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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2005-2012

사란 소 학교 홍수 참사

사란(沙兰) 소학교 홍수 참사 6.21, 2005

아침 목단강 시 정부 화교연합회에서 급한 사건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 10여 일 전 영안 시 사란 전(읍)에서 일어난 홍수로 소학교 학생 11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죽었다고 함께 가보자고 청해서 함께 가보기로 하였다. 목단강에서 영안을 거쳐서 사란 읍까지는 한 80Km 되었다. 읍내에 들어서자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사고 대책본부가 차려진 읍 정부 청사에는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로 갔다. 차를 멀리 세워놓고 걸어가야만 했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운동장은 진흙밭이 되었고 학교는 홍수피해의 흔적을 지닌 채 빈집이 되어 있었다.

 

 

홍수는 거의 2m까지 차올라 큰 아이들은 책걸상을 고여 놓고 버티었지만, 저학년인 1~2년 학생들의 희생이 컸다. 110여 명 사망자 가운데 1~2학년 학생들이 거의 모두였다. 선생들은 모두 무사했고, 학생들을 구조하느라 희생되었거나 다친 선생은 없었고, 애쓴 흔적도 없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저학년 교실에 가서 책걸상을 한데 모으고 아이들을 그 위에라도 올려놓았더라면 이렇게 많은 아이가 희생되지는 않았을 텐데, 선생들은 학생들을 위하여 한 일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여선생이 손을 대고 있는 위 검은 줄이 물이 차오른 곳이다/     높은 학년들은 이렇게 책상을 쌓아 올라가 화를 피했다. 

 

                                         딸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는 학부모

 

이 사고는 천재(天災)가 아니고 인재(人災)였다.

6월 10일 오후 2:15분경 갑자기 밀어닥친 홍수는 한 30분 동안 학교와 시내를 휩쓸었는데 일반인들의 희생자는 없었다. 어린 학생의 희생이 큰 것은 학교가 읍내 가장자리로 흘러내리는 냇가 옆의 가장 낮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고가 나든 날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읍내 8K 북쪽에는 농용 작은 저수지가 있었는데 물이 넘치려고 하자 관리인이 읍 정부에 알리지도 않았고, 허락도 없이 물 문을 열었다 엄청난 물은 쏟아지는 소나기와 함께 내를 타고 내려와 학교를 덮쳐서 학생들은 꼼짝없이 당한 것이다.

 

                                                     홍수가 몰아친 사란 읍

 

급히 출동한 군부대가 왔지만 소용돌이치는 급류에 학교 건물에 접근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졸지에 자녀를 잃은 학부모들의 마음은 어떠하랴!

 

밝혀진 충격적인 일들

이제 사후 처리 과정에서 충격적인 일들이 밝혀졌다. 이 엄청난 사고 처리를 위하여 북경 중앙에서 조사단이 내려왔다. 숨겨진 사실들이 밝혀졌는데 충격적이었다. 이 학교 건물은 불과 5년 전에 지어졌다. 이 학교를 새로 지을 때 지반을 2m 높이고 이 층 건물을 짓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관리들이 지반을 높이지도 않은 채 단층으로 학교 건물을 짓고 예산을 다 들어먹은 것이다. 홍수가 안 났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텐데, 홍수가 남으로서 관리들의 비리가 이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지은 죄는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이 일은 양자강 홍수 때도 마찬가지였다. 양자강 둑이 터져서 일개 군이 사라질 정도로 피해가 컸는데 그때 주룽지 총리가 내려가 터진 둑에서 시멘트 조각이나 쇠 동가리 조각이라도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때 관리들이 공사 자금은 다 떼어먹고 모래로만 둑을 쌓은 것이다. 그때 관리들이 엄청난 벌을 받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사란 학교 건축에 관계된 관리들이 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 중국 관리들의 도덕성은 이 정도였다.

 

책상 걸상 지원

성 정부는 새 학교 건물을 안전한 지대인 언덕에 짓도록 결정하였다. 나도 딱하여 학교가 지어지면 책걸상 100개를 만들어 주기로 하였다. 300여 명의 학생 가운데 110여 명이 비었으므로 100개만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 소식을 몇 곳에 알리면서 도움을 구했다. 서울에서 온 소식은 국제뉴스를 통해서 이 홍수 사건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교회와 의논해서 얼마라도 돕겠다고 하는 소식을 보내왔다. 그리고 Flushing에 있는 한신 교회에서도 돕겠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그래서 책걸상 100개를 약속했는데 넉넉하게 150개를 주문하였다. 9월 새 학기에 학생들의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학교 건물은 속도를 내어 이제 다 완성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학교 당국에 우리가 갈 때 학생들을 모이게 하거나 어떤 행사도 하지 말도록 부탁하였다. 우리는 때를 맞추어서 9월 19일 공장에서 150개의 책걸상을 싣고 함께 사란 소학교로 가게 되었다. 미국에서 지원하는 교회의 친구도 마침 와서 증정식에 함께 하게 되어서 반가웠다. 우리가 학교에 도착해 보니 또 나를 실망하게 하는 일이 생겼다.

 

사란 학교 학생들을 위한 책걸상 150쌍

전달식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아이들을 뙤약볕에 정렬시켜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서 학생들 보기에 정말 미안했다. 우리가 내일 가는 일로 아이들을 절대로 모이지 않도록 해 달라고 그렇게도 신신부탁을 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았다. 목단강 TV에서 오고 인민일보와 목단강 신문 기자들과 교육, 행정부 관계자들 목단강 간부들 등 많이 와 있었다. 간단하게 증정식을 하고 싶은데, 이 사람들은 정식으로 식을 만들어서 하고 있었다. 4~5명의 간부가 차례로 한 마디씩 하고 마지막으로 내가 아주 짧게 한마디 하고 마쳤다. TV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인민일보 등 기자들과도 인터뷰하였다. 기자들의 질문의 요지는 어떻게 책걸상을 만들어 주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증정식을 마치고 영안 시 정부에서 간부들과 우리를 데리고 발해전(읍)으로 갔다. 이 지역은 고구려 대장군 대조영이 세운 발해의 세 번째 도읍이 있던 곳으로 궁터가 유적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발해 조선족들이 재배한 쌍수이미(响水米)쌀로 조선 전통 음식을 하는 조선족 촌 음식점에서 대접해 주었다.

 

“쌍수이미(向水米)”- 이 쌀은 화산 지대에서만 나는 특별한 쌀로 일반 쌀인데도 찹쌀같이 차지고 맛이 있는 쌀로 여기에서만 나는 것으로 비싸게 팔리는 귀한 쌀이다. 이 벼는 화산암 위에 얇게 덮인 흙층에 뿌리를 내려 만들어 내는 신비로운 쌀이다. (중국 특산물 “쌍수이미(响水米)”를 참고)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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