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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이 제법 많다. 그런데 어느 사람 하나 북한 방문기나 여행기를 보고 느끼고 경험한 대로 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왜 그럴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분들은 여행하고 오면 보고 느낀 새로운 세상을 소개하느라 신문 지상이나 SNS에 글과 사진을 올리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유독 북한을 다녀온 분들 가운데는 들어내 놓고 이렇다 할만한 여행기를 소개한 글은 보기기 쉽지 않다. 또 내가 아는 몇 분들은 나에게 우리 가까운 사람들이 북한 친척을 방문하고 왔는데 도무지 북한에 대해서 말이 없다고 하면서, 왜 그러느냐고 묻기도 한다. 이유가 있다. 친척을 방문한 사람들은 다녀와서 하는 말로 인하여 북에 있는 친척들이 어떤 해를 받을까 봐서 조심한다. 또 다른 목적으로 방문하고 온 사람들은 다음에 또 갈 여지를 남겨두고 있어서 조심하고 있는 것이며, 계속 대북 지원사업을 하는 분들은 더욱 그렇다. 모금을 위하여 SNS에 올리는 자료들과 교회나 대중 집회에서 조선의 정치나 이념, 나라 지도자들에 대한 말들과 보여주는 조선 사회의 처참한 모습의 사진들은 다 조심스러운 일들이며, 언제 정보원들에 의하여 북으로 전달될지 모르는 일이다. 이름이 알려진 지원자들이 모금을 위하여 북의 처참한 모습을 너무 떠벌리면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고, 그러한 일들을
글로 써서 발표하는 사람들은 북에 다시 들어가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   

 

 

나의 반쪽 조국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보고 느끼고 나누어진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북한은 그리 넓지 못하며, 그저 제한된 지역에서 얻은 조그만 경험일 뿐이다. 정치나 지역 사회에 깊이 들어가 넓게 생활해 본 적이 없어서 정치가 어떻고 사회가 어떻다고 말할만한 것은 없다. 이런 분야는 듣고 아는 것으로 그저 피상적일 뿐이며, 그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배고픈 사람들이 사는 좁은 지역의 얼마만의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사회를 알고 있을 뿐이다. 중국에서 평양을 갔다 오신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평양을 가 본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면서 마치 북한을 모두 아는 양 말하고 있었다. 나는 가본 적이 없다. 가보고 싶지도 않다. 북한을 지원하면서 몇번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전국이 초라한데 딱 한 곳 보기 좋게 꾸며 놓은 곳을 비싼 경비를 들여서 가 볼 일은 없었다. 나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을 알고 있을 뿐이다. 

조선에 관한 관심의 동기
우리가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에 살고 있을 때, 어느 때부터인가  주위에 심심치 않게 두만강 건너편에서 온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자리를 잡고 사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남성 탈북자들은 농촌에서 일꾼으로 또는 시내 식당에서 공장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일하고 있었고, 중국인들에게 팔려온 여성들은 감시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들이 처지가 딱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분들이 우리의 소식을 듣고 가끔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하여 북에서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 아픈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도망쳐 나와서 괄시받고 학대받는 고통의 삶을 사는 탈북민들의 형편을 듣고 보면서 아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독재정치로 인민을 노예화하고 마음대로 학살하던 소련 공산주의도 무너졌고, 중국도 세계를 향하여 문을 연 덕에 나 같은 사람도 여기 고향에 와서 사는 데, 우리 조국 북한은 어떤 정치를 하기에 백성들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로 도망쳐 와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하고 있는지 딱하기만 하였다. 우리가 사는 지방 정부에서는 우리에게 북에서 오는 사람들을 데리고 있지 말라는 주의를 알려오는데, 잘못하면 국제관계법으로 얽힐 수도 있다는 주의였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 민족이 배고파서 찾아오는데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을 시키기도 하고 차비를 주어서 가고 싶은 데로 가도록 해주었다.        

 

단동 방문 
강 건너에 있는 우리의 동포들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단동을 방문하면서였다. 
그리고 중국으로 도망쳐 나온 사람들도 만나보고 함께 살아도 보았다. 그러나 실제로 충격을 받은 것은 단동에서 신의주를 바라보면서였다. 그 도시가 보여주는 한 장의 그림이 내 마음을 깊이 움직여 주었다. 우리는 1997년 5월 단동시의 초청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시가 소개해 준 금강산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우리 호텔 뒤편으로는 금강산 공원이 울창한 숲으로 뒤 덮인 채 두르고 있었고,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이 오르고 있어서 우리도 시민들과 어울려 금강산 공원을 올라갔다. 소나무들로 가득 차 있는 산은 시민들의 쉼터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아침 운동을 하고 있었다. 산 위에 오르니 아래로 단동 시내와 압록강 건너 신의주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두산 천지에서 굽이쳐 흐르던 압록강이 단동 북쪽 위화도를 돌아 단동과 신의주를 가르면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신의주 시내에는 보기 흉하리만치 많은 공장 굴뚝들이 높이 솟아 있었다. 섬나라 왜국이 산업단지로 건설할 때 있던 것들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많은 굴뚝 가운데 연기 나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이 모습이 저곳 형편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한 장의 그림이었다. 단동 시내에 비해 신의주 시내는 우중충하고 생기가 없어 보여서 마음 한쪽이 울적해졌다. 아침이어서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나 해서 다음 날은 오후에 올라와도 여전히 연기는 없었다. 며칠 뒤 신의주로 무역사업을 하는 분을 통해서 들은 것은 원자재가 없어서 공장들이 일을 못 한 지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반쪽 조국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다른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돕느냐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저쪽 정부의 간섭을 많이 받지 않고 좀 자유롭게 헐벗고 굶주린 내 형제자매를  내 손으로 직접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데, 북쪽은 어떻게 저렇게 고집스럽게 살고들 있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내 마음이 영 편하지를 않았다. 

