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독교 선교역사
기독교의 선교는 1873년 미일 화친조약이 맺어지면서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惟新)으로 막부 정부가 끝나고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 통치가 시작되었다. 1854년 미국의 위협적인 압력으로 미일 화친조약을 맺음으로 개항하게 된다. 요코하마가 외국인 중심 거류지였으므로 외국에서 오는 모든 사람이 여기로 모여들었다. 그때는 아직 외국인 선교가 금지되어 있어서 미국 선교사들은 자국민들을 목회하면서 의료와 교육 사업으로 일본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만나고 있었다.
▶ 제임스 헵번(James C. Hepburn,1815~1911) 미국 개혁교회 의료 선교사
일본에 온 첫 번째 의료선교사로 진료소를 내어 일본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교육기관도 세워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니 일본 사람들이 우러러보았다. 그가 세운 헵번 숙(塾, 학교)은 나중에 명치 대학이 되었다. 그는 또 성서 번역 위원회를 만들어 1888년 일본어 신구약 성경을 펴내는 큰 업적을 남겼다.
▶ 일본의 첫 교회
1861년 온 미국 개혁교회 소속 바라 선교사도 바라 숙을 세워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학생들 가운데 9명이 회심하자 이들을 중심으로 요코하마 카이칸 교회를 세우니, 일본의 첫 교회이다.
▶ 일본 정부의 종교 신앙 자유화 선포
1873년 일본 정부의 신앙의 자유화로 기독교 일본 선교가 활성화되면서, 한국의 기독교 선교의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R. S. McClay 선교사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일본의 신앙 자유와 함께 중국에서 선교하던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S.McClay, 1824~1907)가 1983년 일본으로 와서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874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자유주의 신학 계열의 김재준, 송창근, 김정준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 맥클레이 선교사는 조선의 선교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이 계속 선교의 문호를 닫고 있을 때 개화파인 김옥균의 협력을 얻어 1884년 6월 27일 조선을 방문하여 고종을 만나 외국인들이 병원과 학교 사업을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음으로 1884년 9월 20일 의사 알렌이 조선의 첫 선교사로 오는 길을 열었다.
▶ 도시샤 영 학교(同志社英學校,)
1875년 교토에 도시샤 영 학교를 설립한 니지마 조(1853~1890)는 일본 사람으로 원래 하급 무사의 아들로 무신정권이 몰락하자 새로운 희망을 찾아 서구 문물을 배우기 위해 1864년 미국으로 밀항하였다. 미국에서 학교에 다니며 교회 생활을 통해 그의 신앙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아모스트 대학과 연이어 청교도 정신에 철저한 안도바 신학교를 졸업하고 1874년 회중 교회 선교사가 되어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본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독교 대학을 설립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교토에 도시샤 영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설립되자마자 많은 학생이 모여들었다. 도시샤에서 신학 수업을 받고 졸업을 하여 전도자의 길을 나서게 되었는데 그들은 니지마를 중심으로 일본 조합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어 일본 기독교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샤대학은 조선의 많은 젊은이도 수학한 곳으로 서울여대 설립자 겸 초대 총장인 고황경, 정지용 시인,‘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유명한 민족시인 윤동주도 이곳에서 수학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여기서 잠깐, 군국주의 시절 일본 기독교 지도자들의 정신 속에 제국주의 근성이 있었다는 것은 충격스러운 일이다. 니시마 조의 일본 조합 교회는 와다세 목사가 중심이 되어 조선 식민지 전도에 앞장섰는데, 그것은 순수한 영혼 구원을 위한 선교가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기독교를 앞세워 식민지를 늘려나갔던 정책을 흉내 내어 기독교를 앞세워 식민지 확장을 위한 일본 군국주의에 적극 협력한 잘못을 저질렀다.
