돌아보니 여공들이 나에게 선생님, 우리 사진 좀 찍어 주시오, 하는 부탁을 받으면서 그들을 위한 사진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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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을 배경을 찾으니까 우리가 타고 간 붉은 택시 앞에서 찍기를 원하였다. 사진을 찍어주면서 공원들과 웃고 즐기는 것을 현지 박 경리가 보면서, 자기는 여기에 2년이나 있으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지금까지 자기에게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김 사장은 재간이 좋다고 하였다. 어떻게 저들과 말문을 열 수 있을까 바라고 있었는데 이렇게 사진 찍어주는 일로 우리는 서로 조금 알게 되어서 기뻤다. 지난밤도 공원들과 대화의 접촉점(contact point)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여기 이 상황에서는 바로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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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숙련 여성 기능공들의 즐거운 한때 숙련 남성 기능공 축구 선수들
12시가 되자 지배인이 우리에게 와서 오늘은 라선 시장이 외국 손님들을 위하여 베푸는 연회가 있는데 내가 초청되어 있다고 꼭 참석해야 한다고 한다. 공장 공원들 점심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곧 마치고 다 집으로 간다고 했다. 어지간하면 국수라도 사서 함께 삶아 먹으면서 어울렸으면 하는 마음인데 아쉬웠다. 지배인과 중국서 온 직원들과 함께 연회장에 도착해 보니 내가 머무는 남강 여관이었다. 외국 손님들은 태국서 핸드폰 사업으로 와 있는 몇 분들과 다른 몇 사람과 나 말고는 모두 중국 사람과 얼마간의 조선족이었다. 부시장의 환영사는 중국어 통역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환영사에는 8월 31일 쏘아 올린 대포동 일호 인공위성은 외부의 도움이 없이 순전히 우리 기술로 만들어졌음을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님께서 공화국을 건설한 기쁜 경축일에 여러분이 오신 것을 축하한다고 말한 다음 경축일을 기쁘게 보내 달라고 하면서 축배를 들자고 권했다. 나는 중국에서 조선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왔는데, 조선에서는 이 일을 알리느라 TV에서 그리고 거리에 축보를 붙이고 난리들이었다. 거리에 붙은 축 보는 대단히 선동적이었다.
“ 우리의 기술 우리의 힘으로 우리나라에서 첫 인공위성 발사”
“이것은 조선 민족의 영광, 조선 민족의 긍지, 자랑이며, 우리의 위대한 승리이다”
이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조선이 쏘아 올렸다고 하는 위성은 장거리 미사일로 함경북도 무수단에서 쏘아 올려서 일본 열도를 가로질러 태평양에 떨어졌다. 그들은 장거리 미사일을 위성이라고 불러서 우리를 헷갈리게 하였다. 조선에서는 미사일을 “우리 기술” “우리 힘”으로 했다는 대해서 힘주어 선전하고 있었다. 과연 그럴까!
(이때부터 북한의 미사일 기술은 급격히 발전하여 오늘날 미국을 위협할 만큼 발전했다.)
식사는 전통적인 조선 음식으로 준비되었으며 맛이 좋았다. 우리 일행은 한 시간 반 정도의 연회에서 북한의 좋은 음식을 마음껏 즐겼다. 나는 지배인과 양식 지원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들을 나누어 보면서 이곳 실정을 좀 더 일려고 노력했다. 오늘 다시 남산 여관에서 묵으려고 방을 청하니 어저께 내가 쓴 방을 다시 주었다.
지배인이 오후 3시에 오전에 평양에서 행한 경축 절 열병식을 재방영한다고 보자고 하여 모두를 데리고 내 호텔 방으로 왔다. 그러나 안테나와 TV 상태가 좋지 않아서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배인이 호텔 기술자를 데리고 와서 조정하느라 수고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배인은 우리에게 당 비서 댁으로 가자고 하여서 따라나섰다. 당 비서가 사는 곳은 공장 가까운 곳으로 여러 세 대가 붙어서 길게 지어진 집으로 앞뒤에 마당이 있고 들어가면서 부엌 그리고 두 칸으로 된 집이었다. 지배인이 오게 된 것을 설명하자 여성 당 비서는 어서 들어오라고 반갑게 맞이하여 주는데 입에는 웃음이 전혀 없고 차갑게 28인치 흑백 TV는 세계 군사 강국이라는 해설과 함께 군 장병들의 퍼레이드가 2시간여에 걸쳐 벌어지고 있었다. 한 점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는 퍼레이드는 잘한다는 칭찬보다는 애처롭게만 보였다. 강성대국과 기아의 두 모습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현상이었다. 벽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좁고 긴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 김정일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군 장교들의 사진이었다. 아마 남편이 군 장교였는가 보다. 독재 나라에서 이런 사진은 가문의 자랑거리며 권력의 측근이라는 상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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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동안 퍼레이드를 보는 동안 주인은 물 한 모금 주지를 않았다. 아무도 청하는 사람도 없다. 중간에 내가 물을 좀 달라고 하니까 그때 물 한 사발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다른 분들에게 물을 마시겠느냐고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두 시간 동안 그저 화면만 바라보는 것 말고는 서로 말 한마디 없이 긴장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것은 우선 우리 가운데 서열이 제일 높은 주인이 되시는 당 서기가 입을 열지 않으니 조심스러워서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 보고 나오면서 나는 고국을 처음 방문하여 이렇게 멋있는 9, 9절 행사를 보게 되어서 기쁘다고 인사를 하니, 입가에 가냘픈 미소를 지으며 오셔서 반갑습니다.라고 응대한다. 마을을 나오면서 사는 모습들을 스냅 하였다. 집마다 울타리에는 긴 막대기들이 세워져 있고, 거기에 줄 콩들이 감아 올라가면서 핀 빨간 꽃은 보기에 좋았다. 알이 큰 강낭콩들은 양식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에 있는 집단 농장에는 가을배추들이 손가락만 한데 비해 가정 텃밭의 배추는 양손바닥을 펼친 만큼 크게 자라고 있었다.
한마당 축제 녁에는 여관 앞 광장에서 경축 절 연출이 있다고 한다. 오늘 하루는 경축 절 축제들로 즐기기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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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앞마당에는 무대가 만들어지고 경축 절을 축하하는 연출을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흥겨운 노래들에 맞추어 남녀노연대회장에는 그런대로 사람이 많이 모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는데 박 대표가 나에게 자기 옆을 떠나지 말라는고 주의를 하고 있었다. 이 분은 가끔 나를 단속하고 있어서 여기 현실과 이분의 속마음을 알려고 노력했다. 무대에는 밴드부가 연주하고 가수가 노래 또는 민속춤을 연출하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보다가 피곤하여 모두와 헤어져 방에 들어오니 TV에서는 평양에서 야간 횃불 퍼레이드가 다시 벌어지고 있는데 화면이 낯보다는 좋아져서 볼만했다. 세계로부터 양식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나라가 무엇을 위하여 이 엄청난 경제를 소비해 가면서 이런 행사를 하고 있는지, 제 정신으로 하고 있있는지 아니면 딴 정신으로 하고 있는지 보통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위대하신, 경애하는 수령님, 세계에서 가장 영명하신 지도자, 등등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좋은 표현들을 오로지 이 분들에게만 쓰고 있어어서 마치 도깨비들이 사는 나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녁 7시에 더운 물이 나오는 시간이어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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