      

 

어두움에 묻힌 나라 

아직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은 북방(목단강)에서 온 우리는 봄의 따스함을 느끼며 가벼운 옷차림으로 압록강을 돌아보려고 나섰다. 시내 길 화단에 피어 있는  꽃들은 우리에게 봄의 형기를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압록강에 나아가 보니 일본 침략제국주의자들이 놓은 철 다리는 6.25 한국 전쟁 때 유엔군 폭격으로 다리 상판은 다 무너졌고 다리 기둥(橋脚)들만 덩그렇게 남아있었다. 다행하게도 중국 쪽으로 겨우 두 칸이 남아있어서 사람들이 가볼 수 있도록 열어 놓고 있었다. 소련과 중국 그리고 조선의 합작으로 일으킨 적화통일 불장난의 아픈 흔적이 이렇게 세월을 달래며 서 있었다. 우리는 그 다리 끝에서 끊어져 더 갈 수 없는 저 건너면 반쪽 고국을 바라보면서, 언제나 저곳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때가 올 수 있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끊어진 이 다리는 조선 왜국총독부가  놓은 철 다리다. (1909년 5월-1911년 10월 완공) 길이 944m, 넓이 11m, 12개의 교량 가운데 신의주 쪽에서 9번째 중국 쪽에서 4번째가 개폐식으로 되어 90° 회전을 할 수 있어서 배들이 지나다니도록 했다. 1950년 미군에 의해 폭파되어 신의주 쪽은 교각만이 단동 쪽은 네 개의 상판이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는 중국 사람의 보트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 20여 미터 가까이 아래서부터 압록강 다리 가까이 까지 올라가면서 돌아보았다. 경계 근무하는 병사들, 빨래하는 여인들,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아이들의 초라한 모습들은 그들의 넉넉지 못한 삶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질러도 그들의 반응이 없어서 괜히 쑥스러워졌다. 우리가 신의주 강가를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인공기를 단 큰 나무배 한 척이 사람을 가득히 싣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데 우리는 조심스러워서 그저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 손을 흔들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무표정하게 보였다. 차림새로 보아 일하러 가는 노동자들 같았다.  

         

밤에 우리는 다시 압록강 강변에 나아갔다. 중국 강 이쪽에는 반짝이는 오색 네온 불빛이 어두운 밤을 밝히는 식당들과 유흥장들이 소란스럽다.

          

 

그러나 강 저 건너편에는 압록강 다리 끝에 있는 검문소의 희미하게 비치는 불빛 말고는 시내 어느 곳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캄캄한 어두움에 묻혀 있을 뿐이었다. 지금 이곳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몰려오는 유흥 객들과 강바람을 쏘이러 나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는데, 저 건너 쪽은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는지, 아니면 삶의 고뇌를 안고 씨름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나의 카메라에 비친 신의주의 밤

 

신의주 일일 관광 신청
우리는 호텔 카운터에서 신의주 일일 또는 이틀 관광객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았다. 아침에 호텔 카운터에 가서 나는 캐나다 사람인데 신의주 관광을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여직원이 잠기 기다리라고 하고는. 여행사에 전화해 보더니 캐나다 여권이면 갈 수 있다고 한단다. 우리 보고 사진을 두 장씩 준비해서 가지고 오라고 해서 너무 반가워 바로 나가서 사진을 찍어 가지고 와서 신의주 일일 관광 신청을 했다. 종일 단동 정부 관계자들과 만나 복지사업 관계를 의논하고 그분들의 안내로 여러 곳을 돌아보고 저녁까지 얻어먹고 늦게 호텔로 돌아왔다. 우리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카운터에 갔는데, 우리 여권을 돌려주면서 우리 여권에 한국을 방문한 도장이 찍혀 있어서 안 된다고 하면서 다음에는 새 여권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우리는 좀 섭섭한 마음이었지만, 다음에는 신의주를 가보기 위해서는 새 여권을 내게 되면 한국을 거치지 말고 중국으로 바로 들어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우리는 어떻게 강 건너를 한 번 가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길이 열렸다. 라진에 있는 조선 정부의 공장과 합자를 하는 중국 회사의 사장이 라진 시정부에 나를 지원 사업관계로 소개함으로 서 강 건너 방문이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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