▶ 삿뽀르 농업학교와 클라크(W. Clark) 박사
일본은 1875년엔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홋카이도 삿포로에 농학교(현재 홋카이도대학)를 개설하고 미국인의 개척정신을 심어 주고 선진 농업전문학교로 발전하려고 1876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 농과대학 학장이던 클라크 박사를 교수로 초청하였다. 클라크는 입국 때 성경책 50권 가지고 와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며 학생들에게 철저한 청교도적인 신앙을 심어주었다. 학교는 농학전문학교로 체재를 갖추게 된다. 클라크 박사가 일년반 머문 뒤 일본 당국에서는 학생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로 추방되었지만, 그가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어 장차 일본을 이끌어갈 유능한 평신도 지도자들의 전당이 되었다. 그는 “Boys, Be Ambitious! in Christ, 젊은이여, 그리스도 안에서 대망을 가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분이 떠난 뒤에‘In Christ’란 단어는 빼고, “Boys, Be Ambitious! 말만 남겼다. 이 장면을 형상화한 큰 유화 그림이 지금도 홋카이도 도청 2층 기념관에 걸려 있다.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죠와 소설 ‘빙점’으로 유명한 미우라 아야꼬 등이 이 학교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일본 초기 기독교의 세 가지 흐름
일본 초기 기독교는 선교 지역과 선교 교파의 영향으로 세 가지 흐름이 있는데, 그 영향으로 일본 기독인들의 신앙 형태에도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이 세 흐름은 사역한 지역 이름을 따 세 그룹으로 부르는데, 요코하마 밴드, 구마모토 밴드, 삿포로 밴드로 불린다.
1. 요코하마 밴드
요코하마는 일본에 처음 오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거주하는 중심으로 형성되어 주로 장로교파의 영향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을 강조하였다.
2. 구마모토 밴드
교토의 도시샤대학 신학부를 졸업함으로 형성된 그룹으로 대부분 일본 조합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독립하려는 토착적이면서 일본 군국주의 정책에 협력하는 그릇된 사상을 가졌다. 일본 조합 교회는 패전 이후에는 일본의 기독교단을 주도하는 주류가 되었다.
3. 삿포로 밴드
클라크 박사의 영향을 받은 삿포로 농업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그룹으로 개인적인 신앙을 강조한 무교회주의자들의 요람이 되었다. 우찌무라 간조가 대표적인 인물이며 우리나라에서 이에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최태용 등이 한국의 일 세대이다. 한국에서는 종교 친우회(宗敎親友會)라는 이름으로 서울과 대전에서 주일 정기 모임을 가지고 있다.
♣ 일본인의 세계관 - 일본은 1860년경부터 학교에서 성경의 창조론을 가르쳐 왔다. 1870년대 학교 교과서에는 예수님이 골고다 십자가에 달리시는 내용이 가르쳐질 만큼 성경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877년에 이르러 창조론을 빼고 진화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창조론에서 진화론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에서 기독교인이었던 교육부 장관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진화론을 가르치면서 일본은 진화론적 세계관을 가진 나라가 되면서 빠르게 제국주의로 변하였다. 진화론이 영국에서 발생하였는데 유럽보다 더 빠르게 적용된 나라, 또 국정교과서에 진화론을 제일 먼저 담은 나라도 일본이었다.
▼일본이 제국주의 길로
1889년 대일본 제국 헌법을 선포하면서 왕을 신으로 격상하여 국가 수호신으로 삼으며 제국주의 길로 가게 된다. 이때부터 군국주의자들은 백성들의 정신을 개조하여 침략 제국주의 좀비들로 만들어 신(神)인 왕을 위하여 능히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백성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군국주의자들이 부국강병 정책을 실시하여 세계 정복의 길로 나선다.
드디어
1894년~1985년 청일전쟁에서 이긴 대가로 대만을 식민지로 삼고, 또 1904년~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므로 일본은 동북아의 승자가 되었으며, 1910년에는 조선을 완전히 병합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이란 일본 괴뢰정부를 세우면서, 상해사변(1932), 지나사변(1936), 중일전쟁(1938), 그리고 태평양전쟁(1941~1945)까지 이어진 15년 전쟁은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8월 15일 일본 왕이 항복함으로 끝났다.
▶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일본 기독교 역사에서 배 놓을 수 없는 한 분은 우찌무라 간조이다. 그는 일본 왕의 숭배와 군국주의에 맞서 싸운 믿음의 큰 용사이며, 그의 실천하는 산 믿음은 일본은 물론이며 한국에도 큰 믿음의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861년 5월 23일 도쿄에서 무사 집안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7세 때인 1868년 메이지유신 혁명으로 그의 집안은 몰락했다. 1877년 도쿄 영어학교 상급반일 때 삿포로 농학교 장학생으로 뽑혀 12명이 제2기생으로 입학한다. 그때 농학교는 Dr. William Clark으로 농학 전문학교의 체재를 갖추고 있었다. 교장의 영향으로 농학교는 기독교화되어 가고 있었다. 일 년 반 뒤 학생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다는 이유로 추방한다.
1877년 12월 16세인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되고 다음 해 6월에 친구 6명과 감리교 제임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이때부터 그는 일왕과 국가에 충성하는 데서 주님에게 충성하는 자가 된다. 1881년 7월 수석으로 졸업하고 홋가이도 개척사 관리로 일하게 된다. 그는 친구들과 민족독립교회를 세우는 데 뜻을 모으는 한편 YMCA를 설립하여 부회장으로 일한다. 그리고 1884년 미국으로 가서 에모리 대학에 3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하트포트 신학교에 재학 중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한다. 그리고 도쿄 제일 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동안 일본 기독교 사에 길이 남을 ‘불경 사건’이 일어났다.
◈우찌무라의 최경례(最敬禮) 불경 사건 1891년 1월
▶ 최경례-가장 존경하는 뜻으로 정중히 하는 경례(절)
1891년 1월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교사 우치무라로 인하여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도쿄 제일 고등중학교 강당엔 교사 60명과 학생 1000여 명이 모였다. 단상엔‘일본인의 신’이었던 메이지 천황의 초상과 그가 서명한 교육칙어가 놓여 있었다. 칙어 낭독이 있은 뒤 한 사람씩 그 앞에 가서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하고 있었다. 세 번째로 올라선 우치무라는 꼿꼿이 선 채 절을 하지 않았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말씀에 따른 행동이었다. 식장은 큰 소란으로 이어졌다. 언론은 전대미문의 이 사건을 앞다퉈 보도하면서 ‘최경례 불경 사건(最敬禮不敬事件)’으로 이름 지었다. 우치무라는 이 사건으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는 일왕 숭배를 거절하고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일로 국가와 국민의 반역자로 낙인찍혀서 사회에서 매장되었다. 그는 변변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사회에 발붙이기 힘들게 되자, ‘성서연구’라는 책자를 발간하면서 성경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였다. 동경에 있는 그의 6평짜리 방에서 일본이 성서 위에 세워져야 함을 강론하면서 말씀으로 청년들의 영혼을 깨우쳐 성서의 진리 위에 일본을 세우는 일에 모든 힘을 다하였다. 그 결과로 그의 성서 반 출신들이 일본 건설의 기둥 역할을 하게 된다. 성서반 출신으로는 한 명의 오호히라 수상. 교육부 장관 4명, 동경대 총장 4명, 복지계를 이끈 70%가 기독인이었다. 그때 일본의 기독교 인구 0.3%에 비하면 복지계를 이끈 70%는 엄청난 숫자이다. 그에게는 감시와 모진 핍박 그리고 비방과 고통이 따랐지만, 요한처럼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뜻을 불같이 쏟아내며 시대를 일깨웠다.
이때 일본에 유학 중이던 조선 학생들 몇 명이 이 성서 반에 함께 하게 된다. 그의 영향으로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는 기치 아래 1927년 1월‘조선 성경 연구회’를 결성하게 된다. 그때의 중심인물들은 김교신, 함석현, 송두용, 정상문, 양신성, 유석동 여섯 사람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1904~1905년)의 승리로 온 나라가 승전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 일본 기독교도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점령 축하 예배를 드리는 불경을 저질렀다. 우치무라는 앞으로 일본은 더 큰 전쟁을 벌일 것이며, 하나님은 일본에 불벼락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적으로 말했다. 그는 1930년 3월 28일 69세로 소천했다. 15년 뒤 일본은 실제로 더 큰 전쟁, 미국과 전쟁을 벌이다가 결국 히로시마(1945.8.6.)와 나가사키(8.9)에 하늘에서 내리는 불벼락(원자폭탄)을 맞았다. 패전 뒤 일본 사람들은 그를 ‘시대의 양심’으로 또는 ‘예언자’로 칭송하였다.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대한 그의 믿음과 사상은 그의 묘비에 담긴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도쿄의 타마 공동 묘지)
나는 일본을 위해 I for Japan
일본은 전 세계를 위해 Japan for the World
전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 the wolrd for Christ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And all for God
그는 조선에 대한 애정 또한 남달랐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조선을 침략하고 양민을 학살할 때,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육신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지 않았지만, 성령을 보내셨다. 그리고 연이어, 복 있는 조선이여! 앞으로 일본을 축복해 줄 조선이여! 축복의 통로가 될 조선이여!라고 말했다.
▶ 무교회주의-일반적으로 그들을 무교회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내용을 뜯어보면 그리스도께서 피로 세우신 교회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적 교회와 사람 중신의 세속적 종교, 사업체 성격을 띤 교회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1941년 일본 통합 기독교단이 창설되다.
일본은 대륙의 식민지화 전쟁을 일으키면서 나라를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 1939년 종교 단체법을 공포하였다. 1941년 이 법에 따라 기독교의 모든 교단들은 ‘일본 기독교단’으로 통합되었다. 조선에 있는 여러 교단도 1945년 7월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으로 통합하면서 신사 참배를 요구하는 일로 순교자의 피를 흘리게 했다.
▼ 왜 일본은 인구에 비해 기독교인 수가 1%도 안 되는가?
1982년 우리 일행 여섯 사람이 일본교회의 초청으로 한 달간 군마 갱을 중심으로 홋카이도 삿포로 그리고 남쪽 후쿠시마에 이르는 여행으로 20여 곳의 교회를 방문하였다. 일본 전국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은 한국 기독교 선교의 가교 역할을 한 일본은 기독교 인구가 생각보다 너무 적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단 교회당 건물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지는 일본 교회 방문기 참고)
일본 기독교의 역사는 한국(1884)보다 25년(1859) 앞서는데, 인구 1억 2천만 명 중 기독교인이 겨우 60만 명으로 복음화율이 0.5%에 불과하다.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전해질 때는 에도 막부 시대에서 메이지유신으로 옮겨지던 때로, 아직 선교가 허락되지 않았을 때여서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은 일본인들에게 선교사라는 정체성보다는 서양 문명을 소개하고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들로 비쳤던 것 같다"라고" 했다.
※ 니가타 성서학원 원장 나카무라 사토시(中村敏) 교수의 분석
나카무라 원장은 일본의 기독교 인구가 적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서양 선교사들이 영어학교 등 서양 문물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나름대로 효과를 거뒀고 교육과 문화 면에서 당시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과정에서 평범한 일본인들에게 기독교는‘지식층의 종교, 서양의 종교, 문턱이 높은 종교’라는 인식을 줬고 전도도 '도시 지식인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일반인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2. 당시 선교사들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막부가 무너지면서 권력을 잃고 몰락한 사무라이의 자손,‘사족(士族)’들로, 이를 통해 다시 자신의 가문과 함께 신생 일본의 토대가 될 만한 것들을 발견하고자 했다"며 "이들은 일본어 성서나 기독교 서적이 없는 단계에서, 중국에서 수입한 한역(漢譯) 성서나 기독교 서적을 전도나 교육에 사용했는데, 당시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적은 수였다.
3. 교회와 국가의 관계도 중요한 이유를 들고 있다. 메이지유신 때부터 천황이 살아있는 신이 되면서 백성이 다른 신을 믿는 크리스천이 되는 일은 '국가 방침과 맞지 않는 것이 되었다. 또 일본의 ‘동조 압력’ 문화, 즉 다수 의견을 따르는 문화는 개인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에도 일시적인 '부흥'이 일어난 때가 두 번 있었다.
1. 1880년대에 성도 수가 1만 1천 명이던 것이 1885년 5년 만에 3만 4천 명으로 2배 이상 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부흥의 불길은 천황이 신적 존재로 확립되면서 사그라들었다.
2. 패전한 뒤 미군이 주둔하면서 다시 한번 '기독교 붐'이 일어났다. 크리스천이 총리에 올랐고, 동경대 총장에 연이어 크리스천이 임명됐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들어찼고, 지역마다 미션스쿨이 설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연합군이 빠져나가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기에 자유주의 신학과 물질주의도 한몫을 더 했다.
이에 대해 나카무라 교수는 "결국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듯 '돌밭'에 뿌린 씨였기에 금방 말라죽고 말았다"며 "신앙에 깊은 뿌리가 없었고, 일본인들에 의해 일어난 기도와 신앙 운동이 아니라 외부의 영향에 의해 수동적으로 일어난 운동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의 일본이 점점 우경화되고 있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흔들리는 시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책을 썼다. 부제는 '일본은 어디로 가고 있으며, 우리는 어디에 설 것인가'로 일본의 장래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도 한국에서 일어났던 1907년 평양 대부흥처럼 철저한 회개와 기도 운동이 일어나야 하고, 이 혼란스러운 현실 가운데, 파수꾼처럼 시대를 향해 외치고 지켜낼 수 있는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며 아쉬워하고 있다.
일본은 여전히 군국주의 시절 아시아에 저지른 악행에 대한 반성과 회개하지 않는 나라이며 저들의 잘못과 수치를 감추려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은 장래 일본인들의 정신세계가 밝지 못하다.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만 미전도 국이다. (website 자료)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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